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형님 생각 또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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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8-17 08:52|본문
그 형님 생각 또 난다
8월 5일은 길림대학 제1병원 박운봉교수가 세상을 뜬지 한돐이 되는 날이다. 요즘은 왜선지? 그 형님 생각이 무척 난다.
항상 하얀 와이셔츠를 껴입는 름름한 신사풍모, 준엄한 얼굴표정, 툭툭 내쏘는 연변말투와 익살스러운 롱담은 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내가 제일 처음 박교수를 만났을 때는 1997년도 9월의 어느날 길림대학 제1병원에서였다. 그날 나는 나의 군소속병원 조선족 군의(军医) 의 소개로 소화내과에 가 박교수를 찾아 위병진찰을 받았던것이다.
비록 소개는 받았지만 진찰실문앞에 환자들이 너무 많아 체면때문에 앞으로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번호순서에 따라 대기할수 밖에 없었다.
《저뒤에 선 현역군인! 앞으로 와 진찰받으시오.》갑자기 박교수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사위를 둘러보니 군복차림을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며 부랴부랴 박교수의 진찰실로 뛰여갔다.
《먼저 위경검사를 받아보시오.》 박교수는 나의 얼굴을 피끗 한번 쳐다보고 처방지에 몇글자 써주고는 다음 환자에게 눈길을 돌리는것이였다.
몇시간후 나는 위경검사결과서를 가지고 다시 박교수를 찾았다.
《위출혈이구만! 소량의 출혈이여서 약치료면 될것이요.》 박교수의 진단에 놀란 나는 입원치료를 청구하였다.
그러자 박교수는 단마디로 나의 말을 중둥무이했다. 《필요 없소! 그런데 치료기간엔 술을 마시면 안되오!》
진찰실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박교수를 되돌아보았다. 엄숙한 얼굴표정과 개살구처럼 텁텁한 말투, 이것이 박교수가 나에게 준 첫인상이였다.
2002년 봄, 나는 군부대에서 제대한지 2년만에 친구의 소개로 박교수에게 공식 술인사를 올렸다. 이날 박교수는 나를 결의형제중 막둥이로 맞아들였다.
그때에야 나는 박교수가 일찍 일본 도꾜대학 의학부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미국 토마스 제프손대학 박사후 공부까지 하였으며 1994년에 교수로 파격진급되여 만성간병, 간경화, 위장도질병, 각종 소화질병을 전문 진단치료하는 의학계에 널리 알려진 저명한 의학전문가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박교수는 나와 여덟살이상인 형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같은 화룡사람이고 지식청년생활, 군인복무경력에, 그리고 성격스타일까지 비슷하여 대화소통도 편했다. 또한 지식이 풍부해 존경스러웠다. 그때로부터 10여년간 나는 박형을 교수라 칭하지 않고 그냥 형으로 호칭했었다.
박형은 의술(医术)이 고명해 사회지명도가 높았을뿐만아니라 인품이 좋고 성격특징이 독특해 장춘조선족사회의 그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도 다 어울릴수 있었다. 이리하여 비록 나이때문에 이 동네에 가서는 둘째형으로, 저 동네에 가서는 셋째형으로 지냈었지만 그 어느 동네에 가나 기분을 잘 돋구고 례의와 원칙을 지키는 의견중심이 되였기에 실지 《맛형》노릇을 하다싶이 하였다.
그후 나는 박형을 비롯한 여러 형님들의 소개로 장춘조선족사회의 저명한 교수, 전문가, 기업가 등 사회 지명인사들을 만나게 되면서 스러져가던 민족감정을 되찾을수 있었다.
매번 《형제》모임 때면 술상을 차리기전에 먼저 한돌개는 박형의 건강문진을 받는것이 첫 순서다. 박형은 차근히 여러분들의 병황구술을 듣고 검사결과를 보고 건강주의점을 강조하고는 즉시 령수증 뒤면에 아니면 담배갑 종이쪼박에 처방을 써주군 했다. 박형은 의사여서인지 번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술을 적당히 마시오.》라는 권고의 말 한마디는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첫두순배는 아주 얌전하게 이어지다가 박형의 유머에 못이겨 기분이 고조를 이루면서 저마다 건강 《권고》를 새까맣게 잊은채 과량할 때도 많았다.
