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로그인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와 《봉선화》그리고 《고향의 봄》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7-27 09:41|

본문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와 《봉선화》그리고 《고향의 봄》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 홍란파(洪蘭坡)에 대해 음악연구원과 작곡가들은 잘 알고있으나 중국의 조선족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하는이들이 많은줄로 알고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러왔고 또 지금도 즐겨 부르고있다.
작곡가 홍란파의 가요들중에서 《봉선화》(凤仙花)가 대표작이라면 동요에서 대표작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동요 《고향의 봄》이다. 1929년에 나온 이 노래는 비록 동요이긴 하지만 어른들도 함게 불렀던 애창곡으로 되여 세세대대 불러왔고 지금도 계속 부르고있다. 그럼 아래에 작사자 리원수의 4,3,5조로 된 《고향의 봄》 1절 가사를 적어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도 그에 대해 좀 알고있었을뿐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고있었다. 그저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잘 지었다는 생각에만 그쳤을뿐이였다.그러던 지난해 4월초, 필자는 한국에 갔던김에 홍란파의 생가를 찾아볼 기회를 가졌다. 마음속으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한것은 언제든 유명한 작곡가 홍란파를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한테 소개 할 의향이 있었던차라 볼일을 제쳐놓고 홍란파의 고향집 답사부터 하였다.
필자는 그의 생가를 돌아본후 일부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들을 만나 홍란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고 문헌자료들도 찾아보았다. 조선의 유명한 음악평론가인 최창호선생이 1995년 조선평양출판사에서 출판한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란 문헌과 한국의 《두산백과》, 《한국예술지》, 《한겨레음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홍란파에 대한 글을 정리하게 되였다.홍란파의 원명은 홍영후<洪永厚>이다. 작곡가는 1897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5살에 상경하여 14살 되던 해인 1912년 YMCA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남달리 음악에 흥취를 갖게 되였다.
홍란파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조선의 초기음악학교였던 《정악전습소》에서 공부하였는데 창립당시에는 《조양구락부》라고 하였다. 1930년 근대이후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전문기관지인 《조선음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한 홍란파는 1년동안 김인식선생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조선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라는 문장에서 《홍란파는 정악전습소 재학당시에 양산도와 노래가락을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하여 그의 예술적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홍란파는 《정악전습소》를 졸업한후 음악으로써는 도저히 외세에 짓눌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부모들의 완고한 반대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세브란스의과대학은 한국에서 최고 의과대학임<필자 주>). 그렇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리라는 지향을 굽히지 않고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일본에 건너가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고학하였다.
일본에 가기전 홍란파는 조선음악정음소를 졸업한후 정음소의 교원으로 활동하였다.홍란파는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한후 거기에서 음악, 문학, 미술 등 세가지 분야에 걸쳐 배우면서 잡지발간 등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홍란파는 일본에서 학습하던 나날은 참으로 눈물겨운 생활의 련속이였다,
아득바득하며 신문배달을 하고 때를 굶어가면서 밤이면 번화한 네거리에 나서서 바이올린을 타면서 담배장사도 했지만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어려운 생활난을 겪으면서 2년간을 수료하고 1919년 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재일학생들속에서 중심인물로 반일운동에 적극 나선것이 드러나 더 빨리 귀국하게 되였다.
귀국후 홍란파는 《대한매일신보》<大韩每日申报>등의 기자로 또한 소설가로도 사업하면서 창작노래집 《처녀혼》을 출간하였으며 3.1운동이 나던 이듬해인 1920년 22살에 《처녀혼》이란 단편소설을 써서 조선반도에 이름을 날렸다. 그는 문학에도 재능이 뛰여났으며 연극《최후의 악수》도 창작하여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출현하기도 하였다.
