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로그인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5)

페이지 정보

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1-21 06:08|

본문

장백밀림속에 건설된 곰골밀영

 

 

장백유격근거지의 개척

 

 

 

장백림해에 대량의 밀영  건설해 유격활동에 돌입

낮이면 적의 세상이다가도 밤이면 우리 세상 되여

 

 

림해에 세워진 밀영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적들의 “토벌”에 주동적으로 반격하면서 정치적영향력을 확대, 1936년말에 이르러서는 장백일대의 광활한 지역이 공산당과 항일련군의 통제하에 있게 되었다.

 

장백산지구는 서간도와 조선, 북간도를 련결하는 삼각지점에 위치한 중요한 전략적거점이기에 이 일대를 통제하는 것은 자못 중요했다. 이런 유리한 기회를 리용하여 2군 주력은 장백산지구에 대량의 밀영을 건설하여 유격활동에 돌입하였다. 그때로부터 장백일대는 일제와의 교전회수가 가장 많고 총포성이 가장 높은 전장으로 되었다.

 

밀영건설은 대부분 소분대의 몫이였다. 소분대는 주력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먼저 파견되여 가서 지점을 선택한후 밀영을 건설했다. 이런 밀영은 키가 낮은 온돌식영방이였는데 일반적으로 나무가 밀집해있는 높은 산의 복부에 건설했다. 밀영은 목제형과 석제형이였다. 목제형은 통나무로 짓는 귀틀집이였는데 바닥을 몇자 파들어갔기에 밖에서 보기에는 키가 낮아보아나 집안은 높았다. 지붕은 나뭇가지나 풀로 덮어 위장하고 주위에 나무와 풀을 옮겨심어 외부의 시야를 가리였다. 실내는 구둘로 덥히였는데 연기는 밖에다 낸 고랑을 따라 2~3리 상거한곳에 가 피여오른다. 이런 고랑도 초목으로 가리워놓아 얼핏 발견할수 없게 했다. 석제형은 산기슭을 리용하여 건설했는데 산세를 따라 몇메터 파들어간후 돌을 쌓아 만든다. 산굴식의 집이여서 보온성이 강해 좋았다. 이런 밀영은 물론 수원이 충족한곳에다 지였다.

 

1936년 봄 항일련군 2군이 안도현과 무송현 경내에서 활동할 때 이미 이런 밀영을 리용한적 있는바 미혼진밀영, 로투띵즈밀영, 마안산밀영 등이 그것이였다. 이번에 장백, 무송일대에 대량적으로 밀영을 건설했는데 무송, 장백, 안도, 금천, 관전, 류하, 몽강 등지에 건설한 밀영들로는 곰골밀영, 홍두산밀영, 양무띵즈밀영, 나얼훙밀영, 띠수이라즈밀영, 청봉밀영 등이다. 조선쪽에도 밀영을 건설했는데 사자봉밀영, 곰산밀영, 선오산밀영, 간백산밀영, 무두봉밀영, 소연지봉밀영 등이다.

 

2군에서 건설한 밀영은 건축방식이 령활하고 다양했으며 전용성이 강했는바 영방, 지휘부, 통신처, 정훈부, 수리소, 인쇄공장, 학교, 간부훈련소, 량식창고 등 다종다양했다. 밀영마다 용도와 크기가 달랐다. 2군 6사에서 장백에다 건설한 곰골밀영은 비교적 규모가 큰 밀영이였는데 밀영은 장백현소재지에서 90킬로메터, 이도강에서 40킬로메터 떨어진 백두산동남부 90킬로메터 지점의 심산밀림에 자리잡고있었다. 곰골밀영은 남으로 19도하가 막아서 있고 서로 홍두산맥이 둘레를 쳐주고있어 천연적인 유격근거지가 되기에 손색이 없었다. 6사는 여기에다 부대병영, 련락처, 병기공장, 병원, 수군학교 등을 세웠다. 어떤 밀영은 길이 30메터, 너비 8메터, 높이 2.6메터로서 비교적 규모가 컸는데 한꺼번에 200여명을 용납할수도 있었다.