사실 박형도 술을 반가와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그 어느 장소에서나 례의를 지켰고 신분과 자태를 똑바로 했기에 전혀 실수가 없었다.
박형은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제4기 리사회때부터 상무리사였다. 2005년초에 나는 박형의 소개로 진흥총회에 공식 가입되여 5기부터 7기까지 9년간 박형과 함께 총회회장단에서 일해왔다.
진흥총회 제5기 리사회는 박운봉, 남호태 두분이 장춘화우그룹 부총재인 류천문을 회장으로 추천하여 새로운 리사회를 구성하면서부터 새 출발을 했다. 5기 리사회는 최수남, 김증손, 남정, 박운봉, 남호태, 리규광, 김희재, 곽운룡, 김룡규 등 26명의 로중년 성원들로 지도부를 이루었다.
박형은 5기 리사회로부터 7기리사회에 이르기까지 총회의 부리사장직을 맡았고 또 7기 리사회 감사회 주석을 겸하였으며 8기 리사회 고문위원회 부주임직을 맡았다. 그는 총회의 지도부 일원으로서 언제나 총회 단체명예를 중요시하였으며 총회의 중요한 회의에 적극 참가해 많은 조언과 제안을 드려 총회사업결책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7기 리사회가 곧 만기되는 2012년말이였다. 총회리사회는 8기 리사회 리사장(회장) 립후보자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 어느날 류천문리사장은 리사장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전흥수비서장이 사전에 추천받은 몇몇 립후보자명단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갔다. 그중에 신봉철서기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이때 그 누군가 《저, 신서기가 담임하면 좋겠는데?》 하고 말을 꺼냈다.
《신서기면 잘할수 있지! 문제는 재직당위 서기여서 사회직무를 겸임할수 있을가?》, 《신서기 본인이 동의하겠는지?》 비록 이런 의문들이 오갔지만 18명 회의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신봉철서기를 점찍었다.
나 중요한것은 남들의 일방적인 선정보다 본인을 설득하여 동의를 받는것이 관건이였다.
이때 류천문리사장이 박형을 처다보면서 《신서기를 설득할수 있는분은 박형뿐이요!》그러자 박형은 《모두 동의한다면 내가 책임지고 신서기를 설득해보겠소.》하고나서 박형은 회의가 결속되는 그 즉시로 신봉철서기를 찾아 설득사업을 시작했다.
첫 면담에 쉽게 답이 안 나온 모양이다. 그후 박형은 수차례 신서기를 만나 설복과 《압력》을 가해 최종 설득임무를 원만히 완수했다.
비록 총회 몇기의 고문으로 총회상황을 잘 알고 민족간부로서의 깊은 감정과 그 사명감에 신봉철서기가 최종 동의와 결정을 내린것이였겠지만 그 과정에 박형의 숨은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의료하향은 총회 활동종목에서의 유명브랜드다. 5기 리사회때 박형과 남정교수가 개척하고 인솔한 총회 의료팀은 산재지역 조선족 향촌의 농민과 경로원 로인들을 대상으로 10여년간 무료진찰과 의약품지원봉사활동을 해왔다. 박형의 인솔하에 총회 의료팀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또 박형의 설득으로 길림대학 제1병원 의약품 지원금은 2013년의 2만원으로부터 5만원으로 늘어나게 되였다.
올해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10년간 총회 의료팀이 하향한 차수는 22차에 달하며 지원약품의 총가치는 24만원에 달한다.
요즘 박형의 제자이고 후배들인 길림대학 제1병원 림승혁, 림광주, 성환길, 박금화, 주명희 등 교수들을 골간으로 한 의료지원봉사팀은 이미 길림대학 제2, 제3병원과 기타 병원의 의료일군까지 참여하여 그 대오가 몇십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박형이 남긴 민족정신, 의학도덕, 애심의 기발을 높이 들고 그의 뒤를 이어 산재지역 향촌으로, 경로원으로 륙속 내려가고있다.
