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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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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3-15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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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을 맞아 새 학교에 등교하는 연길시의 소학생들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1
 
 

낡은 교육제도 개혁 민족언어문자로 교수 
중국 조선민족의 최고학부 연변대학 창설
 
 

“8.15”해방은 연변조선민족앞에 일제침략자에게 빼앗겼던 자기의 말과 글로써 교육을 발전시킬 광활한 전망을 펼쳐주었다. 예로부터 자식공부를 위해서는 소까지 팔아 뒤를 대준다는 우리 민족이였다. 일제에게 글과 말을 빼앗기고 황민교육을 접수하지 않으면 안되였을 때 민족의 지성인들은 얼마나 가슴치며 통탄했던가. 그러나 이젠 글과 말을 되찾게 되였다. 민족의 유지인사들은 인차 손을 쓰기 시작했다. 유지인사들의 노력과 알선으로 교원들을 모셔오고 교사를 마련하여 소학교, 중학교를 세웠다. 이런 거동은 타성적이며 자발적인 상태에 머물러있었지만 교육을 중시하는 우리 민족의 전통만은 그대로 보여주고있었다. 

1946년9월, 동북행정위원회에서는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은 전개할데 관한 지시”에서 동북해방구 교육사업의 총적인 방침은 “일제강점시기의 노예교육과 장개석의 봉건적, 파쑈적 교육의 여독과 영향을 일층 숙청하며 민족적이고 민주적이며 대중적이고 과학적인 신민주주의교육을 확립하여 교육으로 하여금 신민주주의 정치적투쟁을 위하여 복무하게 해야 하며 동북인민들의 평화민주건설을 위하여 복무하게 해야 한다”라고 규정함으로써 동북지구에서의 우리민족 교육사업의 방향을 명시하였다. 그후 동북정무위원회에서는 건국전야에 이르기까지 4차에 걸쳐 동북해방구교육사업회의를 소집했고 “사립학교잠정방법”, ”중등교육에 대한 지시” 등 문건을 발부하였다. 하여 우리 민족의 교육사업은 생기있고 건전한 발전을 가져오게 되였다. 

민족언어문자로 교수하는 제도 확립 

1945년 9월, 최문호, 김유훈 등이 주최하는 “교육동맹”이 연길에서 결성되였다. 이들은 일제시기에 학교를 접수하고 원래 교원들과 지식인들을 초빙하여 연길시사법학교, 연길중학교, 공업학교, 광성중학교, 고려녀자중학교와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룡정에서는 장남섭, 주채와, 림룡호 등이 주최하는 “교육동맹”이 조직되였는데 동흥중학교, 대성중학교, 영신중학교, 은진중학교, 근화녀자중학교, 명신녀자중학교 등 중학교 및 소학교를 운영하였다. 

도문에서는 심인갑, 강상락 등 지식인들이 주최하는 “교육조사회”가 조직되였는데 이들은 괴뢰만주시기의 학교를 접수하고 중소학교를 운영하였다. 

조양천에서도 민주대동맹이 주최하는 “교육후원회”가 조직되였는데 이들에 의하여 중소학교가 운영되였다. 

해방전쟁시기의 해방구교육은 신민주주의 교육으로서 신민주주의 정치와 경제를 위하여 복무하였으며 해방전쟁과 해방구경제건설이 수요하는 혁명간부를 양성하고 인민군중의 계급각성과 문화수준을 제고하는것을 자체의 과업으로 삼았다. 이 과업을 실현하기 위하여 “간부교육은 군중교육보다 더 중요하며 성인교육은 아동교육보다 더 중요하다”, ”중등교육의 비중은 마땅히 사범교육을 제1위에 놓고 직업교육을 제2위에 놓으며 보통중학교 교육을 그 다음 자리에 놓아야 한다”는 학교운영방침을 제기하여 여러 류형의 간부학교와 단기강습반을 많이 운영하였다. 이것은 해방전쟁, 토지개혁, 정권건설에 시급히 수요되는 간부를 많이 양성하기 위하여 실시된 정책이였다. 

해방전쟁시기에 물력, 인력의 제한으로 정부에서는 많은 학교를 건립하고 운영할수 없어 “인민들이 동원되여 자체로 학교를 운영하며 정부에서 방조”하는 원칙을 제창하였다. 이것은 학교교육을 크게 발전시키는 정확한 시책이였다. 그리고 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의 실제적인 수요에 적응하기 위하여 학제, 과정 및 운영방법에서 여러가지 형식을 취하였다. 

해방후 조선민족은 자기의 언어문자를 사용하고 발전시킬 자유과 권리를 가지게 되였다. 이에 따라 연변에서는 자기 민족의 언어문자로 교수하는 제도를 확립하였다. 이것은 민족언어문자사용에서의 평등을 보장하는 공산당의 정책이 학교교육에서의 구현으로서 조선민족의 문화교육을 빠른 속도로 발전시킬수 있도록 조건을 마련하여주었다. 
1945년 11월 1일, 간도림시정부에서는 일제강점시기의 간도사범학교를 접수하고 개조하여 연길사범학교로 고쳤다. 1946년 8월 26일, 길림성정부의 결정에 의하여 사범학교는 길림성민주학원 교육학부로 되였다가 1948년 3월 급속히 발전하는 학교교육의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연변고급사범학교로 고쳐졌다. 이 학교에는 중학교 교원을 양성하는 고급사범학급이 설치되여있었다. 이 학교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창건전까지 1230면(중학교 교원 330여명, 소학교 교원 900명)에 달하는 교원을 양성하여 자기 민족 교원대오를 형성시켜주었다. 

