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건국일에 모주석의 조선어 통역을 맡은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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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09-03-31 12:29|본문
중국 건국일에 모주석의 조선어 통역을 맡은 인물
- 새 중국 초대 일어, 조선어 통역 최빈 선생 인터뷰
최빈 선생은 풍부한 경험을 갖고있는 저명한 일어, 조선어 통역원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될 무렵에 벌써 신화통신사 총사에서 통역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주석이 천안문성루에서 중화인민공화국 창건을 선포하기 바로 5분전에 모주석의 첫 조선어통역을 맡았던 인사이다.
그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외기자단 성원으로 전선에 나갔다가 정전담판회의장 통역으로 남아 3년간 사업했으며 1954년에 귀국해 외교부에서 기자관리책임을 맡았다.
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최빈 선생을 알게 돼 그의 집까지 방문한 적이 있었다. 기자는 최빈 선생의 집 서재벽에 걸려있는 액자에서 저우언라이 총리의 통역을 하고있는 최빈 선생의 사진을 보면서 궁금한 생각이 들어 그의 지나온 경력을 묻기 시작했다.
올해 여든이 넘었지만 태극권을 30년이나 연마해 온 덕인지 그는 아직도 정력이 왕성했으며 조각예술에 남다른 흥미와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서재는 돌조각, 나무뿌리조각, 해면과 플라스틱 조각예술품들로 꽉 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제작한 조각상이며 사진들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그후 6·25전쟁이 발발하자 그는 중외기자단 성원으로 전선에 나갔다가 정전담판회의장 통역으로 남아 3년간 사업했으며 1954년에 귀국해 외교부에서 기자관리책임을 맡았다.
기자는 우연한 기회에 최빈 선생을 알게 돼 그의 집까지 방문한 적이 있었다. 기자는 최빈 선생의 집 서재벽에 걸려있는 액자에서 저우언라이 총리의 통역을 하고있는 최빈 선생의 사진을 보면서 궁금한 생각이 들어 그의 지나온 경력을 묻기 시작했다.
올해 여든이 넘었지만 태극권을 30년이나 연마해 온 덕인지 그는 아직도 정력이 왕성했으며 조각예술에 남다른 흥미와 재능을 갖고 있었다. 그의 서재는 돌조각, 나무뿌리조각, 해면과 플라스틱 조각예술품들로 꽉 차 있었다. 그중에서도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존경의 마음을 담아 제작한 조각상이며 사진들이 가장 인기를 끌었다.
개국대전 시작 5분 전 모택동주석의 통역을
기자가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통역사업을 했으며 통역사업에 종사해오면서 가장 잊을수 없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1949년부터 신화통신사 신문국에서 통역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49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준비로 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가 개막돼 폐막될 때까지 저는 줄곧 회의취재에 참가했습니다. 어느날 제가 한창 조선어통역을 하고 있는데 주덕해(朱德海, 1911.3.5~1972.7.3) 동지가 저의 말을 듣고 ‘아니, 이거 조선족청년이구만! 일을 잘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주덕해 동지를 만나보게 됐습니다.
저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1949년 10월 1일, 개국대전이 열리던 날 천안문 성루 좌측으로부터 성루에 올라오시던 모택동주석을 위해 조선어통역을 맡았던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도 짧은 몇마디 말이어서 통역을 했다고 하기는 좀 어렵겠지만요. 그날 제가 조선대표단 성원들과 함께 천안문성루 왼켠에 서 있는데 천안문성루로 올라오시던 모택동주석께서 조선손님들을 보시고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라고 묻는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선에서 오신 분들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모택동 동지는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라고 하시며 총망히 성루 가운데로 나가시는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오후 2:55분, 5분후인 정각 3시에 모택동주석께서는 천안문 성루 한가운데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창립됐다고 전 세계에 장엄히 선포하셨습니다. 이윽고 중화인민공화국 오성붉은기가 서서히 국기게양대에 게양됐습니다.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 벅차오릅니다.
