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작곡가 홍란파와 《봉선화》그리고 《고향의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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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07-27 09:41|본문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와 《봉선화》그리고 《고향의 봄》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 홍란파(洪蘭坡)에 대해 음악연구원과 작곡가들은 잘 알고있으나 중국의 조선족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하는이들이 많은줄로 알고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러왔고 또 지금도 즐겨 부르고있다.
작곡가 홍란파의 가요들중에서 《봉선화》(凤仙花)가 대표작이라면 동요에서 대표작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동요 《고향의 봄》이다. 1929년에 나온 이 노래는 비록 동요이긴 하지만 어른들도 함게 불렀던 애창곡으로 되여 세세대대 불러왔고 지금도 계속 부르고있다. 그럼 아래에 작사자 리원수의 4,3,5조로 된 《고향의 봄》 1절 가사를 적어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도 그에 대해 좀 알고있었을뿐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고있었다. 그저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잘 지었다는 생각에만 그쳤을뿐이였다.그러던 지난해 4월초, 필자는 한국에 갔던김에 홍란파의 생가를 찾아볼 기회를 가졌다. 마음속으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한것은 언제든 유명한 작곡가 홍란파를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한테 소개 할 의향이 있었던차라 볼일을 제쳐놓고 홍란파의 고향집 답사부터 하였다.
필자는 그의 생가를 돌아본후 일부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들을 만나 홍란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고 문헌자료들도 찾아보았다. 조선의 유명한 음악평론가인 최창호선생이 1995년 조선평양출판사에서 출판한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란 문헌과 한국의 《두산백과》, 《한국예술지》, 《한겨레음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홍란파에 대한 글을 정리하게 되였다.홍란파의 원명은 홍영후<洪永厚>이다. 작곡가는 1897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5살에 상경하여 14살 되던 해인 1912년 YMCA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남달리 음악에 흥취를 갖게 되였다.
홍란파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조선의 초기음악학교였던 《정악전습소》에서 공부하였는데 창립당시에는 《조양구락부》라고 하였다. 1930년 근대이후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전문기관지인 《조선음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한 홍란파는 1년동안 김인식선생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조선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라는 문장에서 《홍란파는 정악전습소 재학당시에 양산도와 노래가락을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하여 그의 예술적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홍란파는 《정악전습소》를 졸업한후 음악으로써는 도저히 외세에 짓눌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부모들의 완고한 반대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세브란스의과대학은 한국에서 최고 의과대학임<필자 주>). 그렇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리라는 지향을 굽히지 않고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일본에 건너가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고학하였다.
일본에 가기전 홍란파는 조선음악정음소를 졸업한후 정음소의 교원으로 활동하였다.홍란파는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한후 거기에서 음악, 문학, 미술 등 세가지 분야에 걸쳐 배우면서 잡지발간 등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홍란파는 일본에서 학습하던 나날은 참으로 눈물겨운 생활의 련속이였다,
아득바득하며 신문배달을 하고 때를 굶어가면서 밤이면 번화한 네거리에 나서서 바이올린을 타면서 담배장사도 했지만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어려운 생활난을 겪으면서 2년간을 수료하고 1919년 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재일학생들속에서 중심인물로 반일운동에 적극 나선것이 드러나 더 빨리 귀국하게 되였다.
귀국후 홍란파는 《대한매일신보》<大韩每日申报>등의 기자로 또한 소설가로도 사업하면서 창작노래집 《처녀혼》을 출간하였으며 3.1운동이 나던 이듬해인 1920년 22살에 《처녀혼》이란 단편소설을 써서 조선반도에 이름을 날렸다. 그는 문학에도 재능이 뛰여났으며 연극《최후의 악수》도 창작하여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출현하기도 하였다.
홍란파작곡가는 창작노래집을 내기전에 《봉선화》, 《옛동산에 올라》, 《사랑》, 《그리움》, 《봄처녀》, 《여름밤의 별무리》, 《사공의 노래》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들과 기악곡들을 창작하였다.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처녀혼》의 첫 머리에 《애수》(哀愁)라는 곡이름으로 발표되였다. 1920년에 창작된 가요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들의 애조곡으로 널리 불리워졌다. 가요 《봉선화》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1919년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란파는 어릴때 송아지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고향산천이 하도 그리워 팔달산을 끼고앉은 시골마을을 찾아갔다.그가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회사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왓다.