2014년 1월 중순, 길림대학 조선족교직원 새해맞이야회에 참가한 나는 김증손교수로부터 박형이 골수이형성증후군병으로 확진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청천병력이였다. 나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 이튿날 나는 아침부터 온종일 박형께 전화를 걸었다. 오후에야 전화를 받은 박형은 《요즘은 오전에 치료받고 오후에 집에서 휴식하는데 병문안은 필요 없구 며칠후에 만날수 있으니 그냥 소문만 내지 말았으면 하오.》
유수시 연화향에서 조선족 촌민들을 진찰하고있는 고 박운봉교수
조선족활동이라면 그토록 열정적이던 박형은 1월 17일에 있은 장춘시조선족새해맞이야회에 끝내 참가하지 못했다.
1월 19일 오후, 나는 안해와 함께 박형네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박형의 얼굴은 다소 피곤기가 있었지만 정신상태는 좋은편이였다. 《요즘 치료를 받고나니 진찰수치는 많이 좋아졌소》, 《 어제 동생들과 골수이식을 두고 상의도 해보았소. 모레쯤 올거요.》, 《골수 검사수치만 똑바르면 치료는 문제없소.》 하면서 병상황소개로부터 20년전 일본류학시 혈액전공을 했던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엮어내려갔다. 그러나 말을 마치고 난후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있었다.
2월 음력설전후로 박형의 병환소문은 온 장춘판에 퍼졌고 가는곳마다 모임장소마다 박형의 이야기가 화제로 되였다.
검사결과 큰녀동생이 골수이식을 하기로 나섰고 박형은 천진, 북경, 한국 세곳 병원을 놓고 보름간 검토하다가 최종 한국성모병원을 선택하였다
헌데 한국성모병원 치료비는 만만치 않아 박형은 또 고민에 빠졌다. 그후 신봉철 등 여러분들의 지원으로 치료비용문제는 한국 출발전 일주일 앞둔 4월 8일 오후에 원만히 해결되였다.
한국 출발 예정일은 4월 16일이였다. 12일에 나는 신봉철회장과 함께 총회명의로 박형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했다. 남영전과 김문관도 자리를 같이 했다. 박형은 눈물이 글썽해 말했다. 《신서기 고맙소! 여러분 고맙소! 내 꼭 그 은혜를 갚겠소.》, 《내 우리 정애(박형의 안해) 하고도 말했소! 내 돌아오지 못하면 대신 아들 결혼잔치때 사회의 부조돈을 절대 받지 말라고!》, 《문관형님! 한국 가기전에 내 쓰던 낚시공구세트를 형님께 드리고 가겠소.》 , 《장권아! 내 미안하다.》
나는 박형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 입원치료전에 일련의 난제는 모두 잘 풀렸기에 귀찮은 얘기는 그만하시고 이제 6개월 치료기간에는 술을 못마시니 오늘은 기분 좋게 마시기오! 한국에서 완치하고 돌아오실 그때에 또 환영만찬을 멋지게 차릴게요.》 한자리에 앉은 여러분들도 박형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것을 기원하였다.
한국으로 떠나는 날 나는 아침 일찍 안해와 함께 공항으로 갔다. 이때 박형과 형수님 그리고 동생들이 벌써 공항에 와있었다. 그뒤로 남영전, 리충일, 김길남, 최금순, 류천문부부 등도 박형을 바래러 공항에 나왔다. 출발시간이 넉넉하기에 나와 남영전, 리충일 셋이 박형을 밖으로 모시여 담배를 피우면서 잠간 얘기를 나눴다.
형님! 신서기가 오늘 학교에서 당위회의를 소집하기에 공항까지 바래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전달해달라고 했소.《아까전에 전화왔습데! 동생 돌아가서 신봉철에게 고맙다고 다시 한번 전해주오!》박형은 고맙다는 말을 연신 꺼냈다.
