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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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3-04 14:05|본문
시인 윤동주 묘소에서의 가족들. 묘비 오른쪽 여성 윤혜원여사.
연변이 낳은 불멸의 시성 윤동주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 가면서
절대적 량심에 가닿으려도 끝임없이 분투한 시인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은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윤동주의 유명한 “서시”이다. 이 시로하여, 아니 이 시와 견줄만한 “별 헤는 밤”, “자화상”... 등 유명한 시로 하여 윤동주는 이미 조선문자를 알고있는 사람이면 거의 다 아는 시인으로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세계가 윤동주에게 눈길을 쏟고 있다. 일본의 명문대학인 와세다대학교의 교수 오오무라선생은 윤동주의 시작(詩作)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그에 대한 아무런 예비지식이 없이도 누구나 감동할만큼 탁월하다. 쉬운 표현, 잘리해할수 있는 시어의 구사, 동요와 동시적인데다가 문학적향기가 짙은 그의 시속에는 그의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이 그대로 녹아들고 스며들어있다. 특히 내가 좋아하는 “서시”, “자화상”, “별헤는 밤”같은 시는 세계적인 명시라고 나는 본다.
7월 6일(2005년), 기자가 윤동주선양사업일환으로 연길에 와 잠시 거주하고있는 윤동주의 친녀동생 윤혜원(尹惠媛)녀사의 저택을 찾아갔을 때 윤여사의 부군 오형범(오스트리아에 적을 두고있음)선생은 수두룩한 자료들을 내여보이는 가운데 윤동주가 9개월간 다닌적있는 일본 동지사대학교 교정에 세운 “윤동주시비”제박식자료를 손짚어주었다.
사진으로 보는것이였지만 비문에 새겨진 글들이 분명히 알렸다. 비문정면에는 윤동주의 친필 서시와 일어로 번역된것이 세겨져있고 뒷면에는 오오무라교수의 비문이 씌여져있었다.
尹東柱詩碑
윤동주는 코리아의 민족시인이자 독실한 크리스천시인이기도 하다. 그는 1917년 12월 30일에 북간도의 화룡현 명동촌에서 태여났는데 그가 처음으로 시를 쓰기 시작한것은 용정에 있는 은진중학교에 재학중인 1931년경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본격적으로 시작에 손을 댄 것은 평양의 숭실중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의 연회전문학교(지금의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다음부터이다. 연회전문학교를 졸업한 윤동주는 1942년에 도일하여 도시샤대학의 문학부에 입학한다. 그는 도시샤대학에 재학중이던 1943년 7월 14일에 한글로 시를 쓰고있었다는 리유로 독립운동의 협의를 입어 체포되었다. 재판결과 그는 치안유치법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1945년 2월 16일에 옥사했다. 이 시비는 도시샤교우회 코리아클럽의 발의에 의해 그의 영면 50돌인 1995년 2월 16일에 건립, 제막되었다. 한글로 된 서시는 그의 친필원고 그대로이며 일본어번역은 이부키고씨의것이다.
학교범인도시샤
부정의 현실을 순정의 자아만으로 응전해 가면서 절대적량심에 가닿으려고 끝임없이 채찍을 들던 윤동주는 그를 죽음에로 몰아넣은 일본에서까지 그 시비가 세워지게 된것이다. 이러한 윤동주는 바로 연변이 낳은 아들이다.
연변의 아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음력 11월 7일), 위만주국 간도성 화룡현 명동촌에서 본관 파평인 윤영석(尹永錫)씨와 독립운동가이며 교육가인 규암 김약연(金躍淵)선생의 누이 김룡(金龍)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때 명동촌은 김약연 등 선각자들에 의해 이미 민족의 혼을 깨우쳐주는 교육운동의 보금자리로 되고있었다. 1925년에 윤동주는 그 유명한 명동학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하게 된다. 10세까지 해환이라 불리웠으며 그 밑이 달환이고 그 밑으로 어린 나이에 죽은 동생 이름이 별환이였다. 해, 달, 별을 뜻하고있는 이들의 이름에서 윤동주가 많은 시작을 창출했다고 어떤 학자들은 력설하기도 한다.
《윤동주평전》의 작가 송우혜(한국)선생은 윤동주의 어린시절을 이렇게 서술하고있다.
