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진출 15년, "절대신뢰 받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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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9-21 11:07|본문
상해진출 15년, "절대신뢰 받기 위해…"
박철씨가 근무하고있는 상해시만륭중신변호사사무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건물 제일 웃층인 19층에 당도하자 마중을 나온 인텔리풍의 박철변호사(58세)를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사무실 한켠의 응접실에서 편안히 시작한 인터뷰, 박철변호사는 소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생각이 복잡하지 않은 사람
일어를 배워서 일본류학을 가는것이 꿈이였던 박철변호사는 어쩌구려 꿈과는 어긋난 연변련합대학(현 연변대학) 법률계를 다니게 되였다. 1980년 당시 갓 나온 학과라 인기도 별로 없었고 관련 자료들도 많지 않았지만 박변호사는 열심히 공부했다. 연길시신화서점에 붙박혀서 법률분야는 물론 의학, 력사, 지리, 일어, 등 광범한 분야의 책들을 탐독했다. 필요한 책을 주문하면 나중에 신화서점에서 출간통지를 등사하여 우편으로 보내곤 하던 기억이 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1983년 12월에 졸업한 박변호사는 연변주사법국에 배치되여 간부양성반 교원으로 근무했다. 중앙정법간부학교 경제법교사자격반 연수도 다녀오는 등 사업터에서 한창 손을 펴던중 법률분야에 변화가 찾아왔다. 1986년부터 변호사자격시험제도가 시작된것이다. 개인적인 발전과 사회적인 발전추세를 두고 거듭 고민하던끝에 박변호사는 전문변호사로 되는 길을 택하기로 하고 1988년 합격률이 전국적으로 5%밖에 안된다는 시험에 응시, 무난히 통과하여 변호사자격증을 취득했다.
“저는 생각이 복잡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하면 성과가 나옵니다. 또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합니다.”
당시는 변호사들이 대부분 공직이였다. 북경진출을 결심한 박변호사는 1992년 9월에 과감히 사표를 냈다.
“당시 연변에서 13번째로 사표를 낸 변호사인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인사당안이 인재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북경진출 약 5년만에 변호사법이 개정되면서 개인적으로 변호사사무소를 설립할수 있다는 조항이 나왔다. 1995년 그는 다시 연변으로 돌아와서 영창변호사사무소를 설립했다. 90년대 말에 한국기업이 중국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한국어에 능통한 변호사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박철변호사는 붐을 타고 과감히 상해행을 선택했다. 활동하던 지역이 다른만큼 상해에 발을 붙이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상해에 진출했던 많은 변호사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지만 박변호사는 자신만의 노하우와 경험으로 상해에 든든히 뿌리내렸다.
변호사는 절대신뢰 받아야
15년 세월, 박철변호사가 자신의 립지를 굳히기 위해 쏟아부었던 노력은 멈춘적이 없었다. 주변인들은 박변호사를 끝없이 공부하는 책벌레라고 말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절대적인 신뢰를 가질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는 변호사란 어떠한 분야 어떠한 사건이든지 정확히 판단하고 파생될 문제를 예측하며 옳바른 대안을 제시하는면에서 환자의 증세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와 닮았다고 말한다.
“한밤중에 자문전화가 걸려오기도 합니다. 실례인줄 알면서 전화를 걸어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조급할가 싶어 안경을 찾아서 걸고 사색을 가다듬어 답변해드리곤 합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전문성이 강한 직업이지만 의뢰인을 위한 서비스업이기도 하다. 박변호사는 주요하게 대외무역, 외국투자상 및 기업설립, 기업합병과 재조합 등에 관련된 법률업무를 담당하면서 굵직한 소송과 처리하기 어려운 소송을 많이 해결해왔다. 한편 조선족들을 위해 무료로 법률자문을 해준 사례도 셀수없이 많다.
“대책을 제시해주는것만으로도 뒤심이 생겨서 든든해합니다. 조선족사회를 위해서 뭔가 할수 있다는것이 다행스러울뿐입니다.”
사회활동서 자기가치 발견
박철변호사는 절대 일의 더미속에만 빠져사는 무미건조한 스타일은 아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상해 조선족사회에서 다양한 친목모임과 공익활동에 적극 헌신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리사, 연변대학 상해동문회 부회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상해 조선족사회의 단합 및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놓았다.
“직장생활과 달리 사회활동은 자발적인것입니다. 나의 행동에 근거해 사회적인 지위가 정해집니다.”
이제 그는 한발 물러서서 무대중심으로 다가서고있는 후배들을 적극 밀어주고있다. 박변호사는 상해출 초기에 비하면 현재 사회적공간이 드넓게 마련돼있는만큼 30~40대의 조선족들이 직장생활뿐만아니라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기여한다면 자기가치의 발견은 물론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을수 있을것이라 했다.
“책임을 떠멜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가성을 바라고 하는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확은 꼭 있습니다. 덤으로 우리가 몸담근 이 사회가 더욱 멋있어지지 않을가요.”