소학교시절에 홍란파는 가난한 탓으로 학교에 못가는 봉선이가 불쌍하여 그에게 가끔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군 하였는데 봉선이는 홍란파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때 봉선이는 봉선화를 그토록 사랑하였으며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다 봉선화를 심고 가꾸었다. 홍란파의 집울타리밖에다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놓군 하였다.
봉선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이후 살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리워가면서 홍란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잘 있으라요. 인젠 오빠의 양행금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곡조 듣고싶어요》
홍란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찾아온 봉선이의 마지막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바이올린을 들었으나 정작 그를 위로해줄만한 곡을 찾을수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앞에서 《양산도》를 탈수도 없었고 《노래가락》을 탈수도 없었다.
《아리랑》을 타던 홍란파의 머리에는 피끗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그는 그 곡상을 잡고 활을 그어나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바이올린의 음선을 적시고 음선에서 미끄러져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소리도 뚝 멎고 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서있던 봉선이는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봉선이가 흐느껴울자 그를 바래주려고 모였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홍란파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바래주고는 방금전에 탔던 곡상을 그대로 5선지에 적어나갔다. 그후 홍란파는 울밑에 피여난 봉선화를 볼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군 했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이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홍란파작곡가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홍란파의 처녀작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창작초기에 바이올린독주곡으로 가사가 없이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이 《애수》<哀愁> 였다. 5년뒤 김형준이 가사를 달아주었는데 그는 란파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집엔 봉선화가 많해 김형준은 가사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김형준은 홍란파와 이웃에 살면서 친분이 매우 두터운 관게계였던것이다.
작곡가 홍란파가 봉선이를 바래주면서 얻은 곡상이기때문에 노래제목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조선의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이 노래가 1920년에 창작되였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가요가 창작풍의 가요에 머물어있던 우리 나라 가요에 새로운 활력과 그 예술적 경지를 개척해나간 작품의 하나라는데 그 의의가 매우 깊고 참으로 우리 나라의 현대가요창작의 선구자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고향의 봄》노래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시기 이 땅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느는 겨레들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는 동포들이 날따라 늘어났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민족은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으니 《고향의 봄》이 창작된것은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다》고 했다.
홍란파는 1922년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였으며 1925년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는 일도 해냈다.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지휘자, 음악전문지 발행인, 소설가로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쳤다.
1926년에 홍란파는 음악재질을 높이려고 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25년에 편찬한 《세계음악곡집》에 《봉선화》 등을 발표하였으며 1929년에는 《조선음악곡집》상, 하권과 1933년 《조선가요집》 등을 세상에 내놓아 우리 민족의 음악을 더 높은 단계에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홍란파작곡가는 생전에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그의 대표 노래인 《봉선화》를 비롯해 《봄노래》, 《고향의 봄》, 《봄처녀》, 《고향생각》 등 100여수의 노래를 작곡했는데 조선반도와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은 그의 노래를 가장 즐겨불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란파는 후세에 남겨줄 가곡집들을 많이 출간했다. 바이올린독주곡 《애수조선》, 《관현악곡》, 《기타 명창합창곡》, 《특선가요》 등을 출간하였는데 30여세에 이런 걸작과 명곡들을 작곡하였다는것은 실로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홍란파는 음악지식을 높이려고 1931년 또 미국에 가서 《SHEYWOD》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수업에 진력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본격적인 독주회를 여러번 가졌으며 졸업후 주로 경성보유학교(지금의 서울) 리화여자전문학교 등에 가서 음악을 가르쳤다.
1936년 홍란파는 서울방송국의 현악단 지휘자로부터 레코드의 영악부장으로 력임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평론집 《음악만필》등을 통하여 우리 민족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였다.