그날 박형의 옷차림은 제법 신사차림이였다. 앓는 환자 같지 않았다. 곱게 빗어넘긴 머리칼에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 게다가 새하얀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까지 맨 양복차림…
이를 본 나의 안해는《 오라버님! 오늘 진짜 멋집니다! 돌아오실 때 내 꼭 큰 꽃바구니를 들고 마중나오겠습니다.》고 롱조로 말을 걸었다.
박형은《꽃바구니는 말구 그냥 꽃 한송이면 된다.》 면서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수속시간이 다가올무렵 나는 《형님! 이제부터 반년은 담배를 못 피우니 한대 더 피우고 들어가오!》 하고 박형께 담배불을 붙여드렸다. 박형은 주머니에서 남은 담배 반갑과 라이타를 나한테 주고는 여러분과 일일이 악수하고 검역입구로 몸을 옮겼다.
검역입구를 나가는 순간 박형은 불현듯 몸을 뒤돌려 배웅하러 나온 여러분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굽혀 경례를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였다.
4월 26일, 박형은 《한국 성모병원이 조건이 괜찮다. 요즘은 골수공급자인 녀동생의 이식조건 재검사중이다.》고 위챗(微信)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5월 12일, 박형은 《14일부터 골수이식수술을 하게 된다. 한달간은 무균병실에서 관찰치료를 받으니 련계 못한다.》고 두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한달후 나는 몇번이나 문자를 보냈지만 답신이 없었다. 그러던 6월 24일 오후, 박형은 《온몸이 통증이 심해 밥 한알도 먹지 못한다.》고 세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그후 종종 소식이 없어 답답한 끝에 면회하고 귀국한 길림신문사 전임 남영전사장을 통해 박형의 얼굴과 손등 피부상태가 탈상 (脱像)되여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여서 상황이 좀 심각하다는것을 알게 되여 인젠 기적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기도할수 밖에 없었다.
8월 6일은 진흥총회 대표단이 목단강으로 기업탐방을 떠나는 날이였다. 오후 4시쯤 목단강시 금약그룹 첫날 방문을 끝마치고 호텔로 이동하는 중 길림대학 제1병원 핵의학실 주임인 림승혁교수가 박형이 5일에 이미 한국에서 사망했으며 8일 오후 3시에 장춘에서 영결식을 갖기로 했다고 알렸다.
신봉철회장은 그 즉시로 나와 유창진비서장을 불러 긴급회의를 소집, 8일의 흑룡강신문사 방문일정을 취소하고 신봉철회장이 추도사를 집필하며 유창진비서장더러 총회 및 사회단체 영결식참여통지와 화환 등 조직준비를 할것을 포치하였다.
8월 8일 오후 3시경, 장춘시 장례식장 서청에서 거행된 고박운봉교수영결식에는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전임 부주임 남상복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길림대학 제1병원 임직원, 성과 시 관련부문의 조선족 현직간부, 진흥총회 등 장춘시조선족 여러 사회단체 회원과 사회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하였다.
영결식은 박형의 마지막 얼굴도 볼수 없이 골회함만 놓고 거행하였다. 다행히 박형의 생전록상화면이 방영되여 사람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애로운 얼굴을 다시 볼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와 웃는 모습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다.》(音容笑貌永存心间)신봉철회장이 비통의 심정을 담아 드린 추도사는 전 장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박형을 떠나보낸후 나는 련며칠 일이 손에 전혀 잡혀지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나의 눈앞에는 박형과 함께 한 마지막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가는것 같다.
오장권(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상무부회장)
8월 5일은 길림대학 제1병원 박운봉교수가 세상을 뜬지 한돐이 되는 날이다. 요즘은 왜선지? 그 형님 생각이 무척 난다.
항상 하얀 와이셔츠를 껴입는 름름한 신사풍모, 준엄한 얼굴표정, 툭툭 내쏘는 연변말투와 익살스러운 롱담은 내 눈앞에 선히 떠오른다.
내가 제일 처음 박교수를 만났을 때는 1997년도 9월의 어느날 길림대학 제1병원에서였다. 그날 나는 나의 군소속병원 조선족 군의(军医) 의 소개로 소화내과에 가 박교수를 찾아 위병진찰을 받았던것이다.