홍란파작곡가는 창작노래집을 내기전에 《봉선화》, 《옛동산에 올라》, 《사랑》, 《그리움》, 《봄처녀》, 《여름밤의 별무리》, 《사공의 노래》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들과 기악곡들을 창작하였다.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처녀혼》의 첫 머리에 《애수》(哀愁)라는 곡이름으로 발표되였다. 1920년에 창작된 가요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들의 애조곡으로 널리 불리워졌다. 가요 《봉선화》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1919년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란파는 어릴때 송아지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고향산천이 하도 그리워 팔달산을 끼고앉은 시골마을을 찾아갔다.그가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회사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왓다.
소학교시절에 홍란파는 가난한 탓으로 학교에 못가는 봉선이가 불쌍하여 그에게 가끔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군 하였는데 봉선이는 홍란파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때 봉선이는 봉선화를 그토록 사랑하였으며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다 봉선화를 심고 가꾸었다. 홍란파의 집울타리밖에다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놓군 하였다.
봉선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이후 살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리워가면서 홍란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잘 있으라요. 인젠 오빠의 양행금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곡조 듣고싶어요》
홍란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찾아온 봉선이의 마지막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바이올린을 들었으나 정작 그를 위로해줄만한 곡을 찾을수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앞에서 《양산도》를 탈수도 없었고 《노래가락》을 탈수도 없었다.
《아리랑》을 타던 홍란파의 머리에는 피끗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그는 그 곡상을 잡고 활을 그어나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바이올린의 음선을 적시고 음선에서 미끄러져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소리도 뚝 멎고 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서있던 봉선이는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봉선이가 흐느껴울자 그를 바래주려고 모였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홍란파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바래주고는 방금전에 탔던 곡상을 그대로 5선지에 적어나갔다. 그후 홍란파는 울밑에 피여난 봉선화를 볼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군 했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이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홍란파작곡가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홍란파의 처녀작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창작초기에 바이올린독주곡으로 가사가 없이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이 《애수》<哀愁> 였다. 5년뒤 김형준이 가사를 달아주었는데 그는 란파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집엔 봉선화가 많해 김형준은 가사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김형준은 홍란파와 이웃에 살면서 친분이 매우 두터운 관게계였던것이다.
작곡가 홍란파가 봉선이를 바래주면서 얻은 곡상이기때문에 노래제목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조선의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이 노래가 1920년에 창작되였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가요가 창작풍의 가요에 머물어있던 우리 나라 가요에 새로운 활력과 그 예술적 경지를 개척해나간 작품의 하나라는데 그 의의가 매우 깊고 참으로 우리 나라의 현대가요창작의 선구자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고향의 봄》노래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시기 이 땅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느는 겨레들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는 동포들이 날따라 늘어났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민족은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으니 《고향의 봄》이 창작된것은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다》고 했다.
홍란파는 1922년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였으며 1925년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는 일도 해냈다.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지휘자, 음악전문지 발행인, 소설가로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쳤다.
1926년에 홍란파는 음악재질을 높이려고 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25년에 편찬한 《세계음악곡집》에 《봉선화》 등을 발표하였으며 1929년에는 《조선음악곡집》상, 하권과 1933년 《조선가요집》 등을 세상에 내놓아 우리 민족의 음악을 더 높은 단계에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홍란파작곡가는 생전에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그의 대표 노래인 《봉선화》를 비롯해 《봄노래》, 《고향의 봄》, 《봄처녀》, 《고향생각》 등 100여수의 노래를 작곡했는데 조선반도와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은 그의 노래를 가장 즐겨불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란파는 후세에 남겨줄 가곡집들을 많이 출간했다. 바이올린독주곡 《애수조선》, 《관현악곡》, 《기타 명창합창곡》, 《특선가요》 등을 출간하였는데 30여세에 이런 걸작과 명곡들을 작곡하였다는것은 실로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홍란파는 음악지식을 높이려고 1931년 또 미국에 가서 《SHEYWOD》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수업에 진력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본격적인 독주회를 여러번 가졌으며 졸업후 주로 경성보유학교(지금의 서울) 리화여자전문학교 등에 가서 음악을 가르쳤다.
1936년 홍란파는 서울방송국의 현악단 지휘자로부터 레코드의 영악부장으로 력임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평론집 《음악만필》등을 통하여 우리 민족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였다.