홍란파가 작곡한 많은 노래중에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조선의 최초가곡으로 불리우고있는 《봉선화》가 그의 대표적인 노래이다. 여기에 4, 4, 4, 4조로 된 노래가사를 적어본다.
1절
울밑에선 봉숭아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반겨 놀았도다
2절
이어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락화도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3절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너의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가사의 내용을 보면 울밑에 핀 봉선화의 가련한 모습이 마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음을 표현하듯 하였으며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로 한많은 겨레의 아픔을 대변하는 노래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봉선화》에 깃든 슬픈 전설<传说>을 이야기하련다.
고려 26대 충서왕이 몽고의 공주보다 조비를 사랑한다는 리유로 몽고의 서울로 붙잡혀갔는데 그는 항상 고국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왕은 어느날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뜯는 꿈을 꾸었다. 줄을 뜯을 때마다 소녀의 열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꿈에서 깜짝 놀라 깨여난 왕은 하도 이상하여 궁녀를 모두 조사했더니 열손가락을 모두 흰헝겁을 동여맨 눈먼 궁녀가 있어서 그 사연을 물었다.
《너는 왜 열손가락에 흰헝겁을 동여맸느냐?》
《나는 고려에서 온 궁녀인데 고국이 그리워 너무 울어서 눈병이 났고 손가락은 봉선화를 물들이기 위해서나이다.》
왕은 타국에서까지 자기 나라의 풍습을 지키는 일이 하도 기특해 이야기를 해봤더니 아버지는 충성왕관직에서 쫓겨났다면서 충성왕께 바치라고 준비한 가락이 있다고 했다. 왕은 감격되여 그후 노력한 결과 고려에 다시 돌아올수 있었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왕은 몽고에 억류되여 있을때 소녀의 일을 생각하고 소녀를 데려오려 했으나 이미 소년이 죽은후였다. 왕은 소년을 기리는 뜻에서 궁궐의 뜨락에 많은 봉숭아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서 많은 대중들이 애창하였던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 노래를 못부르게 《금지곡》으로 내리고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구금하고 고문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어떤 야수적 탄압으로도 가요 《봉선화》의 보급을 막을수 없었다.
1981년 그당시 81세 나는 일본의 량심적 지식인 노무라 모토유기목사는 한국 주재 일본대사관앞에 있는 평화의 소년상을 찾아 플루트(목관악기)로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노래말속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가을바람은 일본침략자를 의미하고 떨어진 꽃송이는 위안부 피해자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봉선화》노래가 창작된지도 어느덧 한 세기가 오라지 않다. 그가 작곡한 많은 노래들은 아직까지도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고있을뿐만아니라 조선반도와 해외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속에서 불리워지고있다.
홍란파작곡가는 1937년 《수양동우회사전》(반일조직)으로 체포되여 차디찬 옥중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는 옥중에서 심하게 얻은 병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떳다. 생을 마감하기전에 홍란파는 《나 죽으면 연미복<燕尾服>으로 내 몸을 덮어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연미복은 지휘자들이 입는 옷 <필자 주>).
1941년 8월 30일, 우리 민족의 작곡가 홍란파는 한창 명곡들을 창작할 나이(43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홍란파작곡가는 음악과 문학이란 무기로 일제를 반대하고 나라 독립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쳤던것이다.
1954년부터 《홍란파기념사업회》가 성립되여 매년 경기도 수원시에서 란파음악콩클을 비롯하여 갖가지 행사를 개최하여 홍란파의 넋을 기리고있다.
우리 민족의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는 우리곁을 떠난지도 7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백의동포들은 그가 작곡한 노래를 여지껏 불러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영원히 불러갈것이다.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 홍란파(洪蘭坡)에 대해 음악연구원과 작곡가들은 잘 알고있으나 중국의 조선족 대중들은 잘 알지 못하는이들이 많은줄로 알고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노래들은 많은 사람들이 즐겨 불러왔고 또 지금도 즐겨 부르고있다.
