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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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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3-14 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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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맞춰 타작하고있는 “리옥금 품앗이조”
 
 

농민들 호조합작의 길로
 
 

리옥금 국빈회에서 “도라지” 부르고 
김시룡 세전벌서 “호조조” 성공시켜
 
 

리옥금과 “품앗이조”

토지개혁이후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조선인농민들은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호소를 적극 받들고 호조합작의 길로 나아갔다. 특히 렬사가족, 군인가족들이 농업전선에서 앞장에 나섰다. 혁명렬사가족 리옥금이 조직한 “품앗이조”와 호조조가 그 일례라고 할수 있다. 

리옥금은 조선 함경북도 성진군태생(1922)이다. 8살때부터 지주집에서 일을 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한 리옥금은 15살 때 조선 함경북도 덕산지역에서 오빠를 도와 유격대에 정보를 나르고 밥도 지어날랐다. 그러던 어느날 큰할아버지의 밀고로 탄로가 나 더는 유격대를 도와 일할수 없게 되자 조선을 떠나 연길현 조양천 태평구에 있는 오빠네 집으로 왔다. 그후 얼마 안되여 리옥금은 림지룡에게 시집을 갔다. 1942년 리옥금은 연길시 흥안향 소대려촌에 이사해왔다. 1945년 9월, 리옥금은 농회부주임으로 되었다. 남편을 입대시킨 리옥금은 어린 시동생, 시누이 넷을 보살피면서 가사와 농사일, 사회공작에 바삐 보냈다. 리옥금의 모범적행동에 영향을 받아온 마을의 청장년중 80%가 참군하였다. 

끌끌한 남자들이 다 참군하다보니 늙은이와 어린이들밖에 남지 않아 이듬해 밭갈이를 할 사람이 적었다. 그때 리옥금은 호리를 세 번이나 마스면서도 끝내 밭갈이재간을 익혔고 자기 집 논 3무 2푼을 갈아번진외에 십여호 군인가족녀성들을 조직하여 “품앗이조”를 무어 밭을 갈아번지였다. 

연변에서는 “호조합작”문제를 비교적 일찍 제기하였다. 1946년 2월중순, 연변전원공서 부전원이였던 동곤일은 각 현의 현장, 건설과장 회의를 열고 “연변농업생산의 총화”라는 보고를 통하여 “호조조”문제를 언급하였다. 그는 보고에서 생산호조조를 통하여 소농경제의 약점을 극복할수 있으므로 그 조직구성이 아무리 복잡하더라도 “자원적결합”과 “등가교환”의 원칙을 잘 관철한다면 그렇게 어려운것도 아니라고 제기했다. 조선인들은 과거 공동으로 농사를 지으려고 “두레”를 무은적이 있었다. 이런 옛 생산형식은 “호조조”를 꾸리기 위한 좋은 바탕이라고 말할수 있었다. 

리옥금은 “품앗이조”를 무어 일하던데로부터 앞장서 호조조를 조직해 그해 농사를 녀성의 힘으로 지었고 잘 여문 낟알을 나라에 바쳐 전선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1946년 리옥금은 연길시로력모범대회에 참가하여 표창을 받았다. 1947년 리옥금은 생산, 전선지원렬사가족모범으로 선거되여 길림성로력모범회의에 참가하였고 1948년에는 공산당에 가입하였다. 

리옥금이 조직한 호조조의 영향을 받고 전현의 호조조도 매우 빠른 발전을 가져왔다. 1948년 10월, 지구로력모범대회에서 리옥금은 암소 한 마리를 상으로 받았다. 그해 겨울 리옥금은 전국 제1차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여 모택동을 비롯한 중공중앙지도자들의 접견을 받았다. 1950년 1월에는 아세아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때를 리옥금은 이렇게 회상하고 있다. 