길림성 왕청현 백초구산골에서 태여난 제가, 당시 26살밖에 안됐던 제가 중화인민 공화국이 창건되기 바로 5분전에 모택동주석의 통역을 했다는 것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전 세계에 장엄히 선포하는 모주석의 목소리를 천안문 성루에서, 바로 그이의 신변에서 들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기자가 “선생님께서는 언제부터 통역사업을 했으며 통역사업에 종사해오면서 가장 잊을수 없는 일은 무엇이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잠시 생각에 잠겨있다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저는 1949년부터 신화통신사 신문국에서 통역사업을 시작했습니다. 1949년 9월, 중화인민공화국 창건 준비로 정치협상회의 준비회의가 개막돼 폐막될 때까지 저는 줄곧 회의취재에 참가했습니다. 어느날 제가 한창 조선어통역을 하고 있는데 주덕해(朱德海, 1911.3.5~1972.7.3) 동지가 저의 말을 듣고 ‘아니, 이거 조선족청년이구만! 일을 잘 하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날 저는 처음으로 주덕해 동지를 만나보게 됐습니다.
저에게 가장 잊혀지지 않는 일은 1949년 10월 1일, 개국대전이 열리던 날 천안문 성루 좌측으로부터 성루에 올라오시던 모택동주석을 위해 조선어통역을 맡았던 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너무나도 짧은 몇마디 말이어서 통역을 했다고 하기는 좀 어렵겠지만요. 그날 제가 조선대표단 성원들과 함께 천안문성루 왼켠에 서 있는데 천안문성루로 올라오시던 모택동주석께서 조선손님들을 보시고 ‘어디서 오신 분들이십니까?’라고 묻는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조선에서 오신 분들입니다’라고 말씀드렸더니 모택동 동지는 ‘환영합니다, 환영합니다!’라고 하시며 총망히 성루 가운데로 나가시는것이었습니다.
그때는 오후 2:55분, 5분후인 정각 3시에 모택동주석께서는 천안문 성루 한가운데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창립됐다고 전 세계에 장엄히 선포하셨습니다. 이윽고 중화인민공화국 오성붉은기가 서서히 국기게양대에 게양됐습니다.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때 그 순간을 생각하면 가슴이 막 벅차오릅니다.
길림성 왕청현 백초구산골에서 태여난 제가, 당시 26살밖에 안됐던 제가 중화인민 공화국이 창건되기 바로 5분전에 모택동주석의 통역을 했다는 것과 중화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전 세계에 장엄히 선포하는 모주석의 목소리를 천안문 성루에서, 바로 그이의 신변에서 들었다고 생각하니 정말 감개무량합니다.
이것은 저의 통역 생애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역사적 추억으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
주더(주덕) 위원장과 저우언라이 총리의 통역을 맡고
“50년대의 어느 국경절날 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주더 위원장이 천안문성루에서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을 회견할 때 저는 그의 통역을 맡은적이 있습니다. 그날 우리는 천안문성루에 빙 둘러놓은 의자에 앉아 광장에서 진행되는 경축행사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경이로운 것은 그때 방문 온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이 바로 제가 조선정전담판대표단 통역으로 있을 때 조선인민군신문사 기자로 나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던 옛 친구었습니다. 그날 오랜 전우를 북경에서 다시 만나게 돼 정말 반가웠습니다.”
내가 저우언라이 총리와 함께 찍은 그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인가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진은 1959년 9월말, 국경절 전야에 저우언라이 총리의 초청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 행사에 참가하러 온 중일우호인사 마쯔무라 겐조와 저우언라이 총리가 저수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입니다. 저는 그때 일어통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늘 이 사진을 보면서 경애하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그리고 또 젊은 시절의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들을 더듬어보고는 합니다."
이렇게 허두를 뗀 최빈 선생은 그때의 정경을 영화필림을 돌리듯이 거침없이 돌이켜보았다.
“50년대의 어느 국경절날 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주더 위원장이 천안문성루에서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을 회견할 때 저는 그의 통역을 맡은적이 있습니다. 그날 우리는 천안문성루에 빙 둘러놓은 의자에 앉아 광장에서 진행되는 경축행사를 구경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경이로운 것은 그때 방문 온 조선중앙통신사 사장이 바로 제가 조선정전담판대표단 통역으로 있을 때 조선인민군신문사 기자로 나와 함께 일한 적이 있었던 옛 친구었습니다. 그날 오랜 전우를 북경에서 다시 만나게 돼 정말 반가웠습니다.”