낡은 교육사상을 개조 

학교의 학생성분도 큰 변화가 생겼는바 80%이상 학생이 로동자, 농민 가정출신이였는데 사범학교 학생과 농민간부반의 학생은 국가의 경비로 학습하게 되였다. 이리하여 빈부의 차이에 의하여 이루어진 교육불평등의 력사를 종말짓기 되였다. 

반면 지식인들에게 존재하는 노예사상, 봉건사상, 전통적관념은 신민주주의교육의 발전을 엄중히 저애하고있었다. 하여 당과 정부에서는 그들의 낡은 교육사상을 개조하고 로농병과 결합하고 로농병을 위해 복무하도록 이끌어주었다. 한편 학생들에게도 정치사상교양을 적극 진행하였다. 

1946년 7월부터 1947년 7월까지 연변지구에서는 중학교지도일군과 골간교원강습반을 설치하고 “신민주주의론”, “형세와 임무”, “중국근대사”, “중국공산당과 중국혁명”, “중국공산당의 민족정책”, “로해방구교육”, “학교교육을 개조하고 동학운동을 전개할데 관한 동북행정위원회의 지시” 등의 모택동저작과 교육문건을 학습하면서 사상개조운동을 진행하였다. 이번 운동을 통하여 교원들은 정치인식을 통일하고 토지개혁을 옹호하며 로농병속에 들어가 로농병을 위해 복무한다는 사상과 관점을 수립하게 되였다. 

1946년 9월, 중소학교교과서를 편집하고 심사하는 연변교육연구회가 결성되였다. 10월 13일에는 연길시 각 문학단체대표 40여명이 모여 “연길한글연구회”를 창립하였다. 11월 26일에는 “연길조선문교재편집위원회”가 창립되였는데 주임에 리호원, 부주임에 림민호가 당선되였다. 1947년 3월 드디여 교육출판사가 창립되여 조선문교과서를 정식 출판할수있게 되였다. 

해방초기에 교과서는 연변 각 학교에서 자체로 편찬하다보니 통일된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토지개혁과 계급투쟁을 반영한 글들을 많이 선택한 교과서가 처음으로 출판되자 각 학교에서는 그것을 통일적인 교과서로 사용하였으며 조선의 박상중이 쓴 초급중학교용 “조선어문법”을 보충교과서로 하였다. 

1948년 3월에는 소학교의 한글, 상식, 산수, 자연 등 교과서와 중학교의 한글교과서가 출판되였다. 이해에 50만책의 교과서를 출판하여 남만을 제외한 전 동북 조선인 중소학교에 공급하였다. 

1948년 6월 12일, 길림성교육청에서는 학교교육에서 문화지식과목을 위주로 가르쳐야 한다는 방침을 제기하였다. 

고급인재 양성 위해 

연변에 공립중학교가 9개소, 민영중학교가 19개소(그중 고중학급을 설립한 학교가 3개소, 고중을 증설한 학교가 2개소)가 있었는데 교원은 409명, 학생은 1만813명이나 되였다. 학생들의 사상의식은 뚜렷이 높았으나 문화지식수준은 매우 낮았다. 하여 학생들에 대한 정치사상교육을 강화하면서 문화지식전수를 위주로 하여야 한다는 새로운 과업을 제기하엿다. 학교들에서는 이 과업을 실현하기 새 과정안을 작성하였다. 

동북국에서 배치한 일반중학교의 각 과목이 차지하는 비례는 문화지식과목 90%, 정치과목 10%, 사범학교는 문화지식과목 70~75%, 정치과목 10%, 실무과목 15~20%였다. 학과목의 성격과 목적에 대해 처음으로 통일적인 요구를 제기한것이였다. 

조선인중학생들에게 진학의 길을 열어주는것이 또 하나의 주요한 문제로 제기되였다. 1948년 3월의 통계에 의하면 연변의 소학생은 도합 18만 7236명이였고 졸업생은 3638명이였으며 다음해에는 졸업생이 5645명으로 늘어나게 될 형편이였다. 그러나 연변적으로 고중생을 400명좌우 밖에 모집하지 않았다. 이러한 형편에서 1950년 3월, 룡정에 연변고급중학교를 설립하고 각 현 중학교의 고중학급을 연변고급중학교에 귀속시켰다. 

연변의 749개 농촌마을에 13만 700여호 농가가 있었는데 매개 마을에 중학생이 평균 15명있었다. 이것은 매12호에 1명 중학생이 있은셈이다. 연변 80만 인구가운데서 학생이 1.4%를 차지하였다. 일제 강점시기에 비하면 학교는 150개소, 학급은 660개, 학생은 1만500명, 교원과 직원은 761명이 더 늘어났다. 길림성에 중학교가 도합 41개소가 있었는데 연변에 26개소가 있었다. 

해방을 맞이한 조선민족 앞에는 정치, 경제, 문화, 교육 등 각 부문의 발전을 위하여 필요되는 전문인재, 고급인재들을 양성하여야 할 력사적과업이 나섰다. 

1945년 9월, 룡정에 룡정의과대학이 창립되엿고 1945년말에는 길동군정대학이 창설되였다. 1946년 9월에는 연길에 길림성립민주학원이 건립되였고 1948년 4월에는 연변정치간부학교가 건립되였다. 1949년 3월 20일, 연길에 드디여 우리 나라에서 첫 소수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창립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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