조선인을 대표하여 전국 제1차부녀대표대회에 참가하러 북경으로 갔습니다. 당시 당중앙은 서백파에서 북경으로 오고있는중이였지요. 저는 영광스럽게 모주석의 마중을 나가게 되었습니다. 비행기가 멎자 중앙지도자 8명이 비행기에서 내렸는데 모주석께서도 내리시였지요. 어찌나 격동되였는지 감히 주석의 얼굴도 쳐다보지 못하였습니다. 주석께서 저의 앞을 지나간후에야 뒤모습을 보았는데 팔각모자를 쓰셨더군요. 그렇게 웅장하셨습니다. 제가 회의에 올 때 동네분들이 환송하며 모주석의 얼굴을 똑똑히 보라고 하던 부탁이 떠오르자 정말 속상했습니다. 그날 저녁 북경에 돌아온후 잠을 이룰수가 없었습니다. ‘이젠 모주석을 다 뵈였구나’라는 생각으로 말입니다. 이틀이 지난후 전체회의가 시작되였는데 저는 주석단성원으로 되었지요. 회의를 시작한지 얼마 안되여 모주석께서 오신다는 소식이 왔습니다. 모주석께서는 회의장에 오시여 저의 앞줄 오른켠에 앉아계셨지요. 당시 그이의 뒤모습만 봤을뿐입니다. 후에 만찬회가 있었는데 모주석께서 또 오시였지요. 저는 모주석과 한좌석에 배치되였습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모주석의 얼굴을 보았으며 격동된 나머지 그이의 허리를 꼭 그러안고 눈물을 흘렸답니다. 만찬이 끝나고 오락회가 시작되였지요. 모주석께서는 저더러 노래를 부르라는것이였지요. 제가 금방 배운 ‘공산당이 없으면 새 중국도 없다’는 노래를 부르자 주석께서는 저를 보고 ‘도라지’를 부르라는것이였습니다. 뒤이어 저는 노래도 부르고 조선춤도 추었습니다.(서봉학, 리광수의 대형다큐멘터리 “연변아리랑”에서) 

1949년부터 각급 당조직에서는 호조합작운동을 공산당의 중심사업으로 삼고 “생산대에 참가하여 생산을 지도”할 것을 전체 당원들에게 호소하였으며 자원적이며 쌍방이 다 리로와야 한다는 원칙을 재차 강조하였다. 이해 봄에 연변지구에는 2만 3799개 호조조가 조직되였는데 80%의 로력과 축력이 호조조에 들어갔다. 그러나 김매기철에 먼저 매고 후에 매는 모순 때문에 53%를 차지하는 1만 2593개 호조조가 무너졌다. 년말까지 남아있는 년간호조조가 1만 490개로서 32%를 차지했다. 

실패한 영성촌의 “대형호조조”

“호조조”를 조직하라는 소식은 세전이벌에 자리잡고있는 연길현 동성용향 영성촌에도 전하여왔다. 이 마을에서는 처음에는 두서넛집씩 모여 “소겨리조”, “품앗이조” 등 계절호조조를 조직하여 농사를 지었다. 

영성촌에서 “호조조”를 정식으로 꾸린 것은 1947년 여름이였다. 그때 이곳에서는 토지를 분여하면서 전 마을을 한데 합하여 한 개 “호조조”를 무었다. 호조합작의 경험이 없는 형편에서 대번에 큰 조를 뭇고보니 모순이 련속부절하게 나타났다. 로력랑비가 많았고 아무 때나 일밭으로 나가기만 하면 한 개 공씩 적어넣었다. 뿐만아니라 로력공수평가가 합리하지 않고 과학적이 못되여 생산적극성에 영향을 주었으며 생산력발전에 커다란 장애로 되었다. 게다가 토지개혁의 대중적운동의 거센 조류속에서 조직하다보니 적지 않은 농민들이 “호조조”에 들지 않으면 법을 위반하는것이라고 여기기까지 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군중비판이거나 투쟁을 받을가 겁나 억지로 참가하였다. 

그해 가을 중농이상 농호 일곱집이 먼저 “호조조”에서 물러나가자 억지로 참가하였던 농민들과 로력, 부림짐승이 넉넉한 집들은 슬금슬금 “호조조”에서 나갔다. 영성에서 처음 조직한 “호조조”는 이렇게 유아무야해지고 말았다. 