윤동주가 두 살이던 1919년에 그 땅에서 독립운동의 거대한 봉화가 타올라 독립만세운동과 항일무장투쟁이 진행되였고 1920년에는 우리 민족의 대일무력항전사에서 빛나는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가 그 땅에서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은 집요하고 거세게 지속되였다. 그가 15세의 소년으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 해인 1931년에 일본은 드디여 만주사변을 일으켜서 만주를 손에 넣었고 이듬해인 1932년에 그 땅에 “만주국”이란 이름의 괴뢰국을 세워 사실상 만주전체를 일본판도에 넣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때로부터 만주국의 국민이 되었다.
윤혜원녀사의 회억에 따르면 소녀시기의 윤동주는 내성적인 인상이였지만 의연함과 씩씩함을 지닌 젊은이였다.
“오빠는 참 멋쟁이였습니다. 교복이 노란색이였는데 맞지 않으면 재봉틀로 스스로 고쳐입었습니다. 그보다도 항상 책속에 파묻혀있는 모습이 더 멋있었습니다. 오빠의 방 책상엔 언제나 아주 많은 책이 꽂혀있었는데 벌써부터 창작을 한거지요. 항상 등사기로 뭔가를 등사했는데 난 멋모르고 옆에서 등사되여나오는 종이를 받아주군 했습니다.”
윤혜원녀사는 연변억양이 다분한 말씨로 이렇게 말하면서 윤동주와 함께 지냈던 어린시절을 떠올린다.
“우린 여섯 살 터울이였는데 지금도 잠자리랑 잡아주던 모습이 눈앞에 선합니다.”
동생들을 특별히 사랑했던 윤동주는 항상 동생들을 앞에 세워놓고 노래를 배워주기도 하고 이야기를 진지하게 들려주기도 했다면서 윤녀사는 말한다.
1931년 3월, 명동소학교를 졸업한후 윤동주는 5킬로메터 동쪽에 있는 대립자(지신)의 한족학교에 편입하여 1년간 더 다니다 졸업했다. 그의 시 “별헤는 밤”에서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소녀들의 이름은 아마 이때의 만남이였을것이다. 대립자소학교를 맞힌 윤동주는 룡정의 은진중학교에 입학한다. 윤동주가 룡정에 가게 되자 일가는 아예 룡정으로 이사해버린다.
룡정에 자리잡은 곳은 룡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그때의 윤동주의 취미는 다방면적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내느라고 등사 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2학년때에는 웅변대회에서 1등한적도 있다. 그는 수학도 자러했으며 특히 기하학을 좋아했다.
동급생이자 고종사촌인 송몽규가 북경으로 떠나고 문익환이 평양 숭실중학에 가자 윤동주는 부모님을 설득하여 1935년 9월, 평양 숭실중학교에 옮겨앉게 된다. 그러나 신사참배문제로 숭실중학교가 페교되자 룡정으로 다시 돌아와 일본인이 경영하던 광명학원 중학부 4학년에 편입된다. 이 무렵 연길에서 발행되던 “카톨릭소년”지에 동주(童舟)라는 필명으로 “병아리”, “비자루”, “거짓부리” 등 동요동시를 발표한 것이다.
연희전문학교시절
중학교졸업반이 되자 윤동주는 진학문제로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된다. 자신의 뜻과는 달리 아버지가 의과대학지망을 권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문학에의 굳은 신념을 지녀버린 윤동주는 자기 고집을 꺾을수가 없었던 것이다. 끝내는 단식투쟁까지 벌리는 극한 대립을 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수 없었다. 밥을 굶으면서까지 뜻을 굽히지 않는 손주를 보다못해 할아버지가 나서서 윤동주의 편을 들어주었고 외삼촌인 김약연선생까지도 도와주어서야 윤동주의 뜻은 펴질수 있었다. 하여 1938년 4월 9일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청운의 뜻을 품고 연희전문학교에 들어서면서 3년간의 서울학창생활이 시작된다.
고향인 연변을 떠나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입학하면서 윤동주는 세계문학과 접하게 되며 훌륭한 스승들에 의한 학문이 세계 그리고 민족의식의 드높은 고취를 받아안게 된다.