비록 소개는 받았지만 진찰실문앞에 환자들이 너무 많아 체면때문에 앞으로 감히 다가서지 못하고 번호순서에 따라 대기할수 밖에 없었다.
《저뒤에 선 현역군인! 앞으로 와 진찰받으시오.》갑자기 박교수의 부름소리가 들려왔다. 사위를 둘러보니 군복차림을 한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나는 나의 귀를 의심하며 부랴부랴 박교수의 진찰실로 뛰여갔다.
《먼저 위경검사를 받아보시오.》 박교수는 나의 얼굴을 피끗 한번 쳐다보고 처방지에 몇글자 써주고는 다음 환자에게 눈길을 돌리는것이였다.
몇시간후 나는 위경검사결과서를 가지고 다시 박교수를 찾았다.
《위출혈이구만! 소량의 출혈이여서 약치료면 될것이요.》 박교수의 진단에 놀란 나는 입원치료를 청구하였다.
그러자 박교수는 단마디로 나의 말을 중둥무이했다. 《필요 없소! 그런데 치료기간엔 술을 마시면 안되오!》
진찰실을 떠나면서 나는 다시 박교수를 되돌아보았다. 엄숙한 얼굴표정과 개살구처럼 텁텁한 말투, 이것이 박교수가 나에게 준 첫인상이였다.
2002년 봄, 나는 군부대에서 제대한지 2년만에 친구의 소개로 박교수에게 공식 술인사를 올렸다. 이날 박교수는 나를 결의형제중 막둥이로 맞아들였다.
그때에야 나는 박교수가 일찍 일본 도꾜대학 의학부 박사학위를 획득하고 미국 토마스 제프손대학 박사후 공부까지 하였으며 1994년에 교수로 파격진급되여 만성간병, 간경화, 위장도질병, 각종 소화질병을 전문 진단치료하는 의학계에 널리 알려진 저명한 의학전문가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박교수는 나와 여덟살이상인 형이다. 비록 나이 차이는 많았지만 같은 화룡사람이고 지식청년생활, 군인복무경력에, 그리고 성격스타일까지 비슷하여 대화소통도 편했다. 또한 지식이 풍부해 존경스러웠다. 그때로부터 10여년간 나는 박형을 교수라 칭하지 않고 그냥 형으로 호칭했었다.
박형은 의술(医术)이 고명해 사회지명도가 높았을뿐만아니라 인품이 좋고 성격특징이 독특해 장춘조선족사회의 그 어떤 부류의 사람들과도 다 어울릴수 있었다. 이리하여 비록 나이때문에 이 동네에 가서는 둘째형으로, 저 동네에 가서는 셋째형으로 지냈었지만 그 어느 동네에 가나 기분을 잘 돋구고 례의와 원칙을 지키는 의견중심이 되였기에 실지 《맛형》노릇을 하다싶이 하였다.
그후 나는 박형을 비롯한 여러 형님들의 소개로 장춘조선족사회의 저명한 교수, 전문가, 기업가 등 사회 지명인사들을 만나게 되면서 스러져가던 민족감정을 되찾을수 있었다.
매번 《형제》모임 때면 술상을 차리기전에 먼저 한돌개는 박형의 건강문진을 받는것이 첫 순서다. 박형은 차근히 여러분들의 병황구술을 듣고 검사결과를 보고 건강주의점을 강조하고는 즉시 령수증 뒤면에 아니면 담배갑 종이쪼박에 처방을 써주군 했다. 박형은 의사여서인지 번마다 술을 마실 때마다 《술을 적당히 마시오.》라는 권고의 말 한마디는 빼놓지 않았다. 그래서 첫두순배는 아주 얌전하게 이어지다가 박형의 유머에 못이겨 기분이 고조를 이루면서 저마다 건강 《권고》를 새까맣게 잊은채 과량할 때도 많았다.
사실 박형도 술을 반가와하는 편이였다. 하지만 그 어느 장소에서나 례의를 지켰고 신분과 자태를 똑바로 했기에 전혀 실수가 없었다.