“호조조”가 건립될 때 선참 참가하였던 김시룡은 공산당의 호소대로 끝까지 합작화의 길로 나아가려 했으나 “호조조”가 무너지고보니 맹랑한 생각이 들었다. “가난한 농민에게 땅을 준이가 공산당이다”고 생각하고있는 김시룡은 공산당의 은혜를 잊을수 없었다. 그는 생활의 체험에서 공산당의 말을 들으면 틀림없다는 신념을 지녔다. 그는 호조합작을 실시하라는 공산당의 호소에 호응하여 불바다라도 뛰여들어가려는 심정이였으나 랭혹한 현실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파도에 밀린 모래처럼 산산이 흩어진 “호조조”를 생각하기만 해도 가슴이 아파난 김시룡은 그 일로 고민에 빠지기까지 했다. 

1948년 봄, “대형호조조”를 강제적으로 조직하여 실패한 경험교훈을 찾고 이번에는 자원호혜의 원칙을 관철하여 “소형호조조”를 조직하였다. 영성에서는 서로 뜻이 맞고 감정이 맞는 농민들이 네댓 혹은 대여섯씩 한 개 조를 무어 전촌을 여섯 개 “호조조”로 조직하였다. 그런데 촌농회의 간부들은 회의가 많아 밭일에 참가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으므로 농민들은 간부들과 함께 조직하기를 싫어했다. 이러한 실정을 고려하여 자원호혜의 원칙에 좇아 “간부조”라는 특별한 “호조조”를 따로 내왔다. 

여섯 개 “호조조” 가운데서 갑자기 김장룡호조조가 조원 한사람이 병사하는바람에 로력이 결핍하여 흩어질 위험성이 있었다. 이에 김시룡은 자원적으로 “김장룡호조조”로 넘어갔다. 김시룡은 조장을 도와 “호조조”를 잘 꾸려나갔다. 김시룡의 꾸준한 노력에 의하여 로력이 늘 딸린다던 이 “호조조”는 개체농호보다 1주일 앞당겨 타작을 끝마쳤다. 

성공한 “김시룡호조조”

1949년 봄, 영성의 여섯 개 소형호조조는 또 다시 대형호조조로 되었다. 마을사람들은 한결같이 감농군이고 살림꾼이며 진국인 김시룡을 조장으로 선거하였다. 큰살림을 한몸에 떠멘 김시룡은 조원들의 앞장에 서서 밭일에 참가하였으며 제일 일찍 밭에 나갔다가 제일 늦게 집으로 들어왔다. 

김시룡은 경영관리사업에 힘을 기울여 존재한 모순을 찾았다. 군중들은 시끄러운 밭머리평공, 비오기전후의 김매기, 후치질에서의 로동차이, 로동강도, 불합리한 등가교환 등 18가지 모순을 폭로하였다. 이에 김시룡은 복잡한 문제들을 해결할 방책을 창조적으로 제기하였다. 

우선 표준공을 정하였다. 토질이 좋은가 나쁜가, 어떤 곡식을 심는가, 마을에서 밭까지의 거리가 얼마나 먼가 하는 등을 고려하여 조원들의 민주적인 평의를 거쳐 봄부터 가을까지 소요되는 총공수를 정하였는데 이것을 표준공이라고 하였다. 이렇게 하여 여러 가지 모순과 불합리한 현상이 시정될수 있었다. 

다음 합작자금을 설치하였다. 담배농사, 양기르기 등 비교적 많은 로력과 자금이 소요되는 농업과 부업은 개인으로 경영하기 힘들었다. “호조조”에는 로력은 남아있으나 자금이 없었다. 이런 실정에서 비교적 규모가 큰 부업을 경영하기 위하여 조원들에게서 받아들인 자금을 합작자금이라고 하였다. 분배때에는 합작자금 역시 로력과 같은 역할을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로력기준량을 정하였다. 조원들의 숙련정도, 신체상황, 같지 않은 로동에 따라 로력기준량을 정하였다. 

세전이벌은 본디 땅이 기름졌다. 그런데 해방전에는 지주의 착취로 말미암아 땅을 잘 가꾸지 않아 한전의 평균수확고는 겨우 쌍당 1000킬로그람좌우였고 수전은 2150킬로그람 사이에서 오르내렸다. 