 

이러한 밀영을 리용하여 항일련군은 숙영문제를 해결했을뿐만아니라 자신을 엄호했으며 군수물자를 보관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군중과 련계, 신출귀몰하면서 유격전을 벌려나갔다.

 

낮이면 적의 세상 밤이면 우리 세상

 

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남만에 온후 유격근거지를 개척함과 동시에 유능한 간부와 공산당원들을 인민군중속에 파견하여 선전고동활동을 벌리였다. 그들은 공산당조직을 건립하고 조국광복회, 청년동맹, 반일회, 부녀회, 반일소년단 등 군중적인 혁명단체를 결성했다.

 

1936년말부터 1937년 2월, 장백현 20도구에 조국광복회장백현공작위원회를 건립, 산하에 수십개의 기층조직을 세웠다. 이시기 장백현 19도구에 권영벽을 서기로 하는 중공장백현위원회를 건립하고 아래에 3개 특별지부와 10여개 직속 지부를 두었다. 적들의 통치지구에 건립된 군중단체들은 중공장백현위의 령도아래에서 군중을 발동하고 조직하여 항일활동을 활발히 벌리였다. 이런 군중단체들은 또 량식과 병력을 보충하는 큰 뒤심이기도 했다. 이 시기 300여명 청년이 항일련군 제2군에 참가했다.

 

반일단체에서는 당조직의 령도하에 청년들을 골간으로 하는 “생산유격대를 조직하기도 했다. 이런 유격대는 항일련군을 지원하는 반군사조직이였는데 그들은 한편으로는 생산로동에 참가하여 량식을 생산해 항일련군에 지원하고 한편으로는 적정을 정찰하거나 보초를 섰으며 유사시에는 항일련군과 함께 전투에 참가하기도 했다.

 

장백항일유격근거지는 연변의 항일유격근거지때와 같지 않았다. 연변의 유격구는 해방지구의 유격구였는데 유격구에서는 적구의 군중들을 쓴외보듯 했으며 지어 적통치지구의 인민들에 대해 “백색군중”이라고 하면서 적대시하였고 중간지대의 군중들에 대해서 “량면파군중”이라고 하면서 경원시하였다. 그러나 장백에서는 군중을 “적”, “백”으로 갈라놓는 실책을 피해 적점령구 깊이에까지 들어가 군중공작을 하여 항일하려는 모든 군중을 단결, 투쟁에로 불러들였다. 하여 집단부락의 경비를 맡은 자위단원들속에도 우리 사람들이 얼마든지 있었다. 적들의 기층정권기관에도 공산당에서 파견한 공작인원들이 아주 많이 있었고 대부분의 구장, 촌장, 툰장자리도 우리 사람들이 차지하고있었다. 그들은 낮에는 일본군경들과 만주국관원들의 심부름을 해주는척하다가도 밤이 되면 회의도 하고 야학도 꾸리고 항일군에 보낼 후방물자수집도 하고 원호미도 찧으면서 바쁘게 돌아쳤다. 하여 낮이면 적의 세상이지만 밤만 되면 우리들의 세상이였다.

 

“언제인가 우리는 팔도강이라는 집단부락에 식량공작을 간 일이 있었다. 팔도강의 자위단에는 우리가 파견한 공작원이 있었다. 우리 소분대는 이 공작원의 련락을 받고 혁명가요를 부르며 곤두총을 쏘면서 마을을 습격하였다. 그러나 자위단의 무장은 해제하지 않고 공작원이 미리 마련해놓은 식랑만 가지고 돌아왔다.

 

유격대가 철수한 다음 공작원은 일본인경찰을 찾아가 유격대가 마을을 들이치고 식량을 빼앗아갔다. 그러나 그들이 포대만 점령하지 못하였다. 포대 때문에 자위단이 살아났다고 하면서 놈들을 속여넘기였다.”(김일성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제5권)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광활한 심산밀림속에서 유격활동을 벌렸을뿐만아니라 적점령구의 반일단체와 인민군중들로부터 군수물자와 병력을 지원받으면서 부대를 장대시켰다.

