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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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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1-15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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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내두산항일유격근거지
 
 
 
 
동만유격근거지의 포기
 
 
 
더 큰 손실 막기 위해 주동적으로 유격근거지를 포기 
서부원정길에서 항일련군 제1로군 창건의 토대 닦아


처창즈근거지의 포기 

1935년 8월 30일, 일본관동군사령부는 이른바 “소화 10년 관동군추기치안숙정만주국방면협력요망”을 제정하고 항일무장“토벌”의 중점을 빈강, 길림, 간도, 봉천, 안동 등 5개 성에 두었다. 이 “숙청계획”에 따라 일제와 위만국은 장춘, 열하일대에서 대량의 군대를 움직여 동만, 수녕에 투입, 3개월내에 반일무장력을 철저히 소멸한다고 장담했다. 
  
1935년 9월중순, 일만군은 추기“대토벌”을 감행하기 시작했다. 적들의 “토벌”을 분쇄하기 위해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제1, 제2퇀은 부대를 여러갈래 소분대로 편성한후 안도, 돈화, 몽강 일대에서 기동령활한 유격전으로 적들을 대처했다. 
  
1935년 10월, 적들은 수백명의 일만군을 동원하여 처창즈유격근거지를 포위공격하였다. 토벌군은 오동양차, 송강, 쓰치개 방면으로부터 포위망을 조이며 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제2군 군장 왕덕태의 지휘하에 직사포, 박격포, 경기, 중기 등 중무기로 무장한 우세한 적들과 련속 며칠동안 접전하였다. 그러나 적이 강하고 우리가 약한 정황에서 근거지를 끝까지 보위하기는 무리가 있었다. 실력을 보존하기 위하여 아군은 주력부대를 내두산쪽으로 이동시키고 반일자위대는 근거지군중들을 데리고 서남차로 빠져나가기로 했다. 
  
서남차에서 두달 남아 머물러있던 반일자위대와 근거지군중들은 근거지인민들을 해산시키고 반일자위대도 유격전으로 넘아가라동만특위와 군부의 지시를 받게 되었다. 근거지군중들을 놓고 말하면 이것은 청천벽력이 아닐수 없었다. 물과 고기처럼 생사를 같이하던 부대를 떠나 보내고 근거지마저 버린후 적구로 내려가야 하니 앞이 캄캄해날 수밖에 없었다. 대회를 열고 근거지해산의 절박성과 정당성을 인내성있게 해설하여 군중들은 어렵지 않게 리치를 깨닫기는 했으나 정작 해산을 집행하는 실무적단계에 들어가서는 적구로 내려갈수 없다고 나누웠다. 
  
군중들은 풀을 뜯어먹고 짐승가죽을 우려먹어도 좋으니 여기서 죽든살든 하겠다면서 야단을 쳤다. 적구로 갈바에는 차라리 유격구에서 굶어죽겠다면서 떠들어댔다. 어떻게 적구에 내려가 왜놈들의 멸시를 받으면서 살겠는가! 안될 일이다! 
  
일부 군중들은 적구로 내려가지 않기 위해 참군을 요청하였다. 입대적령기에 들어서지 않은 아동들과 소선대원들도 혁명군을 따라가겠다고 성화를 부리였다. 어떤 아동단원은 데려가기 싫으면 차라리 총으로 쏘아달라고 하면서 매달려 강짜를 부리기도 했다. 
  
유격구의 해산에 대하여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전에는 인민들은 식량을 군대에 공급하여 전투를 견지하게 하였는데 지금은 군대가 인민들의 식량을 해결하기 위해 적들과 싸워 량식을 빼앗아다가 인민들에게 공급하는 형편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혁명군에게 있어서 커다란 보따리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10개월이나 존속하였던 처창즈항일유격근거지는 적아력량대비의 현저한 차이로 말미암아 1935년 11월에 해산되였다. 처창즈에 있던 제2군 군부와 일부분 부대 그리고 병기공장, 옷공장, 병원 등 후방기관들이 모두 내두산으로 옮겨갔다. 
  
내두산은 마을서쪽에 두 개의 젖꼭지모양의 산이 있는 것으로 하여 생긴 이름인데 태고연한 심산밀림속에 자리잡은 이 부락을 중심으로 송강과 천지에 이르는 주위 100여킬로메터 구간은 무인지경이였다. 그래서 망망한 림해속에 숨어있는 이 마을을 하늘아래 첫동네라 하였다. 
  
내두산에 진주한 인민혁명군은 로천무대를 가설하고 무기탈취투쟁, 녀성해방 등 내용을 담은 작품과 일제의 만행을 폭로한 작품을 공연하였다. 한편 정치공작원들은 주민들에게 일제를 쳐부셔야 한다는 도리를 선전하였다. 중공안도구위행동위원회에서는 군중대회를 열고 낡은 구장제를 페지하고 정권의 성격을 띤 농민위원회를 수립하였다. 
  
서부원정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은 1935년 후반기부터 남북만에로의 간고한 원정을 시작했다. 