윤동주는 저녁밥을 먹고나면 교내 잔디우를 뒹굴고 친구들과 나직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나누면서 때론 밤을 새우면서 별을 세기도 하였다. 맑은 하늘에 총총히 떠있는 별을 동무삼아 끝없는 이야기를 펼치는것이였다. 윤동주의 관심분야는 력사, 문화 그리고 문학, 미술, 음악에 걸쳐 다방면적이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터지자 모든 상황이 바뀌여버렸다. 많은 사람들이 전장으로 끌려가고 전쟁물자 수급을 위한 착취의 손길이 사처에 뻗치면서 연희전문학교도 영향을 피치못했다. 졸업이 코앞에 다닿자 윤동주의 생각은 무척 복잡해졌다. 진학, 시국에 대한 불안 등은 윤동주를 무척 괴롭혔다. 윤동주의 년보를 보면 1941년 5월이후 대표작이라 할 많은 작품들이 씌여져있다. “새벽이 올 때까지”는 5월에, “십자가”, “태초의 아침”, “또 태초의 아침”, “눈 감고 간다” 등은 5월 31일에, “돌아와 보는 밤”, “바람이 불어”는 6월에, “또 다른 고향”, “길”은 9월에, “별 혜는 밤”, “서시”, “간(肝)” 등은 11월에 창작되고있었다.
이 무렵 윤동주는 퍽 신중하고 과묵한 성품으로 독서에만 몰두하였으며 국내외 많은 문인들에 심취해있었다. 그런 사람들로는 정지용, 김영랑, 백석, 리상, 서정주, 발레리, 앙드레 지드, 보들레르, 프랑시스 쟘, 라언 마리아 릴케, 장 콕토 등이였다. 본격적인 문학수업이 닦아지면서 터쳐버린 독서열은 막을수 없었다. 독서와 더불어 그는 창작의 붓을 시들게 하지 않았다. 떠오르는 시상을 며칠 몇주일씩 묵혀가면서 갈고 다듬어 완전한 작품이 이루어졌을 때에야 필을 들어 써내려갔다. 때문에 그의 작품은 다시 손대는 일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연희전문학교졸업을 앞두고 윤동주는 무언가 뜻깊은 것을 만들어 자신의 졸업을 기면하려 했다. 그래서 만든 것이 자필시집이였다. 그것은 77부 한정판으로 출간하기 위한것이였다. 이 시집은 19편으로 묶어졌는데 1941년 11월 5일자로 “별 헤는 밤”이 마지막 작품으로 되어있었고 시집이 서문을 대신하여 쓴 “서시”가 11월 20일자로 되어있었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3부로 만든후 연희전문 영문과 교수였던 리영하선생과 후배였던 정병욱군 그리고 자신이 나누어가졌다. 시집제목은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고 된 비교적 긴 제목이였다. 윤동주는 이 시집을 정병옥에게 주면서 시집의 제목이 길어진리유를 이렇게 밝혔다.
“‘서시’가 되기전에는 시집이름을 ‘병원’이라고 볼일가 했네. 지금 세상은 온통 환자투성이 아닌가?” 그러면서 표지에 연필로 “병원”이라고 써넣어주었다.
이 시집을 받아본 리영하교수는 “슬픈 족속”, “십자가” 등 작품이 검열을 통과하기 힘들터이니 출판을 보류하고 때를 기다리라는 충고를 주었다. 일본류학을 앞둔 윤동주의 신변을 걱정해서였다.
후에 윤동주자신이 가졌던것과 리영하교수가 가졌던 시집은 행방이 묘연해지고 정병욱이 가졌던 시집이 어머니 장롱속에 깊숙이 감춰졌다가 결국 광복후 한국의 정음사에 의해 볕을 보게 된것이다.
윤동주가 검거된 반년후 나는 소위 학도병으로 끌려가게 되었다. 피차에 생사를 알수 없게 된 마당에 이르러 나는 윤동주의 시고를 나의 어머님께 맡기며 나나 윤동주가 살아서 돌아올 때까지 소중히 간직하여 주십사하고 부탁하였다. 그리고 윤동주나 내가 다 죽고 돌아오지 않더라도 조국이 독립되거든 이것을 연회전문학교로 보내여 세상에 알리도록 해달라고 유언처럼 남겨놓고 떠났었다. 다행히 목숨을 보존하여 무사히 집으로 돌아가자 어머님은 명주보자기로 겹겹이 싸서 간직해두었던 윤동주의 시고를 자랑스레 내주면서 기뻐하셨다.
《윤동주》(이건청 저, 건국대학교출판사)에 수록된 정병욱의 회고록이다.
