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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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3-16 12:35|본문
북경에서 있은 국경1주년 경축공연에서의 연변문공단의 합창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났다”
교육 문화 예술의 주인으로.3
신문 창간 출판물 간행해 공산당 로선 방침 정책 선전
예술일군들 국경 1주년 북경서 공연 관중들의 절찬을
도서간행물출판사업
1945년 8월, 쏘련홍군과 항일련군이 연변에 진주하자 괴뢰만주국의 간도성공서와 모든 기관들이 재빨리 와해되여 연변 여러 민족 인민들은 일본침략자들의 기반밑에서 해방되였다. 우리 민족은 이미 연변에 뿌리깊은 전통과 유구한 력사를 구축해놓았다. 많은 선진인물과 지식인들은 해방을 맞은 그날부터 신문을 창간하고 출판물을 간행하였다. 신문과 간행물은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고 중국공산당의 로선, 방침, 정책을 선전하는 도구로 되였다.
1945년 11월, “길동활혈문헌사(吉東頁文獻社)”에서 “위대한 사회주의10월혁명”이란 책을 출판하였다. 1946년에 들어서서는 연변등사사, 조선의용군 제5지대 정치부, 룡정청년회, 도문중쏘문화협회 출판부, 연변사범학교, 길림성 조선인민주련맹, 연변문화사, 청구재출판사, 연변출판사, 길동출판사 등 많은 기관, 단체들에서 “쏘련집단농장의 이야기”, “쏘베트공청의 생활” 등 과 같은 세계의 첫 사회주의국가를 소개하는 도서와 “공산주의원리”, “가치 가격과 리윤”, “공산주의란 무엇인가?” 등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는 도서 그리고 “팔로군”, “국민당과 공산당”, “련합정부를 론함” 등과 같은 중국공산당과 팔로군을 소개하는 도서들을 출판하였다.
1947년 3월, 전문편집출판기구인 연변교육출판사가 창립되였으나 출판사는 조선문 중소학교 교과서를 주로 출판하는 기구였기에 화룡중쏘문화협회, 연길중쏘우호협회, 룡정중학교 생산합작출판부, 룡정인민학원인쇄부, 청년문고출판사, 연길시한글학회, 왕청인민민주대동맹, 소식보사, 시사순보사, 길동군구정치부 인쇄공장, 민주출판사, 대중출판사, 인민일보사, 길림일보사, 연변일보사, 동북조선인민보사 등 많은 기관, 단체들에서 계속 일반도서를 출판하였다. 이때 출판된 서적들로는 “사회주의발전사”, “새 인생관”, “사회과학개론”, “공상으로부터 과학에로의 사회주의의 발전”, “공산당선언”, “중국공산당간사”, “삼풍(三風)”, “사상지남”, “대중철학”, “쏘련공산당(볼)력사 간략독본”, “쓰딸린략전”과 같은 사회과학서적과 “대중가요집”, “현대소설의 구성”, “태풍”, “북륙의 서정”과 같은 문예서적들 그리고 “한글맞춤법통일안”, “조선어문법”과 같은 어학서적들이 있었다. 1945년부터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될 때까지 연변에서 조선말도서를 무려 173종을 출판하였다.
동북조선인민보사는 일반도서를 전문 출판하는 편집기구인 출판과와 인쇄기구인 동북조선인민보 제2인쇄공장, 도서발행기구인 동북조선인민서점을 가지고 있다.
잡지출판사업도 활발히 전개되였다. 1945년말, 연길시청년회에서 월간잡지 “이스크라”를 간행하였고 뒤이어 또 번역문을 주로 싣는 종합성간행물 “신건설”을 출판하였다. 1947년에는 길림성조선인민주련맹에서 대형종합잡지 “민주”를 간행하였고 1948년에 토지개혁이 일단락 끝난 뒤 대중잡지사에서 월간잡지 “대중”을 간행하였다. 1949년에는 동북조선인민보사에서 선후하여 종합잡지 “문화”, 농민잡지 “농민의 기쁨”, 소년잡지 “소년아동”을 간행하였고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교육잡지 “교육통신”을 간행하였다. 종합잡지 “문화”는 일정한 편폭으로 문학작품을 실었는데 이 잡지의 주요책임자는 리성휘이며 후에 리홍규가 주필을 맡았다. 이 잡지는 지금의 “연변문학”의 전신이다.