내가 저우언라이 총리와 함께 찍은 그의 사진을 가리키며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것인가고 묻자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사진은 1959년 9월말, 국경절 전야에 저우언라이 총리의 초청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 국경절 행사에 참가하러 온 중일우호인사 마쯔무라 겐조와 저우언라이 총리가 저수지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장면입니다. 저는 그때 일어통역을 맡았습니다. 저는 늘 이 사진을 보면서 경애하는 저우언라이 총리를, 그리고 또 젊은 시절의 잊을수 없는 아름다운 나날들을 더듬어보고는 합니다."
이렇게 허두를 뗀 최빈 선생은 그때의 정경을 영화필림을 돌리듯이 거침없이 돌이켜보았다.
“마쯔무라 겐조는 중일우호인사로 중일친선을 위해 많은 일을 한 일본자유민주당 원로었습니다. 중국을 방문하던 당시 그는 이미 70여세었습니다. 일본에서는 이렇게 큰 대표단의 중국방문을 크게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3명의 수행기자가 따라왔더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일본대표단은 아무 곳이나 마음대로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저우언라이 총리께서는 마쯔무라 겐조에게 ‘당신이 가고싶은 곳은 다 갈수 있도록 해드릴테니 이야기하십시오’라고 했습니다.
마쯔무라 겐조는 자기는 중국의 삼국지에 대해 흥미를 갖고 있는데 삼국전적지를 답사하고싶다고 했습니다. 저우언라이 총리께서는 료승지더러 그를 안내하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사업이 분망한 료승지가 함께 동행할수 없어 그의 부인 경보춘(經普椿) 여사가 동행하게 됐습니다. 경보춘 여사는 한달동안 대표단을 안내하면서 북경, 서안, 연안, 중경, 성도, 무한, 상해, 계림, 광주와 곤명을 돌았습니다.
마쯔무라 겐조는 중국의 문화에 대해 아주 익숙히 알고 있었지요. 어느날 배를 타고 중경을 떠나 장강삼협을 내려오는데 백제성을 지나면서 그가 이백의 시 한수를 일본어로 멋지게 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중국문화에 대해 이해가 깊지 못한 젊은 일본기자들은 그에게 어느 시인의 시인가 하면서 천천히 다시 읊어달라고 졸랐습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6개국 언어에 통달한 대단한 분이시었습니다. 한번은 제가 마쯔무라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저우언라이 총리가 뒤로부터 나오시며 ‘곤니찌와!’하고 일어로 인사했습니다. 그러자 일본기자들은 신이 나서 저우언라이 총리에 대한 취재에 달라붙었습니다. 저우언라이 총리는 자기는 여섯개 나라의 말을 할수 있기 때문에 6개국 식당에 가 보이(웨이터)로 일하면 합당할 것이라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정전담판회의장 통역으로 3년간 조선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지 얼마 안돼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미군이 유엔의 16개 참가국을 동원해 인천에 상륙하자 전세는 급변해 전쟁의 불길이 압록강변까지 미치게 됐습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 유엔군은 다시 38선이남까지 밀려났습니다.
1951년 7월, 중국에서는 두명의 영국기자를 포함해 인민일보, 광명일보, 신민보, 대공보 등 매체기자들로 중외기자단을 구성해 조선정전담판장소에 나가 취재하게 했습니다. 그때 저는 기자단 무전대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자단 숙소가 두번이나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영국기자를 포함한 기자단이 철수하게 됐습니다. 저는 정전담판장소인 개성 판문점에 남아서 정전담판회의장 통역을 맡게 됐습니다.
전쟁기간에는 외국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러 다니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밤을 도와 현장까지 가야 하는데 불을 켜면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기 때문에 그냥 어둠을 헤치며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자동차가 벼랑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 저는 귀국했습니다. 조선에서 보낸 3년간 역시 저의 짧은 생애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나날들입니다.