 

반"토벌"전투

 

장백지구에서의 항일련군의 맹활약은 일제를 당황하게 했다. 이에 관동군은 동변도를 포함한 만주일대에 항구적인 치안대책을 세운다는 명목으로 “만주국치안숙정계획대강”을 만들기에 이르게 되었고 만주국정부는 “3개년치안숙정계획요강”을 내놓았다. 가장 중심적인 특별공작대상자로 정한 것이 바로 북부동변도 즉 장백, 림강, 무송, 동강, 휘남, 금천, 류하, 통하, 집안 등지였다. 위만주국은 중앙에 “동변도부흥위원회”를, 통화에 “동변도부흥판사처”와 “동변도특별치안유지회”를 설치하는 한편 만주국군부 최고고문인 사사끼를 우두머리로 하는 “통화토벌사령부”를 내오고 북부동변도의 치안확보를 겨냥하는 “동기대토벌”을 감행했다.

 

적들의 동기토벌을 대비해 항일련군 제1로군 제1군2사와 제2군4사, 6사는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이며 제2군 군장인 왕덕태와 정위 위증민의 령도하에 장백, 무송, 몽강, 안도 등 현에다 많은 밀영을 건설하고 대량의 량식과 군수물자를 축적, 반“토벌”전을 준비했다.

 

반면 압록강, 두만강 연안의 국경일대에는 각양각색의 “토벌”부대들이 대대적으로 투입되였다. 남부조선의 경찰부대도 북부의 산악지대로 이동했고 치치할에 있던 광동군부대들도 장백산쪽으로 남하기기 시작했다. 조선주둔 일본군 제19사단 산하 부대들도 압록강을 건너왔다. 일만경찰부대들과 위만군“토벌대”들도 항일련군을 향해 몰려들었다. 압록강연안에는 경찰관주재소들이 부쩍 늘어났다. 곳곳에 단속초소들이 생겨났으며 강우로는 전화선들이 줄줄이 늘어졌다.

 

 바로 이 무렵부터 적들은 경찰관의 아내들까지 사격훈련을 시키였다. 달구지나 발구, 말파리 같은 것이나 겨우 드나들던 백두산일대 두메산골 오솔길들로는 대표바퀴와 치중마차들이 굴러다니게 되었고 밀림속 곳곳에 군마자국이 어지럽게 찍혀지기 시작했다. 장백산지대는 “토벌대”들로 쫙 덮혔다. 적들은 “이번 토벌을 최종적인 것으로 하여 치안을 결정적으로 확립한다”고 하면서 장백산일대를 참빗질하였다. 그러나 항일련군의 기동령활한 유격전앞에서 적들은 간곳마다에서 골탕을 먹지 않으면 안되였다.

 

10월 10일, 2군 4사와 6사의 400여명 전사는 안도현남부의 동청구부근에서 위만군 제7려 14퇀을 습격 일본군 대좌와 중좌를 비롯한 10여명을 격살했다. 이에 적들은 5000여명 병력을 긁어모아 4사와 6사를 포위추격해왔다.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 등은 부대를 이끌고 무송, 림강, 몽강 등지의 림해설원으로 적들을 끌고다녔다. 항일련군은 밀영을 거점으로 갑자기 나타났다가는 갑자기 사라지면서 이곳에서 한바탕 두둘기고 저곳에서 뒤통을 답새기면서 적들의 추격을 파괴해버렸다.

 

11월 4일, 왕덕태, 주수동, 김일성이 지휘하는 부대는 대양차위만군주둔지를 물샐틈없이 포위한후 맹렬한 공격하는 한편 정치공세를 들이대 10여분만에 적들이 두손들고 투항하게 했다. 하여 아군은 기관총 2정, 보총 150여자루, 탄알 15상자를 비롯한 대량의 군수물자를 로획했으며 적들의 장백산지구로 들어오는 목이나 다를바 없는 군사요충지를 회멸해버림으로서 장백산지구 각 현 항일유격선로를 개통해놓았다.