홍란파가 작곡한 많은 노래중에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조선의 최초가곡으로 불리우고있는 《봉선화》가 그의 대표적인 노래이다. 여기에 4, 4, 4, 4조로 된 노래가사를 적어본다.
1절
울밑에선 봉숭아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반겨 놀았도다
2절
이어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락화도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3절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너의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가사의 내용을 보면 울밑에 핀 봉선화의 가련한 모습이 마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음을 표현하듯 하였으며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로 한많은 겨레의 아픔을 대변하는 노래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봉선화》에 깃든 슬픈 전설<传说>을 이야기하련다.
고려 26대 충서왕이 몽고의 공주보다 조비를 사랑한다는 리유로 몽고의 서울로 붙잡혀갔는데 그는 항상 고국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왕은 어느날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뜯는 꿈을 꾸었다. 줄을 뜯을 때마다 소녀의 열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꿈에서 깜짝 놀라 깨여난 왕은 하도 이상하여 궁녀를 모두 조사했더니 열손가락을 모두 흰헝겁을 동여맨 눈먼 궁녀가 있어서 그 사연을 물었다.
《너는 왜 열손가락에 흰헝겁을 동여맸느냐?》
《나는 고려에서 온 궁녀인데 고국이 그리워 너무 울어서 눈병이 났고 손가락은 봉선화를 물들이기 위해서나이다.》
왕은 타국에서까지 자기 나라의 풍습을 지키는 일이 하도 기특해 이야기를 해봤더니 아버지는 충성왕관직에서 쫓겨났다면서 충성왕께 바치라고 준비한 가락이 있다고 했다. 왕은 감격되여 그후 노력한 결과 고려에 다시 돌아올수 있었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왕은 몽고에 억류되여 있을때 소녀의 일을 생각하고 소녀를 데려오려 했으나 이미 소년이 죽은후였다. 왕은 소년을 기리는 뜻에서 궁궐의 뜨락에 많은 봉숭아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서 많은 대중들이 애창하였던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 노래를 못부르게 《금지곡》으로 내리고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구금하고 고문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어떤 야수적 탄압으로도 가요 《봉선화》의 보급을 막을수 없었다.
1981년 그당시 81세 나는 일본의 량심적 지식인 노무라 모토유기목사는 한국 주재 일본대사관앞에 있는 평화의 소년상을 찾아 플루트(목관악기)로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노래말속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가을바람은 일본침략자를 의미하고 떨어진 꽃송이는 위안부 피해자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봉선화》노래가 창작된지도 어느덧 한 세기가 오라지 않다. 그가 작곡한 많은 노래들은 아직까지도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고있을뿐만아니라 조선반도와 해외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속에서 불리워지고있다.
홍란파작곡가는 1937년 《수양동우회사전》(반일조직)으로 체포되여 차디찬 옥중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는 옥중에서 심하게 얻은 병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떳다. 생을 마감하기전에 홍란파는 《나 죽으면 연미복<燕尾服>으로 내 몸을 덮어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연미복은 지휘자들이 입는 옷 <필자 주>).
1941년 8월 30일, 우리 민족의 작곡가 홍란파는 한창 명곡들을 창작할 나이(43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홍란파작곡가는 음악과 문학이란 무기로 일제를 반대하고 나라 독립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쳤던것이다.
1954년부터 《홍란파기념사업회》가 성립되여 매년 경기도 수원시에서 란파음악콩클을 비롯하여 갖가지 행사를 개최하여 홍란파의 넋을 기리고있다.
우리 민족의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는 우리곁을 떠난지도 7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백의동포들은 그가 작곡한 노래를 여지껏 불러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영원히 불러갈것이다.