“김시룡호조조”는 가난한 조선인농민 23세대로 조직되였는데 총인구 117명 가운데서 남자로력 20명, 녀성로동력 26명이였다. 가축으로는 소 16마리에 소수레 12대였으며 그 외에 말 한 마리와 노새 한 마리는 호조조의 연자방아간에 두어 공동으로 사용하였다. 토지는 한전 26헥타르 6무 5푼, 수전 13헥타르 9무 6푼인데 합치면 40헥타르 6무 1푼이였다. 그러니 인당 3무 3푼 돌아가는셈이였다. 김시룡은 춘경때 남아돌아가는 로동력을 조직하여 황무지를 개간하여 한전 1쌍과 수전 8무를 확대하였다. 하지만 농토는 적고 로력과 축력이 남아돌아가는 모순을 의연히 해결되지 않았다. 

김시룡은 세심히 따져보았다. 아무리 심경세작하더라도 한 개 로력이 한전 2.5헥타르거나 혹은 수전 1.5헥타르를 다룰수 있으니 수, 한전을 평균 잡으면 한 로력이 2헥타르를 다룰수 있다. 그렇다면 40헥타르의 땅을 다루는데 남자로력 20명이면 족하다. 한 마리 소로 평균 3.5헥타르의 땅을 개간할수 있으니 12마리면 넉넉하다. 그러니 소 4마리나 남는셈이다. 남아돌아가는 로력과 축력을 합리하게 리용하여야 했다. 

한해 농사를 지으면 인당 알곡 465킬로그람밖에 안돌아간다. 이것으로 공량을 20%로 바치고 식량, 종자, 사료를 남겨놓는다면 의복을 지어입을 돈이 생길 구멍이 없다. 그러니 알곡생산만으로는 살림 펴일수 없었다. 

이에 김시룡은 우선 땅을 잘 가꾸었다. 농토의 시비면적을 80%로 증가하고 40%의 밭을 네 벌 김매고 네 번 후치였으며 그 외 밭은 세벌 김매고 세 번 후치였다. 하여 헥타르당 수확고를 2612.5킬로그람으로 올려 전해보다 64%로 증산하였으며 개체호보다 헥타르당 105킬로그람 증산하였다. 1헥타르 8무의 개간지에서도 적지 않은 수확고를 높이였으며 1헥타르 1무의 한전을 수전으로 개답하여 수확고를 높이기도 했다. 그밖에 담배농사를 하여 수입을 올렸다. 김시룡은 또 조원들에게서 자금을 모아 여유로력을 조직하여 닭, 오리, 돼지, 양 등을 사양하였으며 여자들을 조직하여 약재를 캐게 하였는데 부업으로 얻은 수입은 5만여킬로그람의 식량가치에 해당되였다. 농업과 부업으로 얻은 수입으로 의식의 해결이 문제없이 되었으며 생활을 일정한 정도로 개선할수 있었다. 

김시룡은 공부하지 못하여 일자무식이였으나 늘 목책을 챙겨갖고 다녔는데 목책에 여러 가지 부호들이 가득 적혀있었다. 누구나 그 기호를 알아볼수 없었으나 김시룡은 그 목책을 펼쳐보기만 하면 “호조조”의 실정을 손금보듯 환히 꿰뚫고있었다. 

개체로 경작할 때보다 수입이 증가되니 “호조조”내부에서 동요하던 조원들은 장기타산을 갖게 되었으며 “호조합작”이라면 외면하던 개체호들은 호조조를 부러워하기 시작했다.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은 연길현의 계선을 넘어 전 연변에 소개되였다. 경영관리사업이 따라가지 못하여 해산될 위험이 있던 적지 않은 “호조조”들은 “김시룡호조조”의 경험을 학습하고 새로운 기상을 나타내게 되었다. 

1949년, “김시룡호조조”는 연길현로력모범대회에서 1등 “모범호조조”로 당선되였다. 1950년, 김시룡은 길림성특등로력모범, 전국로력모범의 영예를 지니고 북경에 가 국경 첫돌기념모임에 참가하게 되었으며 모스크바를 방문, 쓰딸린의 접견을 받았다. 그는 전국인민대표대회의 제1기로부터 제3기에 이르는 기간 줄곧 대표로 당선되였고 또한 전국정치협상회의 위원으로 당선되였다. 

김시룡은 1951년에 연변농학원과 손잡고 “새벽농업대학”을 창설하여 농업로동에 참가하고있는 농민들로 하여금 농업과학기술을 습득케 하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첫 초급농업사

1951년 3월,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중공중앙 동북국의 지시에 근거하여 토지출자를 특점으로 한 초급농업사를 시험적으로 건립할 것을 지시함과 동시에 전국로력모범 “김시룡호조조”에 공작조를 파견하여 경험적으로 해보게 하였다. 

