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투쟁영웅 홍범도장군 고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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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21-08-16 13:00|본문
8.15 광복절에 카자흐스탄에 안장돼 있는 홍범도 장군(1868~1943)의 유해가 78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홍범도 장군은 1920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승리로 이끈 한국독립운동사에 있어 영웅적인 인물이다. 연해주에 거주 중이던 1937년 한인 강제 이주정책에 의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됐고, 그 이듬해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 정착한 후 1943년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봉오동전투는 1920년 6월에 독립군 연합 부대가 중국 길림성의 두만강 지역 봉오동 계곡에서 일본군과 싸워 크게 승리한 전투이다. 일본군은 수백 명이 죽거나 다치는 큰 피해를 입었으며, 기세가 오른 독립군은 이후 벌어진 청산리 대첩에서도 승리를 이어갔다.
3 · 1 운동 이후 우리 민족의 항일 투쟁은 한층 치열해졌다. 특히 만주와 연해주 일대에서 조직된 독립군은 국경 근처에 있는 일본군을 끊임없이 공격해 커다란 피해를 주었다. 홍범도가 이끄는 대한 독립군도 1920년 6월에 두만강을 넘어 일본의 헌병 순찰대를 공격했다. 이에 일본군은 독립군을 추격하면서 두만강을 넘어 삼둔자까지 들어와 그곳에 사는 한인들을 잔인하게 살해했다. 독립군은 이때 침입한 일본군을 매복 공격하여 커다란 타격을 입혔는데, 이를 ‘삼둔자 전투’라고 한다.
삼둔자 전투로 위기를 느낀 일본군은 독립군을 공격하여 섬멸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고는 두만강을 넘어 독립군의 근거지가 있던 봉오동으로 향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공격이 있을 것을 예상한 홍범도는 자신이 이끄는 대한 독립군뿐 아니라 최진동이 이끄는 군무도독부, 안무가 이끄는 국민회군 등과 함께 연합 부대를 만들었다.
이윽고 일본군이 두만강을 넘어 공격해 오자 독립군 부대는 봉오동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뒤 일본군을 봉오동 골짜기로 끌어들여 기습적으로 공격했다. 좁은 골짜기에 갇힌 신세가 된 일본군은 커다란 피해를 입고 도망치듯 물러났다. 대한민국 임시 정부의 발표에 따르면 이 전투에서 일본군 사망자는 157명, 부상자는 200여 명에 달했다. 반면 독립군은 4명이 사망하고 약간의 부상자가 생기는 데 그쳤다.
봉오동 전투 이후 청산리에서도 독립군이 크게 승리하자 일본은 잔인한 보복에 나서기도 했다. 간도 지방과 자유시에 살고 있던 한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른 것이다. 하지만 봉오동과 청산리에서 거둔 승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이후 독립군이 보다 조직적으로 재편성되는 계기가 되었다.
봉오동 전투는 독립군이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한 본격적인 전투에서 거둔 최초의 승리였다. 봉오동 전투로 독립군의 사기는 크게 높아졌고 일본과 맞서 승리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겨났다. 이에 독립군은 병력과 조직을 정비하고 무기를 확충하는 데 힘썼다. 반면 봉오동 전투에서 패배해 충격을 받은 일본은 독립군을 비롯한 만주 지역의 독립 운동 세력을 없애기 위한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