작곡가 홍란파의 가요들중에서 《봉선화》(凤仙花)가 대표작이라면 동요에서 대표작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있는 동요 《고향의 봄》이다. 1929년에 나온 이 노래는 비록 동요이긴 하지만 어른들도 함게 불렀던 애창곡으로 되여 세세대대 불러왔고 지금도 계속 부르고있다. 그럼 아래에 작사자 리원수의 4,3,5조로 된 《고향의 봄》 1절 가사를 적어본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봉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긋불긋 꽃대궐 차리인 동네
그속에서 놀던때가 그립습니다
이 글을 쓰고있는 필자도 그에 대해 좀 알고있었을뿐 구체적으로는 잘 모르고있었다. 그저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잘 지었다는 생각에만 그쳤을뿐이였다.그러던 지난해 4월초, 필자는 한국에 갔던김에 홍란파의 생가를 찾아볼 기회를 가졌다. 마음속으로 기쁘기 그지없었다. 한것은 언제든 유명한 작곡가 홍란파를 중국에 살고있는 조선족들한테 소개 할 의향이 있었던차라 볼일을 제쳐놓고 홍란파의 고향집 답사부터 하였다.
필자는 그의 생가를 돌아본후 일부 작곡가와 음악평론가들을 만나 홍란파에 대한 이야기도 들었고 문헌자료들도 찾아보았다. 조선의 유명한 음악평론가인 최창호선생이 1995년 조선평양출판사에서 출판한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란 문헌과 한국의 《두산백과》, 《한국예술지》, 《한겨레음악대사전》,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등 자료들을 참조하면서 홍란파에 대한 글을 정리하게 되였다.홍란파의 원명은 홍영후<洪永厚>이다. 작곡가는 1897년 4월 10일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활초리의 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여났다. 5살에 상경하여 14살 되던 해인 1912년 YMCA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남달리 음악에 흥취를 갖게 되였다.
홍란파는 중학교를 졸업한후 조선의 초기음악학교였던 《정악전습소》에서 공부하였는데 창립당시에는 《조양구락부》라고 하였다. 1930년 근대이후에 설립된 조선 최초의 전문기관지인 《조선음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한 홍란파는 1년동안 김인식선생한테서 바이올린을 배웠다.
조선의 저명한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홍란파의 ‘봉선화’와 그의 가요들》이라는 문장에서 《홍란파는 정악전습소 재학당시에 양산도와 노래가락을 바이올린으로 훌륭하게 연주하여 그의 예술적재능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고 하였다.
홍란파는 《정악전습소》를 졸업한후 음악으로써는 도저히 외세에 짓눌릴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수 없다는 부모들의 완고한 반대로 서울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지 않으면 안되였다.(세브란스의과대학은 한국에서 최고 의과대학임<필자 주>). 그렇지만 그는 음악을 전공하리라는 지향을 굽히지 않고 의학공부를 그만두고 일본에 건너가 우에노음악학교에 입학하여 고학하였다.
일본에 가기전 홍란파는 조선음악정음소를 졸업한후 정음소의 교원으로 활동하였다.홍란파는 동경음악학교에 입학한후 거기에서 음악, 문학, 미술 등 세가지 분야에 걸쳐 배우면서 잡지발간 등 문예활동에 주력하였다. 홍란파는 일본에서 학습하던 나날은 참으로 눈물겨운 생활의 련속이였다,
아득바득하며 신문배달을 하고 때를 굶어가면서 밤이면 번화한 네거리에 나서서 바이올린을 타면서 담배장사도 했지만 도저히 학비를 마련할수 없었다. 그는 간신히 어려운 생활난을 겪으면서 2년간을 수료하고 1919년 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되였다. 재일학생들속에서 중심인물로 반일운동에 적극 나선것이 드러나 더 빨리 귀국하게 되였다.
귀국후 홍란파는 《대한매일신보》<大韩每日申报>등의 기자로 또한 소설가로도 사업하면서 창작노래집 《처녀혼》을 출간하였으며 3.1운동이 나던 이듬해인 1920년 22살에 《처녀혼》이란 단편소설을 써서 조선반도에 이름을 날렸다. 그는 문학에도 재능이 뛰여났으며 연극《최후의 악수》도 창작하여 자신이 직접 연출하고 출현하기도 하였다.