후꾸오까형무소의 이슬 되었어도
1942년 26세의 윤동주는 드디여 일본에 건너가 도꾜 릿교대학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식민지인의 굴욕을 안고 지배국에 건너가 학문을 탐구한다는 것은 고통이였으며 끝없는 자책과 죄스러운 마음에 시달리는 일상이였다. 그러한 일상속에서도 창작의 붓을 놓지 않았는바 “쉽게 씌여진 시” 등이 이때에 창작되였다.
아울러 일제가 지펴놓은 태평양전쟁의 불길은 미국의 대대적인 반격으로 한층 격화되였고 부상자와 주검이 실린 차들이 꼬리를 물고 일본으로 들이닥치는통에 일본판도는 온통 불안속에 잠기였다. 다급해난 일제는 조선반도에서 징병제도와 학도병제도를 실시하여 40여만명 조선청년들을 전쟁의 희생물로 내몰았다. 그 광란적인 시국에 시작된 윤동주의 류학생활은 자연 고독과 외로움을 동반할 수밖에 없었다.
1942년 여름, 연변에 돌아온 윤동주는 “앞으로 우리 말 인쇄들이 모두 사라질터이니 무엇이든, 심지어 악보까지도 사서 모으라”고 당부하였다고 한다. 그만큼 시대적상황을 절박하게 느꼈는데 결과적으로는 윤동주의 예언이 적절히 맞아떨어진 것이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윤동주는 도시샤대학 영문과로 전학, 디케다 아파트에 하숙을 정했다. 그는 변함없이 독서에 열중하면서 시창작을 정진시켰다. 륙첩다다미방에서 밤가는줄 모르고 추위를 이겨내면서 시를 쓰는 일이 그때의 윤동주의 일상이였다.
윤동주는 1942년 겨울방학에 집에 오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인 1943년 7월 14일, 도시샤대학에서 첫 학기를 마치고 고종사촌 송몽규와 함께 귀향길에 오르게 되었는데 떠나기 직전 “교도조선인학생민족주의구룹사건”에 련루되여 갑자기 체포되였다. 뒤늦게 공개된 일본경찰의 사상범을 다룬 극비문서 “특별월보”에 따르면 일본경찰의 윤동주에 대한 조사기록은 “요시찰인물”로 주목받고있던 송몽규가 독립운동을 위한 비밀결사의 중심인물이고 윤동주는 그에 동조한 것으로 되어있었다. 결국 두사람은 12월 6일 검사국에 넘겨졌고 해를 넘겨 1944년 2월 22일에 기소되였다. 재판은 분리 진행되였으며 3월 4일, 윤동주는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일본경도재판소에서 윤동주에게 내려진 판결문은 다음과 같다.
판결
본적: 조선 함경북도 청진부 포항정 76번지
주소: 경도시 좌경구 전중고원정 27번지 무전차파트 내 사립 동지사대 문학부 선
과 학생
윤동주
1917년(대정 7년) 12월 30일 생
우자에 대한 치안유지법 위반 피고 사건에 관하여 당 재판소는 검사 강도 효(江島 孝)관여로 심리를 마치고 판결함이 좌와 같다.
주문
피고인을 징역 2년에 처한다.
판결 구류일수 중 120일을 우 본형에 삽입한다.
판결 구류일수 중 120일을 우 본형에 삽입한다.
