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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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3-04 14:06|본문
투항의 상징으로 흰완장을 두른 일본관동군 제3군 사령관 등이 연길부근(의란
구)에서 쏘련홍군 사령관 치스챠크프에게 투항하는 장면.
쏘련홍군 동북진격과 일제의 패망
백만 쏘련홍군 파죽지세로 동북전장 진격
일제침략군 가는 곳마다에서 날벼락 맞아
승리의 전야
1945년 상방년, 세계반파쑈전쟁은 거듭되는 승리를 거두었다. 5월 2일, 쏘련홍군은 베를린을 공격, 점령하자 일주일도 안된 5월 8일, 독일은 무조건투항을 선포했다. 이딸리아, 독일의 패전은 일제를 고립무원하게 만들어버렸다. 미국과 영국 등 반파쑈전렬에 나선 나라의 군대는 태평양전쟁에서 계속 진공을 발동하여 몇 달사이에 련이어 일본의 쇼다찌히라군도와 오까나와도를 점령하면서 일제의 해군, 공군을 여지없이 괴멸시켰다. 중국전장에서도 1944년부터 국부적인 반공을 시작하여 1945년 봄과 여름에 이르러서는 화북, 화중, 화남의 각 해방구에서 일본침략자에 대한 거대한 공세를 발동하여 련속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쏘련에서 야영훈련을 하고있던 항일련군 교도려는 대반공의 준비로 사상정치사업을 강화하는 동시에 군사훈련을 다그쳤다. 야영지휘부에서는 쏘련측과 협상하여 쏘련출병과 함께 배합작전할 구체적인 방안을 제정, 우선 동북에서 활동하고 있는 소부대는 계속하여 적들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지정한 곳에서 적후유격전을 벌리기로 했다. 다음 항일련군 락하산부대를 적후에 파견하여 전술적인 정찰임무를 집행하면서 쏘련홍군과 배합작전하도록 했다. 아울러 항일련군 주력부대는 아무 때건 쏘련 극동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할 만단의 준비를 갖추기로 하였다.
6월 2일, 야영훈련소에서 중공동북당조직특별지부와 항일련군 교도려 려부의 주최하에 동북반공에 대한 동원대회가 열리였다. 대회에서는 전체 장병들에게 총반공전투에 투입할 준비를 갖출 것을 호소함과 동시에 동북당조직과 항일련군은 반드시 중국공산당정치로선의 지도하에 이번 전투에 림하여 항일련군을 확대하고 항일무장투쟁을 전개, 전 민족적인 통일전선을 이룩하면서 동북항일구국회조직과 항일련군당조직을 회복하여 각지 당조직을 령도한다는 행동강령을 확정했다.
7월 26일, 중국, 영국, 미국은 “포쯔담선언”을 발표, 일본군국주의를 영원히 제거하고 일본군대를 영원히 해체해버리며 일본의 전쟁범죄자들을 엄정히 징벌, 일본은 반드시 빼앗은 조선, 중국의 만주, 대만, 팽호렬도 등 령토를 포기해야 한다고 선포했다.
7월 29일, 일본군국주의정부는 “포쯔담선언”을 거절했다.
7월말,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와 중공동북당조직특별지부는 전체회의를 열고 개편을 진행, 원유의 대원들을 두 개조로 나누어 일부는 김일성의 인솔하에 조선으로 반격해들어가고 일부는 주보중의 인솔하에 동북으로 진격하기로 했다. 회의에서는 또 중공동북위원회(중공료길흑림시위원회라고도 함)를 설립하였다. 주보중이 서기로, 풍중운, 장수전, 로동생, 강신태, 김광협, 왕효명, 팽시로, 왕명귀, 왕일지, 류안래, 왕균이 위원으로 되었다. 동북위원회기관은 장춘에 세우고 동북 각지의 당조직을 지도하며 위원회산하에 장춘, 할빈, 심양, 연변 등 12개 지구위원회를 두었다. 중공연변지구위원회 위원은 강신태, 박락권, 최명석이며 강신태가 서기를 맡았다.