홍란파작곡가는 창작노래집을 내기전에 《봉선화》, 《옛동산에 올라》, 《사랑》, 《그리움》, 《봄처녀》, 《여름밤의 별무리》, 《사공의 노래》를 비롯하여 수많은 가요들과 기악곡들을 창작하였다.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는 《처녀혼》의 첫 머리에 《애수》(哀愁)라는 곡이름으로 발표되였다. 1920년에 창작된 가요 《봉선화》는 나라를 잃은 우리 겨레들의 애조곡으로 널리 불리워졌다. 가요 《봉선화》노래에는 다음과 같은 사연이 깃들어있다.
1919년 해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홍란파는 어릴때 송아지친구들과 함께 뛰놀던 고향산천이 하도 그리워 팔달산을 끼고앉은 시골마을을 찾아갔다.그가 꿈결에도 잊을수 없었던 그리운 고향에 찾아온 바로 그 이튿날이였다. 이웃집의 봉선이란 처녀가 방직회사 녀공으로 팔리워가면서 그를 찾아왓다.
소학교시절에 홍란파는 가난한 탓으로 학교에 못가는 봉선이가 불쌍하여 그에게 가끔 글도 배워주고 노래도 배워주군 하였는데 봉선이는 홍란파를 친오빠처럼 따랐다. 그때 봉선이는 봉선화를 그토록 사랑하였으며 해마다 자기 집 뜨락에다 봉선화를 심고 가꾸었다. 홍란파의 집울타리밖에다도 잊지 않고 봉선화를 심어놓군 하였다.
봉선이는 아버지가 병으로 세상을 떠난이후 살길이 막히게 되자 방직회사로 팔리워가면서 홍란파가 왔다는 소식을 듣고 작별인사를 하려고 찾아왔던것이다. 《영후오빠, 잘 있으라요. 인젠 오빠의 양행금소리도 다 들었군요. 마지막으로 한곡조 듣고싶어요》
홍란파는 자기를 친오빠처럼 믿고 찾아온 봉선이의 마지막 애절한 부탁을 들어주리라고 바이올린을 들었으나 정작 그를 위로해줄만한 곡을 찾을수 없었다. 걸음걸음 피눈물을 뿌리며 떠나가야 할 그앞에서 《양산도》를 탈수도 없었고 《노래가락》을 탈수도 없었다.
《아리랑》을 타던 홍란파의 머리에는 피끗 하나의 곡상이 떠올랐다. 그는 그 곡상을 잡고 활을 그어나갔다. 그런데 자기도 모르게 흐르던 눈물이 바이올린의 음선을 적시고 음선에서 미끄러져 처량하게 흐르던 바이올린소리도 뚝 멎고 말았다. 그러자 솟구치는 눈물을 참느라고 입술을 깨물며 서있던 봉선이는 세차게 어깨를 들먹이며 울기 시작했다. 봉선이가 흐느껴울자 그를 바래주려고 모였던 마을사람들 모두가 눈물을 흘렸다.
홍란파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봉선이를 바래주고는 방금전에 탔던 곡상을 그대로 5선지에 적어나갔다. 그후 홍란파는 울밑에 피여난 봉선화를 볼때마다 이 곡을 타면서 봉선이를 생각하였고 나라를 잃은 민족의 슬픔을 통탄하군 했다. 봉선이의 비참한 운명이자 나라와 민족의 운명이라고 생각한 홍란파작곡가는 이 곡을 다듬고 또 다듬었다.
홍란파의 처녀작이라는것을 생각할 때 창작초기에 바이올린독주곡으로 가사가 없이 슬프다는 뜻에서 곡명이 《애수》<哀愁> 였다. 5년뒤 김형준이 가사를 달아주었는데 그는 란파보다 나이가 많았으며 집엔 봉선화가 많해 김형준은 가사를 쓰는데 큰 도움이 되였다고 한다. 김형준은 홍란파와 이웃에 살면서 친분이 매우 두터운 관게계였던것이다.
작곡가 홍란파가 봉선이를 바래주면서 얻은 곡상이기때문에 노래제목을 《봉선화》라고 하였다.