리유
피고인은 만주국 간도성에 있는 반도 출신 중농의 가정에서 태여나 그곳의 중학교를 거쳐 경성 소재 사립 연회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1942년(소화 17년) 3월 내지에 도래한 후 한때 동경 릿교대학 문학부 선과에 재학하였으나 동년 10월 이후 경도 동지사대 문학부 선과에 옮겨 현재에 이른 자로서 어릴 때부터 민족적학교 교육을 받아 사상적 문학서적 등을 탐독함과 교우의 감화 등에 의하여 일찍이 치열한 민족의식을 품고있었는데 성장하여 내선간의 소위 차별문제에 대하여 깊은 원차(怨嗟)의 마음을 품는 한편 아 조선통치의 방침을 보고 조선고유의 민족문화를 전멸하고 조선민족의 멸망을 도모하느것리라고 여긴 결과, 이에 조선민족을 해방하고 그 번영을 초래하기 위하여서는 조선으로 하여금 제국 통치권의 지배로부터 이탈시켜 독립국가를 건설할 수 밖에 없으며, 이를 위하여서는 조선민족의 현시에 있어서의 실력 또는 과거에 있어서의 독립운동실패의 자취를 반성하고 당면 조선인의 실력, 민족성을 향상하여 독립운동의 소지를 배양하도록 일반 대중의 문화앙양 및 민족의식의 유발에 힘쓰지 않으면 안된다고 결의하기에 이르렀으며, 특히 대동아전쟁 발발에 직면하자 과학력에 열세한 일본의 패전을 몽상하고 그 기회를 타고 조선독립의 야망을 실현할수 있으리라고 망신하여 더욱 더 그 결의를 굳히고 그 목적달성을 위하여 동지사대학에 전학후 이미 같은 의도를 품고있던 경도제국대학 문학부 학생 송몽규와 자주 히합하여 상호 독립의식의 앙양을 꾀한 외에 선인 학생 송원휘중(松原揮忠), 장성언(張聖彦) 등에 대하여 그 민족의식의 유발에 전념하여왔는데 그 중에서도...(이하 략)
우의 재판기록에 서술된 소위 윤동주의 범법행위란 피식민상태의 량심있는 젊은이로서 마땅히 서야 할 자리에 서기 위한 당연한 자기발현임에도 불구하고 윤동주는 막연하고 악랄하기 그지없는 일제의 법에 의해 처벌된 것이다. 결국 윤동주는 후꾸오까형무소에 송치되여 비인간적인 옥고를 치러야 했다. 그러다가 민족해방의 날을 6개월 앞둔 1945년 2월 16일, 29세의 아까운 나이로 생애의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사인(死因)에 대하여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라는 것이 주되는 주장이다.
“2월 16일 윤동주 사망, 시체 가져가라”는 전보를 받고 부친 윤영석과 당숙 윤영춘이 일본으로 건너간후 후꾸오까에 도착하자 우선 송몽규부터 면회하였는데 송몽규는 주사를 맞는 행렬에 섰다가 나와서 눈물을 흘렸고 일본인 간수가 “윤동주선생은 무슨 뜻인지 모르나 큰소리를 외치고 운명했습니다”라고 전해주었다.
한줌의 재로 변하여 윤동주의 유해가 돌아오는 날, 그의 혈육들은 두만강변 조선의 상삼봉역까지 마중을 갔다.
장례는 3월초순,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에 치러졌다. 집앞 뜰에서 거행된 장례식에서는 연희전문학교졸업 무렵 교내잡지 “문우”에 발표되였던 “자화상”과 “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장지는 룡정동산이였다. 연변은 4월초에나 겨우 해토되는 까닭에 5월의 따스한 날을 기다려 가족들은 윤동주의 묘에 떼를 입히고 꽃을 심었다. 단오 무렵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서둘러 “시인 윤동주지묘”라는 목비를 해세웠다. 김관석씨가 한문(漢文)으로 비문을 작성하여 비의 디에 새겨넣었는데 조선문식으로 훈독하면 아래와 같다.
아, 고 시인 윤군 동주는 본관이 파평이다. 어릴 때 명동소학교를 졸업하고 다시 화룡현립 제1교 고등과에 들어가 배웠고 룡정은진중학에서 3년을 배운 뒤 평양 숭실중학에 전학하여 학업을 쌓으면서 1년을 보냈다. 다시 룡정에 돌아와 마침내 우수한 성적으로 광명학원 중학부를 졸업하고 1938년 서울 연희전문학교 문과에 진학하여 4년 겨울을 보내고 졸업했다. 공부 이미 이루었어도 그뜻 오히려 남아서 다음해 4월에 책을 짊어지고 일본으로 건너가 경도 동지사대학부에서 진리를 갈고 닦았다. 그러나 어찌 뜻하였으랴. 배움의 바다에 파도 일어 몸이 자유를 잃으면서 배움에 힘쓰던 생활 변하여 조롱에 갇힌 새의 처지가 되었고 거기에 병까지 더하여 1945년 2월 16일에 운명하니 그때 나이 스물아홉, 그 재질 가히 당세에 쓰일만 하여 시로써 장차 사회에 울려퍼질만했는데 춘풍이 무정하여 꽃이 피고도 열매을 맺지 못하니 아아 아깝도다. 그는 하연장로의 손자이며 영석선생의 아들로서 영민하고 배우기를 즐긴데다 신시를 지어 작품이 많았으니 그 필명을 동주라 했다.
1945년 6월 14일
해사 김석관 짓고 쓰다
아우 일주, 광주 삼가 세우다.
이렇게 되어 고향에 돌아온 윤동주에게 가족들이 처음으로 시인이라는 호칭을 붙여준 것이다.