0

글로벌한민족 목록

글로벌한민족 목록
조선족총회의《참모장》《불도저》-오장권 인기글 조선족총회의《참모장》《불도저》-오장권 길림성소방부대 참모장으로 퇴역한 오장권은 조선족으로는 드물게 180메터 넘는 키꼴에 부리부리한 눈, 웅글진 목소리를 가진 전형적인 군인 《출신》이다. 그는 평소의 털털한 모습과는 달리 일에 들어가서는 강한 추진력과 더불어 손톱만큼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는 꼼꼼한 성미이다.회의자료의 철자는 물론 회의장소에 놓는 물병의 위치까지 일일이 확인해보는 까근함에 그와 함께 일해본 꼼꼼한 녀성들마저도 탄복할 정도다. 엄격한 규률과 치밀한 계획을 생명처럼 엄수하는 군인의 직업…(2015-07-30 08:41:06)
"고급 맞춤옷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 인기글 "고급 맞춤옷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 하겠다" 젊음의 패기를 자랑하며 남다른 미적감각으로 고급 맞춤옷을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는 조선족 젊은이가 있다. 그 주인공이 청도김일시류복식유한회사 김일(27)사장이다.할빈에서 대학을 졸업한후 북경에 진출, 모 회사에 4년간 근무했다. 김일한테는 어릴적부터 하나의 꿈이 있었다. 자신의 브랜드를 창조하는것이였다. 사람들이 마음속으로 브랜드의 가치를 느끼고 내심으로 브랜드를 선호하고 충실한 고객이 되도록 만드는 것이다.2013년, 북경서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청…(2015-07-30 08:39:38)
심양조선족청년《청춘, 전통을 말하다》 문화축제 인기글 심양조선족청년《청춘, 전통을 말하다》 문화축제 심양시조선족청년 여름철 문화축제가 25일 무순시 신한민속촌에서 《청춘, 전통을 말하다 》란 주제로 뜻깊게 펼쳐졌다. 심양시조선족청년문학회서 주관하고 신한민속촌과 《동전의 희망》운동본부에서 후원한 이번 축제에 40여명의 청년문학회 회원들이 참가하여 자연속에서의 우리 전통문화 체험시간을 가졌다.신한민속촌 김관식회장은 환영사에서 《민족의 전통문화를 알고 전승해나가는것은 새시대 젊은이들의 임무이기도 하다》면서《젊은이들의 문화체험은 아주 뜻깊은 일이다. …(2015-07-30 08:38:27)
동북3성 재중동포 청소년 152명 한국방문 인기글 동북3성 재중동포 청소년 152명 한국방문 재외동포재단이 지난 7월 27일 송도국제도시 연세대학교 국제캠퍼스에서재중동포 청소년 모국연수 개회식을 개최했다. 중국 동북3성 재중동포 청소년 152명이 대한민국의 사회·역사·문화를 직접 체험하고 한민족 자긍심과 리더십을 함양하기 위해 모국을 찾았다고 동북아신문이 전했다.글로벌 한민족 공동체 구현 중심기관 재외동포재단(이사장 조규형)은 지난 27일(월)부터 오는 8월4일(화)까지 ‘재중동포 청소년 한국방문사업’을 실시한다고 밝혔다.올해 처음 시행되는 '재…(2015-07-30 08:36:37)
“뿌리깊은 나무는 쉽게 뽑히지 않는다” 인기글 “뿌리깊은 나무는 쉽게 뽑히지 않는다” 제5회 베이징애심 희망의 꿈나무 키우기 개최베이징애심여성네트워크 제5회 희망의 꿈나무키우기 동북3성 내몽골중학생 베이징문화탐방이 지난 7월23일부터 27일까지 4박5일간 평가회를 마감으로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베이징애심여성네트워크에서 주최하고 한민족사회의 전폭적인 후원으로 진행된 이번 행사는 동북3성과 내몽골에서 가정형편이 어렵지만, 학업과 품행이 우수한 27명의 우수한 조선족중학생들로 선발초청돼 왔다고 주최측은 전해왔다.베이징애심여성네트워크 이정애회장은 …(2015-07-30 08:35:40)