박형은 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제4기 리사회때부터 상무리사였다. 2005년초에 나는 박형의 소개로 진흥총회에 공식 가입되여 5기부터 7기까지 9년간 박형과 함께 총회회장단에서 일해왔다.
진흥총회 제5기 리사회는 박운봉, 남호태 두분이 장춘화우그룹 부총재인 류천문을 회장으로 추천하여 새로운 리사회를 구성하면서부터 새 출발을 했다. 5기 리사회는 최수남, 김증손, 남정, 박운봉, 남호태, 리규광, 김희재, 곽운룡, 김룡규 등 26명의 로중년 성원들로 지도부를 이루었다.
박형은 5기 리사회로부터 7기리사회에 이르기까지 총회의 부리사장직을 맡았고 또 7기 리사회 감사회 주석을 겸하였으며 8기 리사회 고문위원회 부주임직을 맡았다. 그는 총회의 지도부 일원으로서 언제나 총회 단체명예를 중요시하였으며 총회의 중요한 회의에 적극 참가해 많은 조언과 제안을 드려 총회사업결책제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7기 리사회가 곧 만기되는 2012년말이였다. 총회리사회는 8기 리사회 리사장(회장) 립후보자문제로 많은 고민을 하였다. 어느날 류천문리사장은 리사장 긴급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 전흥수비서장이 사전에 추천받은 몇몇 립후보자명단을 하나하나 읽어내려갔다. 그중에 신봉철서기의 이름도 들어있었다. 이때 그 누군가 《저, 신서기가 담임하면 좋겠는데?》 하고 말을 꺼냈다.
《신서기면 잘할수 있지! 문제는 재직당위 서기여서 사회직무를 겸임할수 있을가?》, 《신서기 본인이 동의하겠는지?》 비록 이런 의문들이 오갔지만 18명 회의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신봉철서기를 점찍었다.
나 중요한것은 남들의 일방적인 선정보다 본인을 설득하여 동의를 받는것이 관건이였다.
이때 류천문리사장이 박형을 처다보면서 《신서기를 설득할수 있는분은 박형뿐이요!》그러자 박형은 《모두 동의한다면 내가 책임지고 신서기를 설득해보겠소.》하고나서 박형은 회의가 결속되는 그 즉시로 신봉철서기를 찾아 설득사업을 시작했다.
첫 면담에 쉽게 답이 안 나온 모양이다. 그후 박형은 수차례 신서기를 만나 설복과 《압력》을 가해 최종 설득임무를 원만히 완수했다.
비록 총회 몇기의 고문으로 총회상황을 잘 알고 민족간부로서의 깊은 감정과 그 사명감에 신봉철서기가 최종 동의와 결정을 내린것이였겠지만 그 과정에 박형의 숨은 노력이 깃들어있었다.
의료하향은 총회 활동종목에서의 유명브랜드다. 5기 리사회때 박형과 남정교수가 개척하고 인솔한 총회 의료팀은 산재지역 조선족 향촌의 농민과 경로원 로인들을 대상으로 10여년간 무료진찰과 의약품지원봉사활동을 해왔다. 박형의 인솔하에 총회 의료팀의 규모는 점점 커졌고 또 박형의 설득으로 길림대학 제1병원 의약품 지원금은 2013년의 2만원으로부터 5만원으로 늘어나게 되였다.
올해까지의 통계에 의하면 10년간 총회 의료팀이 하향한 차수는 22차에 달하며 지원약품의 총가치는 24만원에 달한다.
요즘 박형의 제자이고 후배들인 길림대학 제1병원 림승혁, 림광주, 성환길, 박금화, 주명희 등 교수들을 골간으로 한 의료지원봉사팀은 이미 길림대학 제2, 제3병원과 기타 병원의 의료일군까지 참여하여 그 대오가 몇십명으로 늘어났다. 그들은 박형이 남긴 민족정신, 의학도덕, 애심의 기발을 높이 들고 그의 뒤를 이어 산재지역 향촌으로, 경로원으로 륙속 내려가고있다.