7월, 동북항일련군 교도려의 쏘련 극동홍기군 독립보병 88려번호는 쏘련 극동군 제2방면군에 편입되였다.
1945년 8월 8일, 쏘련정부는 드디여 일본에 대한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튿날인 8월 9일, 중공중앙 주석 모택동은 연안에서 쏘련의 대일선전포고에 대해 환영을 표하고 “일본침략자에 대한 최후의 일전”이란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주덕총사령은 8월 10일부터 련속하여 7차나 대반공의 명령을 발송하였다.
8월 9일 0시10분, 쏘련 극동지대의 홍군 3개 방면군 150만 대군은 진공을 발동하였다. 동북항일련군의 각 부대들은 통일작전계획에 따라 쏘련홍군과 배합하여 진격해들어왔다. 그중 일부는 선견부대로 뽑혀 락하산부대에 편입되거나 길안내로 나섰다. 그리고 동북 각지에서 유격전을 하면서 정찰임무를 집행하던 소부대들은 적후에서 교란활동을 적극적으로 벌리는 한편 쏘련홍군의 폭격기에 배합하여 적의 위치와 폭격지점을 무선전으로 지시하여 폭격의 정확성을 확보하여주었다. 적후에서 지하공작을 하던 항일련군장병들도 분분히 일떠나 대중을 조직하고 무장부대를 조직하였다. 이러한 적극적인 활동으로 하여 쏘련홍군은 매우 빠른 속도로 일본관동군을 격파하고 동북을 해방할수 있었다.
침략자의 정수리에 날벼락을
“7월의 어느날, 사령부에서 나와 전문욱 그리고 오른죤청년인 와샤 이렇게 세사람을 갑자기 불렀습니다. 우리는 선발대로 뽑히게 된것이라고 생각하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달려갔지요.”
로항일전사 려영준씨는 그때의 통쾌하던 장면을 떠올리면서 즐겁게 이야기했다.
“이번에 목단강일대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간후 먼저 정찰하고있다가 전쟁이 시작되면 적들과 함께 이동하면서 무전으로 적의 이동방향을 알려주어야 합니다.”
사령부의 명령이였다. 세 정찰병은 군례를 올린후 사령부를 나와 곧바로 적후로 들어갔다.
전쟁직전의 목단강시내는 밤낮 계엄상태에 처해있었다. 세 정찰병은 적들의 병영과 비행장을 정찰하고 적들의 움직임을 수시로 지휘부에 보고했다. 그때 휴대했던 무전기는 간편하면서도 출력이 커 송수신이 잘되였다.
“나는 전보를 치거나 받지 않을 때에는 방송에 주의를 돌렸습니다. 전쟁판에서 무전수의 우월한 점이란 남들보다 소식을 항상 먼저 아는것이지요. 방송을 통해 쏘련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 소식을 알게 된 우리들은 더없이 격동되였댔습니다. 쏘련홍군이 드디여 국경을 넘어섰지요. 우린 통쾌하게 왜놈들을 까부셔보자고 다지고 또 다졌지요.”
목단강일대에 도사리고있던 왜놈들은 단솥두껑에 기여오른 개미새기마냥 바글거리면서 황망히 남산에 올라붙었다. 세 정찰병은 적들과 500메터 상거한 지점에서 전선사령부에 무전을 치고는 제꺽 다른 지점으로 옮겨갔다. 산마루의 나무밑에 모여앉은 셋은 흥분된 심정으로 손목시계를 초조히 들여다보았다. 적정신호를 발사한 시각으로부터 정확히 2시간 50분이 지나자 하늘이 무너져내려앉는듯한 동음이 들려왔다. 쏘련쪽 하늘로부터 전투기와 폭격기가 편대를 지어 날아오고있었던 것이다. 얼마나 장쾌한 장면인가. 손채양을 한 세사람은 흐뭇한 심정으로 하늘의 은제비들을 바라보았다.