 

11월하순, 2군에서는 무송현 소탕하에서 간부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정보를 알아낸 적들은 600여명 병력을 동원해 소탕하를 향해 진군해들어왔다. 소탕하서북측의 고지를 점령한 적들은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아군의 주둔지를 향해 돌연적으로 습격해왔다. 왕덕태는 1개 패를 파견하여 군중을 엄호하면서 후퇴하게 하고 군부 교도퇀 1개 련을 적들의 등뒤로 빠져나가게 하여 앞뒤로 적을 포위해버리려 했다.

 

적들의 공격을 점점 거세져 전투는 갈수록 가렬해졌다. 아군의 희생자도 점점 많아졌다. 긴요한 관두에 아군의 기관총수가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이에 적들은 머리를 쳐들고 미친개마냥 달려들었다. 이때 6사 8퇀 정위 김산호가 비발치는 총탄을 맞아 받아 달려나가 쓰러진 전우의 손에서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한 사격을 퍼부었다. 돌격해오던 적들을 기관총사격에 폭폭 쓰러졌다. 그러나 그마저 적탄을 맞고 희생되였다. 눈앞에서 두 전사가 쓰러지는 것을 본 왕덕태는 벌떡 일어나 전우의 기관총을 받아쥐고 적들을 향해 맹렬히 사격했다.

 

은밀히 파견되였던 교도퇀은 끝내 적들의 뒤등으로 공격해왔다. 최현퇀장이 인솔하는 4사 1퇀도 정면으로 반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오후 2시넘어서야 부대는 적들의 포위를 완전히 뚫고 나올수 있었다. 그런데 전투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항일련군 제1로군 부총사령원이며 제2군 군장인 왕덕태가 불행히도 적탄을 맞고 쓰러졌다. 그때 왕덕태는 겨우 28살이였다.

 

왕덕태가 희생된후 제2군의 모든 령도중임을 위증민이 맡게 되었다. 위증민은 2군 4사, 6사와 1군의 일부 병력을 이끌고 다시 림강으로 전이했다.

 

12월 2군의 4사와 6사의 200여명 병력은 림강의 5도구에서 위만군과 격전을 벌려 20여명을 격살하고 30여명을 포로했다.

 

1937년 양력설, 500여명의 일만군이 6사의 홍두산밀영을 습격해왔다. 김일성이 주력부대를 이끌고 림강일대에서 활동하고있어 밀영에는 30여명의 전사들이 남아있을뿐이였다. 적들이 쳐들어온다는 정보를 접한 전사들은 주동적으로 밀영을 비워놓은후 유리한 지형을 리용하여 련속하여 적들을 볶아댔다. 이곳저곳에서 얻어맞은 적들은 100여구의 시체를 남긴채 창황히 도망치지 않으면 안되였다.(계속)