여러차례의 토론 끝에 22호 조원중 6호는 계속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에 남아있고 부유농민 송병관은 아예 혼자하겠다면서 나가고 15호가 초급농업사에 가입하였다. 이것은 연변지구에서 건립된 첫 초급농업사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는 건립한 첫해에 증산하였다. 김시룡초급농업사의 수전 헥타르당 수확고가 3865킬로그람인데 비하여 생산량을 도맡은 호조조의 수확고는 3800킬로그람이였고 혼자한 송병관의 수확고는 3234.5킬로그람이였다. 혼자하는 것이 호조조보다 못하고 호조조는 농업사보다 못하다는 것을 증명해준셈이였다. 

1952년 1월초, 동북인민정부 판공청 주임 왕광위는 공작조를 데리고와서 김시룡농업생산합작사에 대하여 전면적으로 조사한후 보고를 썼다. 당시 동북인민정부 주석이던 고강은 이 보고를 비준, 이첩하면서 각급 지도간부들에게 김시룡농업사의 경험을 연구하라고 호소함과 동시에 동북3성의 성보는 이 보고를 실어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로부터 농업생산합작사란 이 새사물이 농촌경제생활의 중심으로 되었다. 

중공연변지위에서는 전 지구적으로 94개의 초급농업사를 세울 것을 계획했다. 그런데 이해 봄에 각지에서는 자발적으로 농업사를 세우는 고조가 일어나 190개의 초급사가 새로 건립되였다. 왕청현에서는 민족련합사도 건립되였다. 