비행기들은 그들의 군사지도를 보고 암호로 알려준 목단강남산을 한번 선회하더니 기수를 숙이면서 가차없이 기총사격을 들이대고 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는 다시 기수를 쳐들며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것이였다.
“꽝!”
“뚜루룩-뚜루룩...”
“꽝! 꽝!...”
왜놈들이 개미처럼 바글거리는 남산은 삽시에 화염으로 휩싸이는 아비규환으로 되었다. 총탄과 포탄이 철천지원쑤 일본침략자들의 정수리에 사정없이 쏟아진것이였다. 적들은 기관총탄에 맞아 쓰러지고 폭탄에 맞아 무리죽음을 당하고 있었다. 멀리서 만원경으로 이러한 장면을 내려다보는 정찰병들의 가슴은 통쾌하고 흐뭇하기 그지없었다.
남산에서 살아남은 적들과 목단강시내에 남아있던 적들은 혼란상태에 빠져 갈팡질팡하다가 이번에는 해림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정찰병들은 무전기를 지고 쫓아가면서 수시로 변화되는 적정을 사령부에 보고하였다.
적들은 자동차를 타고 도망치고있었다. 이에 정찰병들은 산길을 질러 내달렸다. 손등과 낯이 나뭇가지에 찔리고 긁혀서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이들은 아픈줄을 몰랐다. 아니 아플수가 없었다. 코앞에서 도망치는 원쑤놈들을 모조리 소멸해야 하니깐.
그러다가 려영준이 벼랑을 내려타면서 그만 바위에 무릎마디를 부딪쳤다. 눈앞이 아찔해났으나 그는 이를 악물고 벼랑을 내렸다. 발을 내디디기 힘겹게 통증이 왔다. 그러나 그는 절룩거리면서 계속하여 앞으로 닫기만 했다. 놈들을 쫓아가 또다시 정수리에 폭탄날벼락을 안겨줘야 했으니 말이다. 이제 곧 우리가 승리한다는 생각이 앞서니 아픔이 아니라 죽는다 해도 통쾌할것만 같았다.
셋은 또 높은 산마루를 톺아올랐다. 산정에 다 오른후 이쪽 나무에서 저쪽 나무에다 안테나를 건너 매고 우묵진 곳에 무전기를 장치했다. 와샤가 풀속에 엎디여 보초를 서고 전문욱과 려영준은 무전기 앞에 엇갈아 들어앉아 적정을 회보하는 한편 사령부의 새로운 지시를 기다렸다.
“일본제국주의 무조건 투항. 각 소분대는 주력부대와 배합하여 패잔병을 추격할 것.”
려영준은 귀에 썼던 레시바를 벗어던지면서 소리쳤다.
“문욱이, 왜놈들이 투항했다오! 와샤, 일본제국주의가 투항했소!”
“뭐, 그게 정말이오?!”
“그렇다니까!”
전문욱과 와샤는 귀를 의심하면서 려영준쪽으로 마구 달려와 전보지를 나꿔챘다. 두 사람은 전보지를 눈박아 보고 또 보더니 환성을 터치면서 펄쩍 뛰였다. 셋은 산마루에서 얼싸안고 껑충껑충 뛰기도 하고 목놓아 웨치기도 했다.
“항일전쟁승리 만세!”
“중국공산당 만세!”
“쏘련홍군 만세!”
눈으로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이날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경을 헤쳐왔으며 이날을 위해 얼마나 많은 우리의 전사들이 전장의 이슬로 사라졌던가. 목이 메고 가슴이 터지는것만 같아 셋은 한없이 웨치고 뛰기만 할뿐이였다.
정신을 차린 세 정찰병은 드디여 무전기를 걷어가지고 패잔병을 추격하면서 전진하기 시작했다.
