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손세대들한테 력사적인 유감을 남겨선 안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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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8-24 09:34|본문
“자손세대들한테 력사적인 유감을 남겨선 안돼”
최근 착공을 마친 연길서역, 얼마전까지 뒤자리를 차지했던 “연길서역” 조선말 간판이 새롭게 앞자리를 차지했다. 연길서역뿐만 아니라 훈춘역 조선말간판도 앞자리를 찾았다.13일 그 내막의 주인공인 김영택선생을 찾았다.
2015년 7월 10일, “장안순서기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닌 김영택(73세)선생은 자치주 정무쎈터를 찾았다. 곧 개통되는 고속철도역 조한간판 위치가 틀린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속철역가운데서 “조선족민속관”으로 불리우는 연길서역의 조선어간판이 오른쪽에 걸려있었다며 연길뿐만아니라 기타 돈화, 안도, 도문, 훈춘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실시세칙》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 및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실시세칙》 규정에 따르면 조선문과 한문을 동시 사용할 경우 글자체규범, 글자크기가 같아야 하고 간판을 가로 배렬할 경우 조선문이 앞쪽, 한문이 뒤쪽, 조문이 웃쪽, 한문이 아래쪽에 배치되여야 하며 세로 배렬할 경우에는 조선문이 오른쪽(마주 보는 방향에서), 한문이 왼쪽에 배치해야 되며 원형으로 배렬할 때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선문이 밖에, 한문이 안쪽에, 조선문이 왼쪽 절반, 한문이 오른쪽 절반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 연유로 김영택선생은 “고속철도의 개통은 연변의 정치, 경제생활에서 대사이다. 하지만 고속철도역 간판을 설치하면서 조선문과 한문 간판의 위치가 바뀜으로 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이미지에 영향줄수 있으며 현대인뿐만아니라 자손세대들에게도 력사적인 유감으로 남게 될것이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다고 한다.
“편지”는 지난달 19일 국가교통운수부에로 띄워졌다. 다행스럽게 연변 당정지도일군들의 적극적인 관여로 지금 고속철도역의 조선말간판은 제자리를 찾았다. 간판이 제대로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김영택선생은 “만세”가 절로 튀여나올 정도라며 감격의 기분을 말로 표현할수 없다고 말한다.
“30여년전 연변일보사 기자로 있을 때 도문시에 취재를 갔는데 도문시 기차역의 간판이 조선문이 아래쪽에, 한문이 웃쪽에 걸려있는걸 보았습니다. 해당 책임일군을 찾아갔더니 철도부 관할이라 자기네는 어떻게 할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의 유감이 지금도 남아있었지요. 하기에 고속철도개통식이 있기전에 해결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김영택선생은 스스로를 “우리 말, 우리 글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십여년간 연변일보 기자로 있다가 1986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부총편집을 맡기까지 그는 항상 우리의 언어와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는 연변조선어문사업위원회와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의 위탁으로 텔레비죤용어규범화에 대한 수집임무를 맡고 1998년 일선에서 은퇴하기까지 87개 규범화단어를 제공해 통일방안에 올렸다.
2005년부터는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총국 고문으로 초빙되여 해당 프로에 대한 사항을 20여만자 교부했고 언어문자사용에서 340여개 “뉴스규범용어조한대역표”를 만들었으며 300여개 단어를 모아 “뉴스단어수책”을 만들어 보도부와 기타 편집부에 참고로 제출했다. 또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15년간 몸담그어오면서 쓴 론문과 감수, 견해 등을 수록하여 《TV예술탐구》(2001년)를 펴냈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은 민족의 상징이며 민족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하는 김영택선생은 “우리 말과 우리 글에 대한 생각”, “우리 말로 된 인터뷰 체면 깎이는 일 아니다”, “조선언강습반이 주는 계시” 등 십여편의 칼럼을 《연변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산책을 즐기는 김영택선생은 산책하다가도 틀린 간판을 마주하면 김영택선생은 이를 인차 해당부문에 제기한다. 고쳐지는 경우도 있고 구태의연한 경우도 있단다.