조선의 음악평론가 최창호는 《이 노래가 1920년에 창작되였다는 점에서 우리 민족의 가요가 창작풍의 가요에 머물어있던 우리 나라 가요에 새로운 활력과 그 예술적 경지를 개척해나간 작품의 하나라는데 그 의의가 매우 깊고 참으로 우리 나라의 현대가요창작의 선구자였다고 높이 평가하였다.
그리고 《고향의 봄》노래를 이렇게 평가했다.
《일제침략자들에게 나라를 빼앗긴 그 시기 이 땅에서 살래야 살수가 없어 피눈물을 뿌리며 압록강과 두만강을 건느는 겨레들과 현해탄을 건너 일본의 광산이나 탄광지대로 내몰리는 동포들이 날따라 늘어났다. 그렇기때문에 우리 민족은 망국의 설음과 타향살이의 슬픔을 함께 겪어야만 하였으니 《고향의 봄》이 창작된것은 그 시대가 안겨준 음률이다》고 했다.
홍란파는 1922년 서울 연악회를 창설하였으며 1925년 한국 최초의 음악잡지 《음악계》를 창간하는 일도 해냈다. 바이올리니스트, 평론가, 교향악단지휘자, 음악전문지 발행인, 소설가로 활동하며 다재다능한 활동을 펼쳤다.
1926년에 홍란파는 음악재질을 높이려고 또 일본으로 건너가 동경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동경신교향악단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한편 1925년에 편찬한 《세계음악곡집》에 《봉선화》 등을 발표하였으며 1929년에는 《조선음악곡집》상, 하권과 1933년 《조선가요집》 등을 세상에 내놓아 우리 민족의 음악을 더 높은 단계에 끌어올리는데 큰 공헌을 했다.
홍란파작곡가는 생전에 대중들이 즐겨부르는 노래를 많이 작곡했다. 그의 대표 노래인 《봉선화》를 비롯해 《봄노래》, 《고향의 봄》, 《봄처녀》, 《고향생각》 등 100여수의 노래를 작곡했는데 조선반도와 중국에 있는 조선족들은 그의 노래를 가장 즐겨불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란파는 후세에 남겨줄 가곡집들을 많이 출간했다. 바이올린독주곡 《애수조선》, 《관현악곡》, 《기타 명창합창곡》, 《특선가요》 등을 출간하였는데 30여세에 이런 걸작과 명곡들을 작곡하였다는것은 실로 우리 민족의 천재적인 작곡가라고 하지 않을수 없다.
홍란파는 음악지식을 높이려고 1931년 또 미국에 가서 《SHEYWOD》음악학교에서 바이올린수업에 진력하였다. 미국에서 그는 본격적인 독주회를 여러번 가졌으며 졸업후 주로 경성보유학교(지금의 서울) 리화여자전문학교 등에 가서 음악을 가르쳤다.
1936년 홍란파는 서울방송국의 현악단 지휘자로부터 레코드의 영악부장으로 력임하기도 하면서 한편으로 평론집 《음악만필》등을 통하여 우리 민족음악문화의 계몽발전에 크게 기여한 작곡가였다.
홍란파가 작곡한 많은 노래중에서 민족의 아픔을 노래한 조선의 최초가곡으로 불리우고있는 《봉선화》가 그의 대표적인 노래이다. 여기에 4, 4, 4, 4조로 된 노래가사를 적어본다.
1절
울밑에선 봉숭아야 네모양이 처량하다
길고긴날 여름철에 아름답게 꽃필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 너를반겨 놀았도다
2절
이어간에 여름가고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락화도다 늙어졌다 네모양이 처량하다.
3절
북풍한설 찬바람에 네형체가 없어져도
평화로운 꿈을꾸는 너의혼은 예있으니
화창스런 봄바람에 환생키를 바라노라.
가사의 내용을 보면 울밑에 핀 봉선화의 가련한 모습이 마치 나라를 잃은 민족의 설음을 표현하듯 하였으며 민족의 노래로 일제에 항거하는 저항의 노래로 한많은 겨레의 아픔을 대변하는 노래이기도 하였다.