농업사가 급격히 증가된 새로운 정세에 비추어 중공연변지위에서는 “농업생산호조합작에 대한 중공중앙의 결의”(초안)를 진지하게 관철하였다. 특히 이 “결의”에 명시된 “적극적으로 지도하고 온당하게 전진”하는 방침을 진지하게 관철집행할 것을 강조하였다. 아울러 중견력량, 호조경험, 대중토대 등 조건에 근거하여 농업사를 정돈 공고히 할 것을 제시하였다. 연변지구에는 비준을 거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난 농업사가 60개나 되었다. 현에서 그들더러 호조조로 고치라고 해도 그들은 듣지 않고 그냥 농업사를 꾸려나갔다. 당시 이런 농업사를 “검은 사”라고 하였다. 이런 “검은 사”도 후에는 다 자기궤도에 올라 공고히 되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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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전철수, 전국 정협 상무위원으로 인기글  조선족인 전철수(全哲洙·61) 중국공산당 통일전선부 부부장이 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 상무위원으로 뽑혔다.  전 부부장은 정협 폐막 전날인 지난 11일 진행된 제12기 전국위원회 1차 전체회의에서 신임 주석 위정성(俞正声)과 두칭린(杜青林) 등 23명의 부주석, 비서장(장칭리·张庆黎) 선출에 이어 실시된 상무위원 선거에서 299명의 일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전 부부장은 지난해 11월 제18차 당대회에서 …(2013-03-18 07:08:37)
조선족 연극 미래지향적 대책 요청 인기글 연극 및 극본 창작인재 양성 시급 2010년의 “고향역”, 2012년의 “주덕해”… 연변가무단 연극부에서 새로 창작한 작품은 관중들로부터 호평을 받았고 “주덕해”는 지난해 12월에 중국 연극계의 최고상으로 불리우는 "금사자상"의 영예를 안아오면서 지금까지 유지되고있는 몇몇 안되는 소수민족 연극단체의 존재상을 보여주었다.  연변에서 연극공연은 건국전인 1944년 6월에 “화북조선혁명군사정치학교구락부”(연변가무단 전신)에서 시작되였고 1949년까지 중국 항일근거지인 태…(2013-03-18 07:02:50)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92) 인기글 중국조선족과 연변인민을 대표하여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제1차 회의와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에 참가하러 가면서 연변인민의 열렬한 환송을받고있는 중공연변지위 서기 겸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1949년 9월) 조선민족 건국대회서 정치권리 행사 조선민족지도자들 …(2013-03-18 06:09:14)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91) 인기글 북경에서 있은 국경1주년 경축공연에서의 연변문공단의 합창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났다”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3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출판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2013-03-16 12:35:14)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90) 인기글 1949년에 창립된 연변대학 연변민족교육의 중심지로 그 기반을 튼튼히 닦아왔다.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2 조선민족유지인사들 민족대학 세우려고 동분서주 연변일보 연변인민방송국 민족언어로 출판 방송 연변대학 창립 동북이 해방되자 조선인들은 자기…(2013-03-16 12:18:33)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9) 인기글 광복을 맞아 새 학교에 등교하는 연길시의 소학생들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1 낡은 교육제도 개혁 민족언어문자로 교수 중국 조선민족의 최고학부 연변대학 창설 “8.15”해방은 연변조선민족앞에 일제침략자에게 빼앗겼던 자기의 말과 글로써 교육을 발전시킬 …(2013-03-15 05:50:42)
[열람중]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8) 인기글 손맞춰 타작하고있는 “리옥금 품앗이조” 농민들 호조합작의 길로 리옥금 국빈회에서 “도라지” 부르고 김시룡 세전벌서 “호조조” 성공시켜 리옥금과 “품앗이조” 토지개혁이후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위해 조선인농민들은 공산당과 인민정부의 호소를 적극 받들고…(2013-03-14 10:37:39)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7) 인기글  해남도전역에 참가하러 떠나가는 40군 포병영 조선인전사들.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전장으로.4 해남도서 대나무배로 미국현대화군함 격퇴 정주서 조선인으로 무어진 독립 15사 편성 조선인포병영 1949년 12월, 광동성과 광서성이 해방되자 대륙은 기본적…(2013-03-12 14:05:58)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6) 인기글 중국인민해방군 독립15사 퇀급이상 간부들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전장으로.3 조선인 장병들 팔면산서 토비와 접전 군중을 발동해 지혜롭게 토비굴 기습 422퇀 룡산으로 진격 중경을 해방한후 422퇀은 해방군총부로부터 고향인 동북에 돌아가 대생산건설에 참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여 부대는 중경에서 배를 …(2013-03-12 13:58:11)
윤동주시인의 중학교시절 사진 최초 공개 인기글 2월 27일, 윤동주시인의 유가족인 윤인식 성균관대 건축학과 교수가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저항시인인 윤동주의 육필로 된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비롯한 129편의 시와 윤동주시인의 손때가 묻은 각종 물품 등 유품들을 공개했다.특히 윤동주시인이 고종사촌인 동립운동가 송몽규와 나란히 …(2013-03-12 12:15:26)
조선족여성들, 사회건설에도 ’현처량모’ 인기글 올해는 제103번째 ‘3.8’부녀절이다. 이 시대 조선족녀성들은 가정에서 현처량모일뿐만아니라 사랑과 따뜻한 마음을 사회에 바치면서 ‘아름다운 중국’건설에서도 하나의 아름다운 풍경선을 이루고있다.   중국내 각지에 설립된 조선족여성단체(부녀협회)들, 이들 대부분은 50-60대 조선족여성들에 의해 설립된것이다. 협회 회원들은 조선족 여성들의 친목과 진보는 물론 사회자선공익사업을 활발히 해오면서 진정 여성들의 사랑의 힘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있다.  이들중 베이징 애심녀…(2013-03-11 06:51:35)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5) 인기글 연길시 참군환송대회. 이날 연길시 제2중학교 150명 학생 참군.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전장으로.2 156사 남창보위임무 완수 족친부락무장 해제422퇀 장강 뛰여넘어 중경해방전투서 용맹을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진군한 156사는 남창위수임무를 맡고 그 외의 부대들은 계속 남진하였는데 조선인전…(2013-03-10 06:42:54)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4) 인기글 남창시를 순라하고있는 446퇀 조선인전사들(1947년 11월) 산해관 넘어 전국해방 전장으로.1 연변의 건아들 호성하 피로 물들이며 배다리 놓고 단풍전투 지혜롭게 벌려 장강 도하작전 서막 열어 동북해방전쟁이 끝난후 조선인장병들은 제4야전군으로 재편성된 동북의 각…(2013-03-10 06: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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