“교통협조관리원이 있듯이 ‘자원봉사 감독인원’을 두면 좋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또한 규정을 어긴 업체는 벌금을 안기고 제보한 시민들은 포상한다면 간판용어규범화에서 좋은 효과를 보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김영택선생은 우리 언어와 문자 계승과 발전은 정부 한 부서,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에만 의거해서 되는 일이 아니며 전민의 힘과 지혜로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2015년 7월 10일, “장안순서기에게 보내는 편지”를 지닌 김영택(73세)선생은 자치주 정무쎈터를 찾았다. 곧 개통되는 고속철도역 조한간판 위치가 틀린 사실을 반영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고속철역가운데서 “조선족민속관”으로 불리우는 연길서역의 조선어간판이 오른쪽에 걸려있었다며 연길뿐만아니라 기타 돈화, 안도, 도문, 훈춘도 마찬가지라고 했다. 이는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실시세칙》에 위배된다고 말한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 및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실시세칙》 규정에 따르면 조선문과 한문을 동시 사용할 경우 글자체규범, 글자크기가 같아야 하고 간판을 가로 배렬할 경우 조선문이 앞쪽, 한문이 뒤쪽, 조문이 웃쪽, 한문이 아래쪽에 배치되여야 하며 세로 배렬할 경우에는 조선문이 오른쪽(마주 보는 방향에서), 한문이 왼쪽에 배치해야 되며 원형으로 배렬할 때에는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조선문이 밖에, 한문이 안쪽에, 조선문이 왼쪽 절반, 한문이 오른쪽 절반을 차지해야 한다.
그런 연유로 김영택선생은 “고속철도의 개통은 연변의 정치, 경제생활에서 대사이다. 하지만 고속철도역 간판을 설치하면서 조선문과 한문 간판의 위치가 바뀜으로 해 연변조선족자치주의 이미지에 영향줄수 있으며 현대인뿐만아니라 자손세대들에게도 력사적인 유감으로 남게 될것이다”는 내용으로 편지를 썼다고 한다.
“편지”는 지난달 19일 국가교통운수부에로 띄워졌다. 다행스럽게 연변 당정지도일군들의 적극적인 관여로 지금 고속철도역의 조선말간판은 제자리를 찾았다. 간판이 제대로 걸렸다는 소식을 접한 김영택선생은 “만세”가 절로 튀여나올 정도라며 감격의 기분을 말로 표현할수 없다고 말한다.
“30여년전 연변일보사 기자로 있을 때 도문시에 취재를 갔는데 도문시 기차역의 간판이 조선문이 아래쪽에, 한문이 웃쪽에 걸려있는걸 보았습니다. 해당 책임일군을 찾아갔더니 철도부 관할이라 자기네는 어떻게 할수 없다고 하더군요. 그때의 유감이 지금도 남아있었지요. 하기에 고속철도개통식이 있기전에 해결을 보았으면 하는 마음이 더욱 간절했습니다.”
김영택선생은 스스로를 “우리 말, 우리 글과 인연이 있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연변대학 중문학부를 졸업하고 십여년간 연변일보 기자로 있다가 1986년 연변텔레비죤방송국 부총편집을 맡기까지 그는 항상 우리의 언어와 인연을 이어왔다. 지난 세기 90년대초부터는 연변조선어문사업위원회와 동북3성조선어문협의령도소조의 위탁으로 텔레비죤용어규범화에 대한 수집임무를 맡고 1998년 일선에서 은퇴하기까지 87개 규범화단어를 제공해 통일방안에 올렸다.
2005년부터는 연변라지오텔레비죤방송총국 고문으로 초빙되여 해당 프로에 대한 사항을 20여만자 교부했고 언어문자사용에서 340여개 “뉴스규범용어조한대역표”를 만들었으며 300여개 단어를 모아 “뉴스단어수책”을 만들어 보도부와 기타 편집부에 참고로 제출했다. 또한 연변텔레비죤방송국에 15년간 몸담그어오면서 쓴 론문과 감수, 견해 등을 수록하여 《TV예술탐구》(2001년)를 펴냈다.
우리 말과 우리 글은 민족의 상징이며 민족의 자부심이라고 생각하는 김영택선생은 “우리 말과 우리 글에 대한 생각”, “우리 말로 된 인터뷰 체면 깎이는 일 아니다”, “조선언강습반이 주는 계시” 등 십여편의 칼럼을 《연변일보》에 발표하기도 했다.
산책을 즐기는 김영택선생은 산책하다가도 틀린 간판을 마주하면 김영택선생은 이를 인차 해당부문에 제기한다. 고쳐지는 경우도 있고 구태의연한 경우도 있단다.
“교통협조관리원이 있듯이 ‘자원봉사 감독인원’을 두면 좋지 않을가 생각합니다. 또한 규정을 어긴 업체는 벌금을 안기고 제보한 시민들은 포상한다면 간판용어규범화에서 좋은 효과를 보지 않을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김영택선생은 우리 언어와 문자 계승과 발전은 정부 한 부서, “연변조선족자치주조선언어문자사업조례”에만 의거해서 되는 일이 아니며 전민의 힘과 지혜로 우리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계승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