10일후에 전선사령부에서 철수하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세 정찰병은 산에서 내려와 승리의 개가를 부르면서 부대로 돌아갔다.
일본의 무조건투항
쏘련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후 일본군은 8월 10일, 제1방면군 사령부를 목단강으로부터 돈화에 옮겨오고 제3군과 제5군의 24만 병력을 가목사, 동녕으로부터 훈춘변경 및 연변 각 현의 요해지에 배치, 끝까지 저항하려고 시도하였다.
쏘련 극동군은 동북항일련군의 배합하에 두 갈래로 연변에 진격해들어와 연변 각지의 일본군을 진공했다.
한갈래는 쏘련 극동군 제25집단군으로서 훈춘의 춘화, 장령자, 경신으로부터 일본군의 방어선을 돌파한후 10일에 훈춘현소재지를 점령하고 11일에 대팔령에 다달았다. 일본관동군 112사단는 대팔령의 험요한 지세를 리용하여 완강하게 저항해나섰다. 쏘련홍군은 이틀동안에 100대의 땅크를 소실보면서 격전을 벌렸지만 대팔령을 돌파하지 못했다. 8월 12일, 쏘련홍군은 60대의 비행기를 동원하여 일본군진지를 향해 훼멸적인 폭격을 들이댔다. 이에 일본수비군은 흰기를 들 수밖에 없었다. 대팔령을 돌파한 쏘련홍군은 드디여 도문방향으로 진공할수 있었다.
도문 후안산에서 또다시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을 받은 쏘련홍군은 이틀간의 맹공격을 펼쳐 끝내 일본군을 쳐부수고 8월 17일 도문을 해방했다.
다른 한 갈래는 쏘련 극동군 제5집단군으로서 8월 10일, 동녕, 수분하 등 국경지대의 중요도시를 함락한후 왕청현 라자구방향으로 진군, 11일부터 14일까지 라자구경내에서 동다라즈, 석두하자, 태평령 등 전투를 펼쳐 일본군을 격파하고 라자구를 점령한후 돈화, 연길 방향으로 진격해들어갔다.
동다라자전투는 아주 격렬했다. 일본군의 완강한 저항에 쏘련홍군은 이틀동안이나 격전을 벌리지 않으면 안되였다. 이번 전투에서 쏘련홍군은 일본군 소장이하 1000여명을 죽이거나 포로했다. 다른 한 갈래의 진공부대인 366사와 187사는 협동작전하여 일본관동군 한 개 대대를 소멸한후 석두하자방어공사를 점령, 14일, 직격을 멈추지 않고 태평령에 다달아 반날동안의 격전을 벌려 관동군 128사단의 사단장이하 600여명을 격살하고 2000여명을 포로했다.
1945년 8월 15일, 력사의 시각은 드디여 오고야말았다. 일본천황은 라지오를 통해 “정전조서(停戰詔書)”를 선독, 일본의 무조건투항을 선포했다.
그러나 관동군중의 완고파들은 이에 불복, 투항하지 않을뿐더러 각지에서 완강히 저항해나섰다. 15일, 쏘련군 싸브친꼬브소장이 지휘하는 기계화부대 제10군의 선견대와 보병 39군, 땅크부대 359려 등은 협동작전하여 왕청현소재지를 점령한후 일본군 제127사단의 길청령방어선을 돌파, 8월 18일에 연길이 드디여 해방되였다. 8월 19일에는 룡정과 돈화, 8월 20일에는 화룡이 해방되였다.
쏘련홍군은 연변에서 7차례의 큰 전투를 벌리는 가운데서 중대한 대가를 내면서 일본군과 위만군을 4만여명 소멸하고 3만여명을 포로했다.
쏘련홍군의 연변을 포함한 동북지대로의 출전은 동북에서 14년간 식민통치를 하여온 일제에 해하여 훼멸적인 타격이 아닐수 없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