"고향에 대한 그리움 화폭에 담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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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10-29 08:39|본문
"고향에 대한 그리움 화폭에 담아"
조선족화가 문현택씨 서울에서 두 번째 개인전 열어 “이번 전시회에 출품한 작품들은 주로 흙냄새를 맡으며 자란 고향의 모습과 어렴풋이 기억에 남아있는 고향의 이미지를 담았다”
2010년에 이어 25일,한국 서울에서 두 번째 개인전을 연 조선족화가 문현택씨(53세). 고향이 단골소재로 등장하는그의 그림은 고향을 떠난 중국동포들의 정서와 맞물려 향수를 자극하고 있다.
문현택 화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구로아트벨리갤러리에서 내빈들이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서울구로아트벨리갤러리에서 열린전시회에는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라는 주제로 30여폭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 시절의 추억’, ‘농가의 겨울이야기’, ‘고향의 정’, ‘봄이 오는 소리’ 등 제목에서부터 짙은 고향의 정취가 묻어난다.
문현택씨의 고향은 흑룡강성 해림시 신안진의 한 시골마을이다. 거기에는 그가 화가의 꿈을 키우며 열정을 다해 누비던 산과 들이 있고, 눈이오나 비가 오나 무거운 화구를 들어주며 스케치에 따라 나섰던 죽마고우들과의 따뜻한 우정이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처음 소수레를 탔던 동년의 값진 추억이 있다.
문현택화가(오른쪽 두번째)가 손님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사실적인것과 추상적인 것의 경계를 오가는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시골,고향의 하늘, 애를 업고 있는 아낙, 담배 굽는 가마, 황소, 수레 등 고향의 일초일목이 담겨있다.
“지금은 고향에 연고가 없지만 언젠가는 한번 꼭 가보고 싶다. 고향은 내 예술적 삶의 원천이고 원동력이다”
장애만큼 컸던 화가의 꿈
너는 장애자이기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나 알 때 열을 알아야 살아남는다”
5남매 중 막내로 귀하게 태어났지만 출생 7개월만에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된 막내아들의 미래를 부모들은 늘 걱정했다.그리하여 문씨는 동년배들보다 훨씬 일찍생계수단에 대해 고민을 하며 마음을 굳게 키웠다. 의술, 라디오수리 등을 두루배워봤지만 적성에 맞지않았다. 그러던 그가 12살 나던 해에 목단강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네미술교사로 온 주성근선생을 만나며 ‘화가’라는 명확한 목표를 세운다
당시 서양화에 필요한 수채화지, 물감, 붓은 농촌에서 구하기 어려울 만큼 가격도 비쌌기에 일정한 가정형편이 되어야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들은 그림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막내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형과 누나들은 백방으로 두꺼운 종이를 구해다 동생 도화지로 쓰게 했다. 그 본인도 그림공부를 함께 한 친구들이 쓰다버린 화구들을 다시 챙겨쓰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주선생의 소개로 해림시문화관의 함성호미술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매주 일요일마다 레슨을 받기 위해 새벽 5시에 시골의 집을 나섰다.
불편한 다리로 8리 길을 걸어 시내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는 또 한 시간을 달려야 했다.수업을 마치고는 동일 코스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기를 4년간 반복했다.
그는 악천후에도 기후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자연을 찾아 다녔다. 가냘픈 어깨로 무거운 화구를 메고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 수없이 넘어지고 손과 발에 동상도 입었다.
이렇게 포기를 모르고 오직 꿈을 향해 달려오던 그였지만 고등학교 졸업 찰나에 큰 시련이 찾아온다. 그가 꿈꾸던 대학에서 장애인을 받지 않는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는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기보다 그림실력이 못한 친구들이 대학교 예술학과에 입학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더 없이 큰 상심에 시달려야 했다.
허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본인의 재능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당시 목재가 많이 나던 흑룡강성 야부리에 가서 찬장이나 옷장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하며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그 후에도 그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고 미술공예공장에 취직하기도 하면서 미술을 향한 추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중에는 28세의 적지 않는 나이에 연변통신방송대학 디자인학과에 다녔고 한국 지인의 도움으로 한국 대구대학에서 2년간 서양화를 전공하기도 했다.
영혼을 담은 독보적인 나이프화법
“붓은 물에 헹구어도 앞의 물감들이 묻어나 색감을 흐린다. 나이프로 그리면 물감이 생동하다.”
그는 붓이 아닌 페인팅 나이프로는 칼과 비슷한 도구로 그림을 그린다. 붓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나이프로 독보적인 화법을 연구해 온지 23년이 됐다.
그는 대구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는 2년동안에도 유일하게 나이프로 창작을 하는 학생이었다.
“예술적 수양과 색감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기법은 각자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에 얼만한 영혼을 담는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평가된다.”
한국현대예술연구회 임봉재 대표는 그의 작품에 대해 “붓보다는 페인팅 나이프로 거리낌 없이 과감하게 원색의 색채들을 날카롭게 병렬시켜 시간적 흥분을 느끼게 하며 거기서 축적된 색채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기를 발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95년에 한국 대구대학에 유학오면서 지금까지 한국에 남은 그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왔지만 미술창작은 멈추지 않았다. 창작을 하는 시간은 그에게 있어 한국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신심과 안정을 되찾으며 재충전 할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이었다.
그는 경남미술대전•가야미술대전 입상, 제19회 근로자예술제 미술부문 은상, 국제문화예술대상전 서양화부문 대상, 국제환경미술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
문현택 화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는 서울 구로아트벨리갤러리에서 내빈들이 함께 테이프 커팅을 하고 있다.