불멸의 시인
윤동주의 첫 시집“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간행되여나온 것은 1948년이다. 애초에 77부 한정판으로 연희전문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것이 7년이나 지나 비로소 해빛을 본 것이다. 이 시집의 서문을 정지용이 썼다.
무시무시한 고독에서 죽었고나! 29세가 되도록 시도 발표하여 본적이 없이!
일제 시대에 날뛰던 부일문사(附日文士) 놈들의 글이 다시 보아 침을 배알을 것뿐이나, 무명 윤동주가 부끄럽지 않고 아름답기 한이 없는 시를 남기지 않았나?
시와 시인은 원래 이러한 것이다...
정지용이 쓴 서문의 일부다.
서울에서 윤동주의 시집을 출판하련다는 소식과 함께 있는 시고들을 다 가지고 오라는 기별이 윤일주로부터 전해오자 윤혜원녀사와 오형범씨는 윤동주가 연희전문하교에 다닐 때 집에 가져다 두었던 세권의 습작노트와 수많은 스크랩과 사진을 챙겨갖고 서울을 바라고 떠났다.
때는 남북대결이 첨예한 시기라 시국이 몹시 험악했다. 렬차에서는 사람마다 샅샅이 검사하면서 의심스럽기만 하면 잡아가두거나 물건들을 마구 압수 하였다. 윤혜원부부는 룡정을 떠날 때 짐군을 삭내여 스크랩과 사진이 든 보따리를 맡겼다. 그때를 오형범선생은 이렇게 회상한다.
“그런데 그 짐군이 차칸수색이 시작되자 겁을 잔뜩 집어먹고 화장실에 피신해 들어갔다가 아예 창문으로 수크랩과 사진이 들어있는 보따리를 밖으로 던져버리고말았잖고 뭡니까. 정말 안타까운 일이였어요. 지금 윤동주의 사진이 많이 남아있지 않은것은 이러한 원인에서입니다. 노트 세권만은 그래도 우리의 짐속에 있어서 다해이였습니다.”
윤혜원씨는 이렇게 회상한다.
“청진에 이른 우리는 교회당에서 우연히 박춘해(朴春海)라고 부르는 예쁜 처녀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눈에 너무도 익숙한 처녀였지요. 생각을 굴려서야 전에 사진으로 많이 보아오던 처녀라는것을 알았습니다. 그녀의 오빠는 동주와 동창이고 딱친구였습니다. 동주오빠가 그녀의 사진을 집에 가지고 와서 할아버지랑 아버지랑한테 보였고 나한테도 보이면서 ‘혜원아, 어떠냐? 이쁘지? 마음에 들어?’ 하고 물으면서 싱글벙글 웃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합니다. 동주오빠가 그녀를 몹시 좋아하는 눈치였습니다. 가능하게 그녀와 련애를 했을수도 있고 어쩌면 결혼을 약속했는지도 모를 일이였지요.”
3.8선을 넘을 때 또 한번 경악할 일이 벌어졌다. 함께 3.8선을 넘던 어떤 사람의 보짐에다 윤동주의 노트를 간수했는데 그 사람이 너무 당황한김에 그만 짐을 떨구고 온것도 모르고있었던것이다.
“그때 전 속이 타서 재가 되는것 같더군요. 그걸 지니고 어떻게 3.8선까지 왔다고 그럽니까. 우린 생명을 무릅쓰고 되돌아섰지요. 오던 길을 샅샅이 뒤지다가 요행 풀밭에서 그 짐을 찾았을 때 얼마나 격동되고 떨리던지 눈물이 마구 쏟아졌어요.”
윤혜원녀사는 눈물이 핑 돌아 말했다.
이렇게 습작노트만을 겨우 보전하여 가지고 12월 22일 겨우 서울에 도탁하였다. 하여 이듬해인 1948년 1월 30일, 정병욱이 보관하고있던 자선시집의 19수의 시와 윤혜원녀사네가 갖고간 노트속에서 고른 12수를 합친 초간본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드디여 출간하게 되었다. 정지용의 서문, “서시”를 비롯한 31편의 유고작품, 평소 가깝게 지내던 시인 유영의 추도시와 강처중의 발문이 순서대로 수록되였다.