맹인학교에 가서 공부하고싶어요 인기글 맹인학교에 가서 공부하고싶어요 맹인학교에 가서 공부하고싶다는 김홍매소녀(10살)7월 28일, 연변주맹인협회 방천길회장이 연길시의 10살난 시각장애소녀 김홍매가 맹인학교에 가서 공부하고싶지만 가정형편이 어려워 고민하고있다는 안타까운 사연을 신문사에 전해왔다.29일 오전, 기자는 연길시 시교인 민주촌에 자리잡은 김홍매소녀의 집을 찾아가 보았다. 연길시 의란진 석인촌에서 살고있던 김홍매네는 석인촌의 파가이주때문에 잠시 연길시교의 단층집에서 세방살이를 하고있었다.월세 120원, 20평방도 안되는 단칸방에…(2015-07-30 08:33:10)
도전은 나의 삶이다 인기글 도전은 나의 삶이다 불경기로 인해 모두 힘들어하고 있는 현재 칭다오나우인테리어 박홍매 사장은 경쟁력이 심한 인테리어 사업에서 꾸준히 호황을 이루고 있으면서 한편 여성들의 건강과 미를 위한 또 다른 아이템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어 화제가 되고 있다.지난 3월, 칭다오시 노산구 따무즈광장(大拇指广场) 서쪽에 120만 위안을 투자해 여성들의 건강관리를 위한 ‘미궁’ 좌훈까페를 오픈했다. 200㎡ 규모에 1층은 우아하고 편안한 고급 분위기에 커피와 차를 마시며 부드러운 대화를 나눌…(2015-07-27 09:44:28)
2015년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원기업전시설명회 성황리에 인기글 2015년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원기업전시설명회 성황리에 7월 21일, “선전, 교류, 창신”을 취지로 회원기업의 제품과 써비스를 홍보하고 회원들의 자원을 통합하여 회원에게 다원화교류플랫폼을 제공하기 위한 “2015년대련시조선족기업가협회 회원기업전시설명회”가 대련원양국제호텔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였다.중국국제무역촉진위원회 손련운부회장, 대련시사회조직련합회 양복빈회장, 주심양한국총령사관 대련출장소 백범흠소장, 주대련일본령사사무소 혼부 히로시 령사, 대련한국무역관 백인기관장, 대련한국인(상)회 박신헌회…(2015-07-27 09:42:57)
칭다오 오성회 7월달 골프경기 진행 인기글 칭다오 오성회 7월달 골프경기 진행 칭다오 오성회 골프동우회 회원들이 친목과 우의를 다지기 위한 목적으로 7월 15일 칭다오시 링하이골프장에서 월례 대회를 개최했다.경기에 참석한 회원은 총 29명, 초복의 무더운 날씨에도 평소 갈고 닦은 기량을 뽐내면서 푸른 잔디위에서의 기쁨을 만끽하였다.경기결과 명광일씨가 행운상을, 김성섭 회원이 BB상을 탔으며 장룡 선수와 구선녀 선수가 각각 최근접상과 최장타상을 따안았다. 비록 무더운 날씨 등 원인으로 대부분 선수들의 성적이 저조하였으나 최호림 선수가 82…(2015-07-27 09:41:58)
[열람중]불멸의 작곡가 홍란파와 《봉선화》그리고 《고향의 봄》 인기글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와 《봉선화》그리고 《고향의 봄》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 홍란파(洪蘭坡)에 대해 음악연구원과 작곡가들은 잘 알고있으나 중국의 조선족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하는이들이 많은줄로 알고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러왔고 또 지금도 즐겨 부르고있다.작곡가 홍란파의 가요들중에서 《봉선화》(凤仙花)가 대표작이라면 동요에서 대표작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동요 《고향의 봄》이다. 1929년에 나온 이 노래는 비록 동요이긴 하지만 어른들도 함게 불…(2015-07-27 09:41:13)