여기에 《봉선화》에 깃든 슬픈 전설<传说>을 이야기하련다.
고려 26대 충서왕이 몽고의 공주보다 조비를 사랑한다는 리유로 몽고의 서울로 붙잡혀갔는데 그는 항상 고국을 그리워했다. 그런데 왕은 어느날 한 소녀가 자기를 위해 가야금을 뜯는 꿈을 꾸었다. 줄을 뜯을 때마다 소녀의 열손가락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꿈에서 깜짝 놀라 깨여난 왕은 하도 이상하여 궁녀를 모두 조사했더니 열손가락을 모두 흰헝겁을 동여맨 눈먼 궁녀가 있어서 그 사연을 물었다.
《너는 왜 열손가락에 흰헝겁을 동여맸느냐?》
《나는 고려에서 온 궁녀인데 고국이 그리워 너무 울어서 눈병이 났고 손가락은 봉선화를 물들이기 위해서나이다.》
왕은 타국에서까지 자기 나라의 풍습을 지키는 일이 하도 기특해 이야기를 해봤더니 아버지는 충성왕관직에서 쫓겨났다면서 충성왕께 바치라고 준비한 가락이 있다고 했다. 왕은 감격되여 그후 노력한 결과 고려에 다시 돌아올수 있었고 왕위에 올랐다고 한다.
왕은 몽고에 억류되여 있을때 소녀의 일을 생각하고 소녀를 데려오려 했으나 이미 소년이 죽은후였다. 왕은 소년을 기리는 뜻에서 궁궐의 뜨락에 많은 봉숭아를 심게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조선반도는 일본의 식민지로서 많은 대중들이 애창하였던 홍란파의 대표작 《봉선화》 노래를 못부르게 《금지곡》으로 내리고 그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을 구금하고 고문까지 했다. 그러나 일제는 그 어떤 야수적 탄압으로도 가요 《봉선화》의 보급을 막을수 없었다.
1981년 그당시 81세 나는 일본의 량심적 지식인 노무라 모토유기목사는 한국 주재 일본대사관앞에 있는 평화의 소년상을 찾아 플루트(목관악기)로 《봉선화》를 연주했다. 그는 《노래말속 가을바람 솔솔불어 아름다운 꽃송이를 모질게도 침노하니… 가을바람은 일본침략자를 의미하고 떨어진 꽃송이는 위안부 피해자 같다》며 눈물을 흘리며 무릎을 꿇었다.
《봉선화》노래가 창작된지도 어느덧 한 세기가 오라지 않다. 그가 작곡한 많은 노래들은 아직까지도 예술적 생명력을 잃지 않고있을뿐만아니라 조선반도와 해외에서 살고있는 동포들속에서 불리워지고있다.
홍란파작곡가는 1937년 《수양동우회사전》(반일조직)으로 체포되여 차디찬 옥중에서 잔인한 고문으로 고초를 겪었다. 그는 옥중에서 심하게 얻은 병으로 그토록 갈망하던 광복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떳다. 생을 마감하기전에 홍란파는 《나 죽으면 연미복<燕尾服>으로 내 몸을 덮어주시오》라는 말을 남기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연미복은 지휘자들이 입는 옷 <필자 주>).
1941년 8월 30일, 우리 민족의 작곡가 홍란파는 한창 명곡들을 창작할 나이(43살)에 너무 일찍 세상을 떴다. 빼앗긴 나라를 찾기 위하여 홍란파작곡가는 음악과 문학이란 무기로 일제를 반대하고 나라 독립을 위한 투쟁에 자신의 모든것을 다 바쳤던것이다.
1954년부터 《홍란파기념사업회》가 성립되여 매년 경기도 수원시에서 란파음악콩클을 비롯하여 갖가지 행사를 개최하여 홍란파의 넋을 기리고있다.
우리 민족의 불멸의 작곡가 홍란파는 우리곁을 떠난지도 74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우리 백의동포들은 그가 작곡한 노래를 여지껏 불러왔으며 앞으로도 영원히 영원히 불러갈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