지금도 당시 조선 개성 판문점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은 해마다 모임을 가지고 즐겁게 흘러간 옛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다음 해에도 꼭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건만 벌써 몇몇 친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습니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창건된지 얼마 안돼 6·25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미군이 유엔의 16개 참가국을 동원해 인천에 상륙하자 전세는 급변해 전쟁의 불길이 압록강변까지 미치게 됐습니다. 1950년 10월 25일, 중국인민지원군이 참전, 유엔군은 다시 38선이남까지 밀려났습니다.
1951년 7월, 중국에서는 두명의 영국기자를 포함해 인민일보, 광명일보, 신민보, 대공보 등 매체기자들로 중외기자단을 구성해 조선정전담판장소에 나가 취재하게 했습니다. 그때 저는 기자단 무전대를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자단 숙소가 두번이나 미군비행기의 폭격을 받아 영국기자를 포함한 기자단이 철수하게 됐습니다. 저는 정전담판장소인 개성 판문점에 남아서 정전담판회의장 통역을 맡게 됐습니다.
전쟁기간에는 외국기자들과 함께 취재하러 다니면서 여러 번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밤을 도와 현장까지 가야 하는데 불을 켜면 미군 비행기의 폭격을 받기 때문에 그냥 어둠을 헤치며 나가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하루 자동차가 벼랑에 떨어지기도 했습니다. 6·25전쟁이 끝나 저는 귀국했습니다. 조선에서 보낸 3년간 역시 저의 짧은 생애에서 영원히 잊을수 없는 나날들입니다.
지금도 당시 조선 개성 판문점에서 같이 일했던 친구들은 해마다 모임을 가지고 즐겁게 흘러간 옛시절을 회상하곤 합니다. 다음 해에도 꼭 다시 만나자고 굳게 약속하건만 벌써 몇몇 친구는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됐습니다.”
여기까지 말하고 그는 오른손등으로 축축히 젖어든 눈시울을 닦는 것이었다.
“저는 1954년 5월에 귀국해 외교부에 배치됐습니다. 당시 저는 외국기자관리 사업을 책임지고 있었습니다.
1964년, 소련 수상 꼬쉬낀이 월남을 방문하고 귀국하는 도중 북경에 잠간 머물렀는데 저우언라이 총리께서 공항에 나가 비행기 승강대 옆에서 꼬쉬낀 수상과 악수하고 헤어졌습니다. 이것이 제가 마지막으로 본 저우언라이 총리였습니다.”
최빈 선생은 이와 같이 화려하고 자랑스런 경력을 가지고있는 분이다. 하지만 마냥 겸손하기만 한 그는 여태껏 자기의 지난 일들을 남과 이야기하려 하지 않았으며 심지어 자기 자식들에게도 이런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다고 한다.
만년을 어떻게 보내고 있느냐고 묻자 최빈 선생은 호탕하게 웃으시면서 자기는 조각예술을 즐기고 있는데 돌조각이나 나무뿌리조각, 해면이나 플라틱스 조각들에 커다란 흥미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매일 많은 시간을 조각에 할애한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나 그의 집을 나설 때 그는 자기가 손수 정성들여 만든 저우언라이 총리 조각을 기자의 손에 쥐여주었다. 절절한 마음을 담아 만든 것이어서 그런지 그 조각은 너무나도 훌륭해보였다.
【최빈 선생 략력】
길림성 왕청현 백초구 출생.
1948년 5월 화북문법(문과, 법학)학원 졸업. 그 전 해에 중국공산당 지하당 조직의 영도밑에 진행되는 학생운동에 참가(화북문법학원은 그후 중국인민대학에 합병).
1949년 2월부터 1949년 9월까지(26살) 중국공산당 북평시 제8구위원회 신화통신사 총사에서 사업.
1949년 9월부터 1951년 7월까지. 국제신문국에 전근돼 일어, 조선어 통역에 종사.
1951년 7월부터 1954년 5월까지 중국 중외기자단 성원으로 조선 개성 판문점에 가 통역을 하다가 그후 조선에 남아 중국인민지원군 정전담판대표단 통역으로 사업. 1954년 5월 귀국.
1954년 5월부터 1958년 12월까지 외교부 보도국에서 근무.
1958년 12월부터 1987년 11월까지 중국국제문제연구소에서 사업. 1987년 11월 이직.
만년을 행복하게 보내고있는 최빈 선생 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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