2014년 1월 중순, 길림대학 조선족교직원 새해맞이야회에 참가한 나는 김증손교수로부터 박형이 골수이형성증후군병으로 확진되였다는 놀라운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청천병력이였다. 나는 전혀 믿음이 가지 않았다. 그 이튿날 나는 아침부터 온종일 박형께 전화를 걸었다. 오후에야 전화를 받은 박형은 《요즘은 오전에 치료받고 오후에 집에서 휴식하는데 병문안은 필요 없구 며칠후에 만날수 있으니 그냥 소문만 내지 말았으면 하오.》
유수시 연화향에서 조선족 촌민들을 진찰하고있는 고 박운봉교수
조선족활동이라면 그토록 열정적이던 박형은 1월 17일에 있은 장춘시조선족새해맞이야회에 끝내 참가하지 못했다.
1월 19일 오후, 나는 안해와 함께 박형네 집으로 병문안을 갔다. 박형의 얼굴은 다소 피곤기가 있었지만 정신상태는 좋은편이였다. 《요즘 치료를 받고나니 진찰수치는 많이 좋아졌소》, 《 어제 동생들과 골수이식을 두고 상의도 해보았소. 모레쯤 올거요.》, 《골수 검사수치만 똑바르면 치료는 문제없소.》 하면서 병상황소개로부터 20년전 일본류학시 혈액전공을 했던 이야기들을 구수하게 엮어내려갔다. 그러나 말을 마치고 난후 그의 눈가에는 이슬이 맺혀있었다.
2월 음력설전후로 박형의 병환소문은 온 장춘판에 퍼졌고 가는곳마다 모임장소마다 박형의 이야기가 화제로 되였다.
검사결과 큰녀동생이 골수이식을 하기로 나섰고 박형은 천진, 북경, 한국 세곳 병원을 놓고 보름간 검토하다가 최종 한국성모병원을 선택하였다
헌데 한국성모병원 치료비는 만만치 않아 박형은 또 고민에 빠졌다. 그후 신봉철 등 여러분들의 지원으로 치료비용문제는 한국 출발전 일주일 앞둔 4월 8일 오후에 원만히 해결되였다.
한국 출발 예정일은 4월 16일이였다. 12일에 나는 신봉철회장과 함께 총회명의로 박형을 모시고 점심식사를 했다. 남영전과 김문관도 자리를 같이 했다. 박형은 눈물이 글썽해 말했다. 《신서기 고맙소! 여러분 고맙소! 내 꼭 그 은혜를 갚겠소.》, 《내 우리 정애(박형의 안해) 하고도 말했소! 내 돌아오지 못하면 대신 아들 결혼잔치때 사회의 부조돈을 절대 받지 말라고!》, 《문관형님! 한국 가기전에 내 쓰던 낚시공구세트를 형님께 드리고 가겠소.》 , 《장권아! 내 미안하다.》
나는 박형에게 포도주를 권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형님! 입원치료전에 일련의 난제는 모두 잘 풀렸기에 귀찮은 얘기는 그만하시고 이제 6개월 치료기간에는 술을 못마시니 오늘은 기분 좋게 마시기오! 한국에서 완치하고 돌아오실 그때에 또 환영만찬을 멋지게 차릴게요.》 한자리에 앉은 여러분들도 박형께 건강한 모습으로 돌아올것을 기원하였다.
한국으로 떠나는 날 나는 아침 일찍 안해와 함께 공항으로 갔다. 이때 박형과 형수님 그리고 동생들이 벌써 공항에 와있었다. 그뒤로 남영전, 리충일, 김길남, 최금순, 류천문부부 등도 박형을 바래러 공항에 나왔다. 출발시간이 넉넉하기에 나와 남영전, 리충일 셋이 박형을 밖으로 모시여 담배를 피우면서 잠간 얘기를 나눴다.
형님! 신서기가 오늘 학교에서 당위회의를 소집하기에 공항까지 바래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전달해달라고 했소.《아까전에 전화왔습데! 동생 돌아가서 신봉철에게 고맙다고 다시 한번 전해주오!》박형은 고맙다는 말을 연신 꺼냈다.