박철씨가 근무하고있는 상해시만륭중신변호사사무소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건물 제일 웃층인 19층에 당도하자 마중을 나온 인텔리풍의 박철변호사(58세)를 한눈에 알아볼수 있었다. 사무실 한켠의 응접실에서 편안히 시작한 인터뷰, 박철변호사는 소탈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생각이 복잡하지 않은 사람
일어를 배워서 일본류학을 가는것이 꿈이였던 박철변호사는 어쩌구려 꿈과는 어긋난 연변련합대학(현 연변대학) 법률계를 다니게 되였다. 1980년 당시 갓 나온 학과라 인기도 별로 없었고 관련 자료들도 많지 않았지만 박변호사는 열심히 공부했다. 연길시신화서점에 붙박혀서 법률분야는 물론 의학, 력사, 지리, 일어, 등 광범한 분야의 책들을 탐독했다. 필요한 책을 주문하면 나중에 신화서점에서 출간통지를 등사하여 우편으로 보내곤 하던 기억이 잊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1983년 12월에 졸업한 박변호사는 연변주사법국에 배치되여 간부양성반 교원으로 근무했다. 중앙정법간부학교 경제법교사자격반 연수도 다녀오는 등 사업터에서 한창 손을 펴던중 법률분야에 변화가 찾아왔다. 1986년부터 변호사자격시험제도가 시작된것이다. 개인적인 발전과 사회적인 발전추세를 두고 거듭 고민하던끝에 박변호사는 전문변호사로 되는 길을 택하기로 하고 1988년 합격률이 전국적으로 5%밖에 안된다는 시험에 응시, 무난히 통과하여 변호사자격증을 취득했다.
“저는 생각이 복잡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열심히 하면 성과가 나옵니다. 또 당연히 그렇게 돼야 합니다.”
당시는 변호사들이 대부분 공직이였다. 북경진출을 결심한 박변호사는 1992년 9월에 과감히 사표를 냈다.
“당시 연변에서 13번째로 사표를 낸 변호사인걸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때로부터 인사당안이 인재시장으로 넘어갔습니다.”
북경진출 약 5년만에 변호사법이 개정되면서 개인적으로 변호사사무소를 설립할수 있다는 조항이 나왔다. 1995년 그는 다시 연변으로 돌아와서 영창변호사사무소를 설립했다. 90년대 말에 한국기업이 중국으로 대거 진출하면서 한국어에 능통한 변호사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다. 박철변호사는 붐을 타고 과감히 상해행을 선택했다. 활동하던 지역이 다른만큼 상해에 발을 붙이기는 쉽지 않았다. 당시 상해에 진출했던 많은 변호사들이 적응하지 못하고 고향으로 되돌아갔지만 박변호사는 자신만의 노하우와 경험으로 상해에 든든히 뿌리내렸다.
변호사는 절대신뢰 받아야
15년 세월, 박철변호사가 자신의 립지를 굳히기 위해 쏟아부었던 노력은 멈춘적이 없었다. 주변인들은 박변호사를 끝없이 공부하는 책벌레라고 말한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절대적인 신뢰를 가질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학습이 필요합니다.”
그는 변호사란 어떠한 분야 어떠한 사건이든지 정확히 판단하고 파생될 문제를 예측하며 옳바른 대안을 제시하는면에서 환자의 증세를 진단하고 처방을 내리는 의사와 닮았다고 말한다.
“한밤중에 자문전화가 걸려오기도 합니다. 실례인줄 알면서 전화를 걸어오는 그 마음이 얼마나 조급할가 싶어 안경을 찾아서 걸고 사색을 가다듬어 답변해드리곤 합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전문성이 강한 직업이지만 의뢰인을 위한 서비스업이기도 하다. 박변호사는 주요하게 대외무역, 외국투자상 및 기업설립, 기업합병과 재조합 등에 관련된 법률업무를 담당하면서 굵직한 소송과 처리하기 어려운 소송을 많이 해결해왔다. 한편 조선족들을 위해 무료로 법률자문을 해준 사례도 셀수없이 많다.
“대책을 제시해주는것만으로도 뒤심이 생겨서 든든해합니다. 조선족사회를 위해서 뭔가 할수 있다는것이 다행스러울뿐입니다.”
사회활동서 자기가치 발견
박철변호사는 절대 일의 더미속에만 빠져사는 무미건조한 스타일은 아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좋아하고 무엇보다도 상해 조선족사회에서 다양한 친목모임과 공익활동에 적극 헌신하는 활동가이기도 하다. 그는 중국조선족과학기술자협회 리사, 연변대학 상해동문회 부회장 등으로 활약하면서 상해 조선족사회의 단합 및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 많은 일들을 해놓았다.
“직장생활과 달리 사회활동은 자발적인것입니다. 나의 행동에 근거해 사회적인 지위가 정해집니다.”
이제 그는 한발 물러서서 무대중심으로 다가서고있는 후배들을 적극 밀어주고있다. 박변호사는 상해출 초기에 비하면 현재 사회적공간이 드넓게 마련돼있는만큼 30~40대의 조선족들이 직장생활뿐만아니라 사회활동에 적극 참가하고 기여한다면 자기가치의 발견은 물론 정신적인 만족감을 얻을수 있을것이라 했다.
“책임을 떠멜수 있는 능력이 된다면 적극 나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대가성을 바라고 하는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하지만 수확은 꼭 있습니다. 덤으로 우리가 몸담근 이 사회가 더욱 멋있어지지 않을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