서울구로아트벨리갤러리에서 열린전시회에는 ‘구상과 비구상의 경계에서’라는 주제로 30여폭의 작품이 출품되었다. ‘그 시절의 추억’, ‘농가의 겨울이야기’, ‘고향의 정’, ‘봄이 오는 소리’ 등 제목에서부터 짙은 고향의 정취가 묻어난다.
문현택씨의 고향은 흑룡강성 해림시 신안진의 한 시골마을이다. 거기에는 그가 화가의 꿈을 키우며 열정을 다해 누비던 산과 들이 있고, 눈이오나 비가 오나 무거운 화구를 들어주며 스케치에 따라 나섰던 죽마고우들과의 따뜻한 우정이 있으며 아버지와 함께 처음 소수레를 탔던 동년의 값진 추억이 있다.
문현택화가(오른쪽 두번째)가 손님들에게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사실적인것과 추상적인 것의 경계를 오가는 그의 작품에는 자연과 시골,고향의 하늘, 애를 업고 있는 아낙, 담배 굽는 가마, 황소, 수레 등 고향의 일초일목이 담겨있다.
“지금은 고향에 연고가 없지만 언젠가는 한번 꼭 가보고 싶다. 고향은 내 예술적 삶의 원천이고 원동력이다”
장애만큼 컸던 화가의 꿈
너는 장애자이기때문에 다른 사람이 하나 알 때 열을 알아야 살아남는다”
5남매 중 막내로 귀하게 태어났지만 출생 7개월만에 소아마비로 장애를 갖게 된 막내아들의 미래를 부모들은 늘 걱정했다.그리하여 문씨는 동년배들보다 훨씬 일찍생계수단에 대해 고민을 하며 마음을 굳게 키웠다. 의술, 라디오수리 등을 두루배워봤지만 적성에 맞지않았다. 그러던 그가 12살 나던 해에 목단강사범학교를 졸업하고 동네미술교사로 온 주성근선생을 만나며 ‘화가’라는 명확한 목표를 세운다
당시 서양화에 필요한 수채화지, 물감, 붓은 농촌에서 구하기 어려울 만큼 가격도 비쌌기에 일정한 가정형편이 되어야 미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가난한 농부였던 부모들은 그림에 진지하게 몰입하는 막내의 꿈을 응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형과 누나들은 백방으로 두꺼운 종이를 구해다 동생 도화지로 쓰게 했다. 그 본인도 그림공부를 함께 한 친구들이 쓰다버린 화구들을 다시 챙겨쓰면서 그림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불태웠다.
그는 주선생의 소개로 해림시문화관의 함성호미술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매주 일요일마다 레슨을 받기 위해 새벽 5시에 시골의 집을 나섰다.
불편한 다리로 8리 길을 걸어 시내로 향하는 기차에 몸을 싣고는 또 한 시간을 달려야 했다.수업을 마치고는 동일 코스를 이용해 집으로 돌아오기를 4년간 반복했다.
그는 악천후에도 기후변화를 관찰하기 위해 자연을 찾아 다녔다. 가냘픈 어깨로 무거운 화구를 메고 스케치를 하는 과정에 수없이 넘어지고 손과 발에 동상도 입었다.
이렇게 포기를 모르고 오직 꿈을 향해 달려오던 그였지만 고등학교 졸업 찰나에 큰 시련이 찾아온다. 그가 꿈꾸던 대학에서 장애인을 받지 않는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충격을 이기지 못한 그는 그대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자기보다 그림실력이 못한 친구들이 대학교 예술학과에 입학하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더 없이 큰 상심에 시달려야 했다.
허나 그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본인의 재능을 잠재울 수 없었다. 그는 당시 목재가 많이 나던 흑룡강성 야부리에 가서 찬장이나 옷장에 그림을 그려 넣는 일을 하며 괜찮은 수입을 올렸다. 그 후에도 그는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기도 하고 미술공예공장에 취직하기도 하면서 미술을 향한 추구의 끈을 놓지 않았다. 나중에는 28세의 적지 않는 나이에 연변통신방송대학 디자인학과에 다녔고 한국 지인의 도움으로 한국 대구대학에서 2년간 서양화를 전공하기도 했다.
영혼을 담은 독보적인 나이프화법
“붓은 물에 헹구어도 앞의 물감들이 묻어나 색감을 흐린다. 나이프로 그리면 물감이 생동하다.”
그는 붓이 아닌 페인팅 나이프로는 칼과 비슷한 도구로 그림을 그린다. 붓으로 그림을 배웠지만 나이프로 독보적인 화법을 연구해 온지 23년이 됐다.
그는 대구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하는 2년동안에도 유일하게 나이프로 창작을 하는 학생이었다.
“예술적 수양과 색감을 배우는 것이 중요했다. 기법은 각자 나름이라고 생각했다. 작품에 얼만한 영혼을 담는가에 따라 작품의 가치가 평가된다.”
한국현대예술연구회 임봉재 대표는 그의 작품에 대해 “붓보다는 페인팅 나이프로 거리낌 없이 과감하게 원색의 색채들을 날카롭게 병렬시켜 시간적 흥분을 느끼게 하며 거기서 축적된 색채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듯한 기를 발산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1995년에 한국 대구대학에 유학오면서 지금까지 한국에 남은 그는 생계를 위해 여러 가지 일을 해왔지만 미술창작은 멈추지 않았다. 창작을 하는 시간은 그에게 있어 한국생활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신심과 안정을 되찾으며 재충전 할 수 있는 최상의 순간이었다.
그는 경남미술대전•가야미술대전 입상, 제19회 근로자예술제 미술부문 은상, 국제문화예술대상전 서양화부문 대상, 국제환경미술대전 대상 등을 수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