"상하이에 조선족동포 한글학교 있어요” 인기글 "상하이에 조선족동포 한글학교 있어요” 김성옥 중국 화동조선족주말한글학교 교사는 조선족동포들을 위한 한글학교가 2011년 상하이 포동신구에 설립됐다고 말했다. 점차 중국에서 조선족학교가 사라짐에 따라,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고. 상하이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기업인들이 우리 민족정체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뜻을 모았다. 복단대학교의 박창근 교수가 큰 역할을 했다고 그는 강조했다.한글학교는 확장을 계속했다. 소주, 무석, 소흥, 곤산 등 상하이와 인근 도시에서도 수업을 하고 있다. 학급수가 10여개로,…(2015-07-27 09:39:17)
칭다오에서 한식조리 교육 무료로 진행 인기글 칭다오에서 한식조리 교육 무료로 진행 한국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주최하고 호텔항공관광교육재단 (이하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와 (사)한국외식산업진흥원이 주관하는 2015해외한식당 종사자 교육이 오는 7월 30일부터 8월 7일까지 칭다오에서 진행하게 된다.한식세계화사업의 일환으로 한국 농림축산식품부와 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가 주최하는 2015 해외 한식당 종사자 교육 사업에서 한국조리사관직업전문학교(이사장 윤경숙)과 (사)한국외식산업진흥원(원장 변기효)이 협력하여 총 8개의 권역 중…(2015-07-27 09:38:13)
'눈의 도시'에서 엮어가는 사랑의 노래 인기글 '눈의 도시'에서 엮어가는 사랑의 노래 최근 '눈의 도시'라고 불리는 목단강시에서는 한 조선족부부가 자신들의 30여만원의 사재를 털어 5년간 선후로 10명의 '고아'들을 부양한 사실이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실은 엄격한 의미에서 보면 이들이 부양한 '고아'들은 '고아'가 아니라 부모들이 양육능력이 없어 부양을 포기한 '유기어린이'이라고 함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자칫 '문제아'로 전락돼 사회에 위해를 가져올수 있는 어린이들을 사랑의 힘으로 감화시켜 가정의 따뜻함을 느끼게 하고 정상적인 학교 교육을…(2015-07-27 09:37:26)
재중국한국인회 , 2015년 연합회장단 확대회의 개최 인기글 재중국한국인회 , 2015년 연합회장단 확대회의 개최 재중국한국인회 2015년 연합회장단 확대회의(상임위원 회의, 임원 회의)가 지난 2015년 7월 17일(금요일) 베이징교문호텔(北京教文大酒店) 3층 대연회장에서 개최되었다.이날 회의에는 재중국한국인회 이무근(화북), 이수향(산동), 이종식(화남), 정구호(중서), 허경무(동북3성) 회장 등 각 연합회장뿐 아니라 김용완 베이징한국인회장, 박영완 심양한국인회장, 김영만•박종만 선임부회장, 최용수 고문, 김덕현•김인…(2015-07-23 08:51:39)
밀산시 제5회 조선족문예공연 개최 인기글 밀산시 제5회 조선족문예공연 개최 7월 20일, 밀산시민족종교사무국과 밀산시문화광전체육국에서 공동주최 하고 밀산시조선민족문화관에서 주관한 밀산시 제5회 조선족문예공연이 밀산시체육관에서 성황리에 개최되였다.우수한 전통문화예술 선양과 향토문화예술 성과 전시 그리고 문화혜민, 문화락민의 건강한 민족사회 만들기에 기여하는것을 목적으로 정부차원에서 조직된 이번 문화예술 행사에는 밀산시인민정부 부시장 김향란을 비롯한 정부 각 부서의 령도와 각 향진과 조선족촌의 민족간부들이 참가하였다.코리안드림, 대도시 진출…(2015-07-23 08:50:42)
게시물 검색

공지사항 2024년 龍의 힘찬 기운을 받아 건강부자가 되세요
延边聖山本草商贸有限公司(연변성산본초상무유한공사)微信 138-4339-0837 카톡전화번호 010-4816-0837
Copyright © 2006 吉ICP备2020005010号 住所 :延吉市北大新城 2号楼3010
企业法人注册号(법인사업자 등록번호):22240000001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