0

글로벌한민족 목록

글로벌한민족 목록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9) 인기글 일제 경찰서의 조사를 받고있는 조선인 젊은이들 일제의 황민화정책.2 “황국신민의 선서” 외치면서 천황에게 충성맹세 “창씨변경세칙” 강요로 성과 이름마저 빼앗겨 “황국신민의 선서” 1940년 5월, 부의는 두 번째로 도꾜에 불리워가 일본천황을 배일한 다음 천황이 준 아마데라스 오미가미(천조대신)를 신경(장춘)…(2013-02-01 14:54:35)
北, 한미연합훈련 비난…"엄중한 전쟁행위" 인기글 조선중앙통신 논평 "핵억제력으로 자주권 지킬 것"(서울=연합뉴스) 노재현 기자 = 북한은 30일 올해 초 한국과 미국의 연합훈련을 "엄중한 전쟁행위"라고 비난했다.조선중앙통신은 이날 '전쟁 미치광이들에게 차례질 것은 시체와 죽음뿐이다'라는 제목의 논평에서 지난 17일부터 진행된 한미 포병들의 혹한기 훈련과 2월 예정된 한미 해병대의 동계 연합훈련을 거론하면서 "조선반도 정세를 극단으로 몰아가 새 전쟁의 도화선에 기어이 불을 달려는 침략적 기도의 집중적 발로"라고 주장했다.논평은 북한의 우주개발 권…(2013-01-31 01:24:31)
中 국가과학기술진보 1등상에 조선족 김녕일 박사 인기글 "동물 바이러스 예방·통제 연구에 탁월한 업적 이뤄"(서울=연합뉴스) 홍덕화 기자 = 중국의 저명한 수의학자인 조선족 김녕일(57) 박사가 최근 동물 바이러스 예방·통제와 관련된 독보적인 연구로 국가과학기술진보 1등상을 받았다고 중국 언론들이 30일 보도했다.연변인터넷방송은 며칠 전 열린 국가과학기술표창대회에서 김 박사(인민해방군 산하 군사의학과학원 군사수의연구소 바이러스연구실 주임)가 '주요 동물 바이러스 예방·통제를 위한 핵심기술 연구와 응용' 부문의 탁월한 연구 업적을 인정받아 국가과학기술진…(2013-01-31 00:54:47)
'영국 떠나야 하나' 유럽 최대 한인타운이 흔들 인기글 요즘 런던 한인타운은 영국 날씨처럼 안개와 비에 젖어 어둡다. 겨울이라 그렇다는 게 아니라 한인사회의 미래가 잘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다. 순조롭게 발전해오던 유럽 최대의 한인사회가 최근 여러 가지 내외적 요인으로 침체 혹은 축소되고 있다. 외적 요인으로는 영국 정부의 이민정책 변화로 인한 한인 비즈니스의 어려움을 들 수 있다. 내적 요인으로는 한인사회 구성원의 변화를 들 수 있다. 한인 이민사 반세기를 맞는 2013년 올해 영국 한인사회의 미래는 어느 때보다 어둡다.   영국 한인사회…(2013-01-28 12:48:12)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8) 인기글 학생들의 신사참배 일제의 황민화정책.1 일제 로구교 점령 북경 포위 전면적침략 감행 동북에서 정치 경제 문화의 파쏘통치를 강화 로구교사변 1937년 7월 7일, 일본군은 군사연습중에 있던 병사 한명이 실종되였다는 것을 구실로 왕평현성에 대한 수색을 무리하게 요구해나섰다. 이것을 발단으로 …(2013-01-25 06:36:37)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7) 인기글 불타고있는 보천보의 일제기관들 로진창전투와 보천보전투 로진창에서 악질주구 리도선부대를 괴멸시키고 압록강 건너 보천보에서 일제 통치기관 들부셔 1937년 3월 29일부터 30일까지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 4사 제1퇀, 제3퇀, 6사 제9퇀, 제10퇀은 무송현 동강양무띵즈밀영에서 회사한후 령도간부련석회…(2013-01-23 06:41:50)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6) 인기글 림강 5도구 밀영에서 6사 장병들과 함께 있는 김일성(중간에 앉은 사람) 장백산기슭에서의 전투 용감무쌍한 6사 전사들 림기응변 신출귀몰하면서 곰골, 홍두산전투 벌려 일제의 “동기대토벌” 분쇄 일제는 림강, 장백현에서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의 련속되는 타격을…(2013-01-22 06:18:30)