1935년 8월, 인민혁명군 제2군 정치부 주임 리학충은 제2퇀의 2련과 3련의 150여명으로 서부원정대를 조직하고 처창즈를 떠나 무송을 지나 몽강지구로 나갔다. 서부원정의 목적은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련계를 맺은후 동남만유격구를 한데 련결시켜 료녕, 길림 두 성 변계지대에 유격근거지를 건립, 련합작전을 벌리려는데 있었다. 
  
8월말, 서부원정대는 제1군의 강남유격구에 도착, 먼저 1군 제8퇀과 승리적으로 회사했다. 리동광 등 제1군 관병들과 유격구군중들은 제2군 서부원정대를 열렬히 환영했다. 10월 4일, 몽강현 나이굉부근에서 제1군과 제2군 간부련석회의를 거행했다. 회의에서 쌍방은 자기군의 활동지구와 항일투쟁정황을 소개하면서 투쟁경험을 교류했다. 아울러 련합작전하여 안도현소재지를 중심으로 길료변경유격구를 개척할문제와 전 동북항일정부 및 항일련군총사령부건립문제에 대하여 의견을 교환하고 상응한 결의를 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과 제2군의 회사로 하여 동만항일유격구를 분할하고 포위하려던 적들의 음모는 철저히 실패하고말았다. 두 군의 회사는 또 동만과 남만의 두유격구를 하나로 이어 놓아 유격전쟁가운데서 밀접히 배합하면서 협동작전하는데 유리하게 했으며 항일련군 제1로군의 창건을 훌륭한 토대를 닦아놓았다. 동시에 북만지구의 제3, 제4, 제5, 제6군 및 기타 항일무장부대와 련계하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었다. 

제2군은 서부원정대는 승리적으로 임무를 완수한후 몽강을 떠나 1935년 11월 내두산유격근거지로 돌아왔다. 
  
내두산보위전 

내두산근거지를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던 일본군은 1935년 겨울, 안도현으로부터 악명이 자자한 리선도“토벌대”와 안도현소재지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박격포부대, 위만경찰, 위만군 등 800여명 병력을 동원하여 내두산을 향해 쳐들어왔다. 
  
그때 제2군 주력은 적후에 들어가 유격활동을 벌리고있는 상황이여서 내두산근거지에는 두 개 련 병력과 후근기관일군들뿐이였다. 적아간의 력량대비가 비록 현저했으나 절대 물러설수는 없었다. 군장 왕덕태는 견정하게 최전선에 나서서 전투를 지휘하면서 완강하게 적과 맞서 싸웠다. 적들은 련속하여 진공해왔으나 전사들은 목숨으로 진지를 사수하면서 한차례 또 한차례의 공격을 격퇴시켰다. 첫날 전투에서 적들은 10구의 시체를 남기고 물러났다. 
  
이튿날 적들은 또다시 삼면으로 포위공격해왔다. 군장 왕덕태는 좌우부대에 적들의 공격을 끝까지 버텨내라고 명령한후 한 개 부대를 인솔하여 정면으로 반격해나갔다. 아군의 드센 반격에 적들은 어쩌지 못하고 물러나고말았다. 
  
전투가 치렬해지면서 우리 군은 병력이 부족하여 아동단, 녀전사, 부상병까지 전투에 투입시키지 않으면 안되였다. 군중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밥과 물, 탄약을 최전선에까지 날라왔다. 
  
적들의 병력을 분산시키기 위해 왕덕태는 소분대습격전을 벌리였다. 소분대는 사면으로 적들을 들이쳐 안절부절 못하게 만들어놓았다. 날이 갈수록 적들은 사기가 떨어지고 아군은 투자가 앙양되였다. 시기가 성숙되였음을 간파한 왕덕태는 전방위적인 공격을 명령, 맨앞장에 서서 전사들을 이끌고 적진으로 돌격해들어가 백병전을 벌리였다. 한창 격투를 벌리고있을 때 아군 소분대는 민첩하게 적들의 등뒤로 달라붙어 번개마냥 습격전을 벌리였다. 하여 적들은 앞뒤로 포위된 형국이 되고 말았다. 어쩔수 없었던 적들은 부랴부랴 산아래로 철퇴해버리고말았다. 내두산을 한입에 삼켜버리려고 기염을 토하던 적들은 패배의 쓴맛을 보지 않을수 없었다. 또한 제일 추운 겨울이라 엄한 추위까지 덮쳐들어 더는 견딜수 없었던 것이다. 
  
이번 전투에서 아군은 적 300여명을 소멸하고 대량의 무기와 탄약을 로획했으며 승리적으로 내두산유격근거지를 보위했다. 왕덕태주력부대가 녕안으로 전이해간후 적들은 더 많은 병력을 동원해가지고 다시 내두산을 진공해왔다. 1936년 1월 일만군 “토벌대”는 미친 듯이 쳐들어왔다. 근거지군민들은 적들의 두차례 진공을 필사적으로 물리쳤다. 그러나 군사력의 뚜렷한 차이로 하여 적들의 진공을 더는 격퇴할수 없게 되었다. 더 큰 손실을 막기 위해 군민들은 주동적으로 근거지를 버리고 무송방면으로 전이했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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