연변교육출판사 창립
1948년 2월 8일부터 12일까지 길림성교육청 청장 려량의 사회하에 연길시1중에서 길림성해방구중한(中韓)교육회가 열리였다. 뒤이어 2월 13일, 리호원, 박근식, 황범식, 박재한, 로승균, 강근모 등의 발기로 조선민족중학교의 대표 20여명이 연길시2중에 모여 조선문교재편찬문제를 둘러싸고 좌담하였다. 이 모임에서 길림성 민주련맹 책임자 량환준에게 교육출판사 창립준비사업을 위임하였다. 단시간의 준비를 거쳐 1947년 3월 24일, 전국에서 첫 번째 민족출판사인 연변교육출판사가 창립되여 정식으로 간판을 내걸었다. 출판사의 취지를 “동북조선민족의 문화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하여 조선문 교재, 잡지와 기타 도서를 출판하는것”이였다.
연변교육출판사는 초기에 길림성교육청의 지도를 받았고 출판사내에 관리위원회를 두었는데 량환준이 총책임을 맡고 안변기가 경리를 맡았다. 교과서는 연길시 중앙소학교와 2중 교원들이 보수도 없이 편찬하였고 인쇄는 연길, 룡정, 도문, 왕청 등지의 작은 인쇄소에 맡겼으며 자금은 여러 학교로부터 1263만원(당시의 동북화페)의 류통권을 얻었고 그후 1948년에 길림성교육청으로부터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그런데 물가가 날마다 올라가는 바람에 초봄에 받은 교과서예약금으로 종이를 사서 교과서를 출파하고나면 적지 않은 결손을 보는 문제가 나타났다. 교과서주문부수가 늘어날수록 결손이 그만큼 증가되였다. 하여 출판사에서는 연변전원공서의 동의를 얻고 학부모들에게 예약금 대신 예약미(입쌀)를 받기로 하였다. 그후부터 조선인이 살고있는 부근의 기차역마다에는 교육출판사로 보내오는 쌀이 산더미를 이루게 되었다.
이 쌀로 종이공장과 종이를 바꿀 타산이였기에 교육출판사지도부에서는 연변전원공서를 거쳐 동북국 선전부에 가 정황을 회보한후 소개신을 석현종이공장에 떼줄 것을 요구하였다. 석현종이공장에서는 쌀보다 광목이 수요된다고 하였다. 하여 출판사에서는 동북림시행정위원회상업국을 찾아가 쌀만큼 광목을 줄 것을 요구했다. 그 광목으로 종이문제를 해결했으며 그해 동북화페 160여억원의 수입을 얻어 재정기초를 닦아놓았다.
1948년 7월, 연변전원공서 전원 림춘추는 출판사종업원대회에서 연변전원공서 문교과장이였던 량정봉을 연변교육출판사 겸임주임으로, 량환준을 실무부주임으로 임명한다고 선포하였다. 1948년 4월 1일부터 1년사이에 편집출판인원이 60여명으로 늘어났다.
1948년 6월부터 연변교육출판사에서는 자기의 직속인쇄공장을 경영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대중서점을 넘겨받고 발행사업을 하게 되었다. 하여 출판, 인쇄, 발행 등 부문을 초보적으로 갖춘 기업체로 되었으며 1947년말부터는 종업원이 162명에 달하는 지방국영단위로 되었다. 사내에는 사부, 편집부, 경리부(서점 포함), 공무부를 두고있었다.
1947년에는 학교교원을 조직하여 소학교와 초중의 한글, 정치상식, 력사(조선력사) 교과서를 편찬출판하였는데 그쳤으나 1948년부터는 소학교의 산수, 자연, 지리(조선지리, 동북지리) 교과서를 더 편찬출판하였으며 1949년에는 초중의 중어, 대수, 기하, 물리, 화학, 식물, 동물, 생리, 광물 교과서까지 편찬출판하여 조선소학교와 초중 각 과목의 교과서를 거의 다 편찬출판하였으며 7개 과목의 고중교과서도 편찬출판하였다. 이런 교과서들은 1948년부터 동북 각 해방구 조선중학교에 공급되였다.