그후 1955년 2월, 윤동주사망 10주기 기념으로 유고를 보완, 88편의 시와 5편의 산문을 묶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로 정음사에서 다시 간행되였다. 1968년에 간행된 증보판 시집은 5부로 나뉭여져 있는데 1부엔 윤동주가 졸업기념으로 출판하려던 자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그대로 실었고 2부는 도코시절에 쓴 시 5편, 3부엔 습작기의 작품들을, 4부엔 동요, 5부엔 산문인 “트루게네프의 언덕”, “달을 쏘다” 등 5편이 실리였다.
사실 윤동주가 사망하기까지 활자화되여 발표한 작품은 고작 6편의 동시와 3편의 시, 그리고 한편의 산문이 전부였다. 그리고 그것도 본격 문단활동과는 거리가 먼 《카톨릭 소년》 등 아동잡지와 조선일보 학생란 “활천”, “문우” 등이 전부였다. 윤동주의 시작품으로 우리가 접할수 있는 것은 모두 117편이다. 그 중에서 동시가 35편 정도이다. 시인으로서의 활동이 거의 없었으니 초판과 여러차례 걸친 증보판 출판의 의의가 얼마나 큰가를 실감하지 않을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상활을 연변에서는 감감 모르고있다가 1984년 연변에 다녀온 미중한인우호협회 회장 현봉학씨로부터 처음 시인의 신상이 연변에 전격 소개되게 되었습니다.”
오형범씨는 윤동주를 처음으로 연변에 알려준 사람이 일본학자 오오무라씨가 아니라 현봉학씨였다고 딱 짚어 말했다. 오형범씨의 증언은 현봉학선생이 쓴 《윤동주의 유적지를 찾아서》에서도 명확히 서술되고 있다. 이 글에서 현봉학선생은 이렇게 쓰고있다.
1984년 봄 어느날, 서재필기념재단(필라델피아시소재)리사회를 마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신태민씨(언론인, 전 경향신문사 부사장)댁에 잠간 들렸다. 우연히 그 댁에서 발견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1. 30 초판)에 매력을 느껴 빌려본것이 나의 일생에 그렇게도 큰 변화를 가져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1947년부터 “6.25”전쟁 3년을 빼고는 줄곧 미국생활을 해온 나로서는 윤동주 하면 일제말기에 옥사를 치른 애국시인이였고, 그의 “...하늘 우러러 한점 부끄럼 없기를...”라는 서시가 아름다웠다는 희미한 기억밖에 남은것이 없었다. 그러나 락서로 오염되였고 찢어진 이 낡은 시집을 다시 읽었을 때 한구절 한구절 흐르는 그 시에 나는 크나큰 감동과 충격을 받았다. 이로 인해 나는 남은 생을 좀 더 아름답고 순박하게 살고 부정과 비리에 대해서는 장한 정의감으로 싸울수 있는 용기를 가지고 살아가야겠다고 다짐까지 하기에 이르렀던것이다. 윤동주의 몸은 비록 흙으로 돌아갔어도 그의 얼, 그의 정신은 그의 시를 통해서 내 마음속에 확실히 살아있음을 느꼈다.
그해 8월에 재미동포 13명을 인솔하고 처음으로 중국방문을 하게 된 나는 연변의 유지들과 지치주정부 외사처에 애국시인 윤동주의 유적, 특히 묘소를 찾아주기를 부탁했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윤동주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했고 또 아무 관심도 보여주지 않았다. 실망은 했으나 그들에게 윤동주가 위대한 애국시인이였음을 역설하고 래년에 다시 그곳을 방문할터이니 꼭 우리 일행이 그 유적을 찾을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신신당부해두었다.
그 다음해인 1985년 7월, 제2차 단체중국방문을 했을 때 나는 오로지 윤동주의 묘소에 대해서만 물었다. 그랬더니 뜻밖에도 룡정시 대외문화경제교류협회 최근갑리사장, 룡정중학교 유기천교장 그리고 연변농학원 김동식교수 제씨로부터 묘소를 발견했으니 오시면 안내를 해주겠다고 하는 기쁜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밤새 억수로 쏟아진 비 때문에 우리가 탄 버스는 동산묘지 언덕으로 올라가지를 못했다. 진흙땅에 묻힌 버스 뒤바퀴를 십여명의 힘으로 겨우 밀어내긴 했지만 비로 인한 험한 길을 자동차는 물론 걸어서도 더 이상 올라갈수가 없어서 우리 일해의 묘소참배는 묘소를 눈앞에 두고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문인으로 알려진 내 동생 피터 현을 포함한 우리 일행의 실망은 두말할것도 없었다.