뉴욕에서 활약하는 조선족 미용사들 인기글  "미국은 기회의 나라...부지런하기만 하면 얼마든지 후회없는 인생 살수 있죠"   뉴욕 프러싱의 번화한 루즈벨트선상에는 우리 조선족이 꾸리는 널직하고 깨끗하고 우아한 헤어살롱이 있는데 바로 박사장내외가 꾸리는得発廊.헤어살롱이다. 헤어디자인은 물론 네일(指甲)서비스와 지압서비스까지 받을수 있는, 휴식과 아름다움을 함께 즐기고 향수할수 있는 공간이다.   박사장은 2000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7년간 한국인이 꾸리는 헤어살롱에서 일하다가 2008년 2월초에 드디여 …(2013-01-21 08:58:28)
조선, 외국인의 휴대폰 소지 허가 인기글 이달 7일부터 외국인이 휴대폰을 소지하고 조선에 입국할수 있게 됐다고 조선고려전신회사기술인원이 20일 밝혔습니다. 휴대폰을 소지하고 조선에 입국하고저 하는 외국인은 세관에서 등기서류 한페이지를 작성하면 됩니다. 소식을 전한 이집트 기술인원은 이 변화는 얼마전 구글의 고위층이 조선을 방문한 것과는 관련이 없다고 전했습니다. 과거 조선에 입국하는 외국인은 반드시 휴대폰을 조선의 세관에 보관시키고 출국시에 찾아갈수 있도록 규정돼 있었습니다. 외국인의 휴대폰 소…(2013-01-21 08:03:43)
[열람중]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5) 인기글 장백밀림속에 건설된 곰골밀영 장백유격근거지의 개척 장백림해에 대량의 밀영 건설해 유격활동에 돌입 낮이면 적의 세상이다가도 밤이면 우리 세상 되여 림해에 세워진 밀영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제2군은 적들의 “토벌”에 주동적으로 반격하면서 정치적영향력을 확대…(2013-01-21 06:08:06)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4) 인기글 무송현소재지의 소남문포대 장백으로의 진격 무송에서 반일부대와 련합작전해 적을 호되게 타격 대덕수 소덕수 반절구 전투에서 항일련군 위망 떨쳐 무송현소재지전투 1936년 8월, 쟝…(2013-01-20 06:02:21)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3) 인기글 김일성이 작성한 “조국광복회10대강령”친필원고(1936년 5월 5일) 동북항일련군 제1로군 건립 하리회의서 조선인공작회복할데 관한 결의 채택 중국혁명에 참가하고있는 조선인 이중사명 제시 …(2013-01-19 06:25:30)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2) 인기글 동북항일련군 제2군 6사 조선인전사들 남북만으로의 전이 제2군 남북만에서 일만군 호되게 족치고 동광서 재만조선인광복회 조직문제 토의 따푸차이허전투 동북항일련군 제2군 각 사는 제2군, 제5군 당위특별회의…(2013-01-18 06:00:48)
<北 어민, 겨울철 목숨 건 고기잡이…잇단 조난사고> 인기글 올겨울 조난자 벌써 50여명…"치열한 외화벌이 때문" 분석 `휴어기(休漁期)'인 한겨울에 바다에서 조난사고를 당하는 북한 어선들이 부쩍 증가한 것으로 나타나 배경에 관심이 쏠린다. 16일 중국광파망(中國廣播網)이 전날 보도한 내용에 따르면 중국 랴오닝성 단둥(丹東)시 앞바다에서 어선의 연료 고갈과 기계 고장으로 표류하던 북한 어민 31명이 중국 측에 구조됐다. 이들은 지난 9일 서해에서 조업하던 중 연료가 바닥났지만 무전기와 선박 기계장치가 고…(2013-01-17 11:14:31)
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51) 인기글 미혼진밀영에서의 조선인항일련군 전사들 동북항일련군 제2군 건립 조선인항일무장력 조선혁명력량 및 중국항일무장력량 이중사명 확인 김일성 등 조선공산주의자들 중한인의 통일된 무장대오건립을 주장 용맹한 서부파견대 1935년 9월, 일본군은 전면적인 추기“토벌”을 발동했다.…(2013-01-17 06:20:51)
게시물 검색

공지사항 2024년 龍의 힘찬 기운을 받아 건강부자가 되세요
延边聖山本草商贸有限公司(연변성산본초상무유한공사)微信 138-4339-0837 카톡전화번호 010-4816-0837
Copyright © 2006 吉ICP备2020005010号 住所 :延吉市北大新城 2号楼3010
企业法人注册号(법인사업자 등록번호):2224000000129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