연변가무단 창립
연변가무단의 전신은 1944년 6월 진찰기변구에서 건립된 화북조선의용군과 정치간부학교구락부다. 이 구락부를 1945년초에 조선의용군화북지대 선전대라고 이름을 고쳤다.
1945년 가을, 료녕성 대석교에서 부대를 재편성할 때 선전대의 골간들을 제5지대 선전대에 편입시켰다. 1946년 8월, 제5지대 선전대는 지방의 “이스크라”극단, 룡정예술단의 부분적배우들과 합병하여 길동보안군 정치부 문예공작대라고 하였으며 1946년 9월에는 연길에 온 길림군구 중국인 선전대와 합하여 길림군구 정치부 문공단 제2대대로 편성되였다.
1947년 2월, 길림군구 정치부 문공단 제2대대는 룡정에서 안도의 “5.1”선전대와 합병하여 길동군분구 정치부 선전대라고 하였다. 1947년 12월, 선전대는 연변전원공서로 넘어와 단기간의 준비사업을 거쳐 1948년 3월 16일, 연변지구 전원공서 민족사무처 문공단을 건립하고 연변문공단이라고 략칭하였다.
1949년 2월, 흑룡강성 할빈동북민족사무처문공단의 부분적배우들을 받아들인후 연변문예공작단이라고 하였고 1950년 1월, 정식 연변가무단이라고 개칭하였는데 그때 인원은 97명이였다. 연변가무단은 몇 명의 중국인을 제외하고는 거의다 조선인으로 구성되였다.
연변가무단은 건립초기에는 경기병이 되어 연변지구에서 선전활동을 벌렸으며 1950년, 국경 1주년에는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공연하여 모택동주석과 중공중앙 지도자들의 절찬을 받기고 했다. 모택동은 연변가무단을 비롯한 소수민족예술인들의 공연을 보고 유명한 완계사 “류아자선생에게 회답함”이란 사를 짓기도 했다.
음악창작에서는 해방직후 허세록, 박우, 동희철 등 작곡가들이 “새 아리랑”, “베짜기노래”, “주구청산기” 등 대중적가요를 창작하였고 1947년에 연변교육출판사에서 38수를 묶어 처음 “대중가요집”을 출판했다. 건국후 “중화인민공화국경축의 노래”, “대생산의 노래” 등을 창작공연하였고 1950년 건국 1주년에 북경 중남해 회인당에서 선보인 “영용한 조선인민은 일떠섰다”, “새 아리랑”, “베짜기노래” 등은 중공중앙지도자들이 관람하였고 또한 중앙신문영화촬영소에서 기록영화로 찍어 전국에 방송하였다.
저명한 작곡가 허세록은 40여년동안 “베짜기노래”, “고향생각” 등 150여수의 가곡에 30여부의 기악곡을 창작한 음악가로서 특히 대중가요창작에 성과가 크다. 김성민은 연변가무단에서 배우, 작곡, 부단장 등으로 있으면서 40여년동안 400여수이 가곡, 무용곡, 기악곡을 창작하였다. 그는 민족적감정이 짙은 조선민족신민가의 창작에 정력을 몰부어왔다. 그가 창작한 “자치주창립경축의 노래”는 지금도 널리 애창되고 있다. 관악 “축첩행진곡”은 1947년 허세록이 작곡한것인데 당시 길림성의 관현악대에서는 서로 다투어 연주하였다.
연변가무단에서는 가극, 신창극 창작에서도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48년 차창준, 홍성도 등이 가극 “승리에로 전진”을 창작하였으며 1950년에는 김우순, 김인해가 2막 2장의 가극 “혁명을 끝까지 진행하자”를 창작하였다.
1951년부터 연변가무단에서는 창작일군들을 각 현에 내려보내여 민족민간무용을 발굴하고 계승하기 시작하였다. 가무단에서는 연길현의 민간예술인 양창윤을 요청하여 “농악무”와 “부채춤”을 배웠다. 가무단에서는 민간예술을 발굴하고 수집하여 “농악무”, “승무”, “사모무”, “활춤”, “칼춤” 등 몇십종을 정리하였는데 그중 “농악무”와 “장고춤”이 가장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농악무”는 1951년 8월 15일에 연변중쏘우호협회구락부에서 첫 공연을 하여 관중들의 절찬을 받았고 “농악무”를 전수한 하태일은 우수배우상을 받았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