그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읽고 크나큰 감동을 받었다는 일본의 와세다대학 교수 오오무라선생이 도꼬 히비야의 한 다방에서 윤일주씨를 만나 룡정에 있는 윤동주의 묘소가 있는 곳의 략도를 그려받게 된다. 윤동주묘소와 그가 살고있던 고향을 찾고저하는 강렬한 충동으로 하여 1985년 오오무라부부(부인 조선인)는 연변으로 오게 되며 연변대학 권철, 리해산 등 교수와 향토력사에 밝은 한생철선생과 함께 윤동주묘소를 찾게 된다. 그때 장면을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별을 노래한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이렇게 묘사하고있다.
옛 동산교회묘지로 올라가는 흙길, 승용차로는 도저히 올라갈수 없는 구릉의 급경사지에 밭과 어설픈 숲이 여기저기 흩어져있었다. 조선의 회령으로 이어지는 길이 서북에서 동남으로 지나가고 그 좌측에 멀리 바라보이는 끝없이 이어진 구릉의 여기저기에 흙둔덕과 묘비가 눈에 들어왔다.
산밑쪽의 묘비들은 넘어지고 부서진게 상당히 많았다. 그들은 윤동주의 묘지를 찾아 헤매기 시작했다. 그 고생을 어찌 한입으로 다 말하랴.
앞에서 걸어가던 리해산교수가 큼직한 비석을 찾아가 정면을 보니 “시인윤동주지묘(詩人尹東柱之墓)”라는 글이 보인다. 끝내 찾아낸것이다.
윤동주의 묘는 산기슭에서 찦차로 10ㅡ15분 올라가서 비탈길에서 조금 내려온 곳에 있었다...
이때로부터 불멸의 시인 윤동주가 완정한 모습으로 연변에 나타나게 되었다. 고향은 윤동주로 하여 진동을 받았다. 연변이 낳은 윤동주가 세계적인 시인인줄을 깜박 몰랐으니 그럴만도 했다.
1980년대중엽부터 윤동주는 해마다 한국에서 “사랑받는 시인”, “좋아하는 시인”의 으뜸으로 뽑히고있고 그 기세는 세계에로 물결쳐 나가고 있다. 윤동주의 시집은 해마다 가장 잘 팔리는 책으로 되고 있다. 윤동주와 윤동주시를 연구하여 석사, 박사가 된 사람만도 이미 30~40명 된다고 한다.
“정본 윤동주전집”의 저자 홍장학씨는 “윤동주는 변절과 배신으로 신음해온 우리 현대정신사의 중심에서 민족적량심과 긍지를 상징해온 그리 많지 않은 인물중의 한사람이다”고 하고 있다. 연변대학 권철교수는 “윤동주의 시는 바로 겨레에 대한 진지한 사랑과 격정을 담은 노래이다”고 했고 연변대학 김호웅교수는 “그의 시는 자아성찰과 뉘우침을 통해 부단히 진실로 복귀하여 그 존재론적고뇌를 순수하고 순결한 심성의 투명한 서정으로 이끌어올림으로써 우리에게 따뜻한 위안과 아름다운 예지 그리고 우리 자신의 힘을 일깨워준데 그 감동의 비밀이 있다... 문익환목사의 말 그대로 오늘날 그를 회상하는것만으로도 우리 모두의 넋이 맑아진다. 또 그의 노래는 백의동포의 수많은 어린이, 젊은이들이 입을 모아 읊는바가 되었다. 아무튼 연변땅에 시심(詩心)의 뿌리를 박고 자신의 결백하고 희생적인 자아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고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죽어가는것들을 사랑하면서 조국과 민족을 위한 제단(祭壇)에 자기의 젊은 몸을 조용히 바친 그 아름다운 시편들은 한줄기 밝은 별빛이요, 우리 청소년들이 삶의 거울이 될 것이다.”
“난 지금도 ‘이랬슴둥’, ‘저랬슴둥’ 하는 연변사투리를 곧잘 씁니다. 우린 연변사람입니다. 윤동주도 연변사람입니다.” 윤혜원녀사의 말이다.
그렇다. 윤동주는 자랑찬 연변의 아들-조선민족의 시인이다. 그러나 윤동주는 연변의 조선민족시인만이 아니다. 윤동주는 이젠 세계적시인으로 세인들 앞에 나섰다. 윤동주로 하여 연변과 우리 겨레는 이제 더 큰 긍지를 느끼며 자랑을 느낄 것이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