그날 박형의 옷차림은 제법 신사차림이였다. 앓는 환자 같지 않았다. 곱게 빗어넘긴 머리칼에 반짝반짝 빛나는 구두, 게다가 새하얀 와이셔츠에 붉은 넥타이까지 맨 양복차림…
이를 본 나의 안해는《 오라버님! 오늘 진짜 멋집니다! 돌아오실 때 내 꼭 큰 꽃바구니를 들고 마중나오겠습니다.》고 롱조로 말을 걸었다.
박형은《꽃바구니는 말구 그냥 꽃 한송이면 된다.》 면서 얼굴에 웃음꽃을 피웠다. 수속시간이 다가올무렵 나는 《형님! 이제부터 반년은 담배를 못 피우니 한대 더 피우고 들어가오!》 하고 박형께 담배불을 붙여드렸다. 박형은 주머니에서 남은 담배 반갑과 라이타를 나한테 주고는 여러분과 일일이 악수하고 검역입구로 몸을 옮겼다.
검역입구를 나가는 순간 박형은 불현듯 몸을 뒤돌려 배웅하러 나온 여러분들을 향해 공손히 허리굽혀 경례를 올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주루르 흘러내렸다. 그 순간 배웅하러 나온 사람들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였다.
4월 26일, 박형은 《한국 성모병원이 조건이 괜찮다. 요즘은 골수공급자인 녀동생의 이식조건 재검사중이다.》고 위챗(微信)으로 소식을 전해왔다.
5월 12일, 박형은 《14일부터 골수이식수술을 하게 된다. 한달간은 무균병실에서 관찰치료를 받으니 련계 못한다.》고 두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한달후 나는 몇번이나 문자를 보냈지만 답신이 없었다. 그러던 6월 24일 오후, 박형은 《온몸이 통증이 심해 밥 한알도 먹지 못한다.》고 세번째 편지를 보내왔다. 그후 종종 소식이 없어 답답한 끝에 면회하고 귀국한 길림신문사 전임 남영전사장을 통해 박형의 얼굴과 손등 피부상태가 탈상 (脱像)되여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여서 상황이 좀 심각하다는것을 알게 되여 인젠 기적이 나타나기만을 묵묵히 기도할수 밖에 없었다.
8월 6일은 진흥총회 대표단이 목단강으로 기업탐방을 떠나는 날이였다. 오후 4시쯤 목단강시 금약그룹 첫날 방문을 끝마치고 호텔로 이동하는 중 길림대학 제1병원 핵의학실 주임인 림승혁교수가 박형이 5일에 이미 한국에서 사망했으며 8일 오후 3시에 장춘에서 영결식을 갖기로 했다고 알렸다.
신봉철회장은 그 즉시로 나와 유창진비서장을 불러 긴급회의를 소집, 8일의 흑룡강신문사 방문일정을 취소하고 신봉철회장이 추도사를 집필하며 유창진비서장더러 총회 및 사회단체 영결식참여통지와 화환 등 조직준비를 할것을 포치하였다.
8월 8일 오후 3시경, 장춘시 장례식장 서청에서 거행된 고박운봉교수영결식에는 길림성인대 상무위원회 전임 부주임 남상복을 비롯한 지도자들과 길림대학 제1병원 임직원, 성과 시 관련부문의 조선족 현직간부, 진흥총회 등 장춘시조선족 여러 사회단체 회원과 사회 각계 인사 300여명이 참석하였다.
영결식은 박형의 마지막 얼굴도 볼수 없이 골회함만 놓고 거행하였다. 다행히 박형의 생전록상화면이 방영되여 사람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애로운 얼굴을 다시 볼수 있었다. 《그의 목소리와 웃는 모습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을것이다.》(音容笑貌永存心间)신봉철회장이 비통의 심정을 담아 드린 추도사는 전 장내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박형을 떠나보낸후 나는 련며칠 일이 손에 전혀 잡혀지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각에도 나의 눈앞에는 박형과 함께 한 마지막 순간들이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가는것 같다.
오장권(길림성조선족경제과학기술진흥총회 상무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