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험 10번에 한식 조리기능사가 된 50대 동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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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dmin| 작성일 :11-06-30 09:29|본문
H2비자로 한국에 입국하여 재외동포기술교육 대상에서 제외됐지만 학원 기술공부를 자원 신청해 합격 율이 30%안팎(한국인 포함)인 한식조리기능사 국가기술자격증을 취득한 한 조선족 아줌마가 있다. 한국 체류자격을 위해 부득이 학원을 선택해 대충 공부시간을 채우는 대다수 동포들과 대조되는 선택을 한 그 녀는 중국 연변조선족자치주 왕청현에서 온 윤순녀(54세)씨이다.
불혹지년을 훨씬 넘긴 그녀가 주변 친구들로부터 “고생을 사서 하는 바보”라는 소리까지 들어가며 “고역이나 다름 없었다”는 기술공부를 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성공에 이른 동력은 무엇일까?
불우한 경력 삶의 의욕 고취
2003년도 한국 행의 무산은 윤씨를 파멸의 나락까지 몰고 갔다. 뇌출혈로 누운 남편(2008년도 사망)이나 중학교에 다니는 아들애나 모두 돈이 필요했고 게다가 당시 브로커에게 사기 당한 2만 위안도 전부 꾼 돈이었다.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어요. 죽을 생각까지 들었어요”
윤씨는 지금도 절망적이던 그때를 떠올리기 싫어한다.
“애를 생각하며 마음을 돌렸고 이판사판이니 갈 데까지 가보자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어요.”
그는 무슨 방법을 대서라도 가정을 영위해야 했다. 어릴 때부터 가수가 소원이었던 그는 매월 900원씩 받으며 한 업소에서 매일 네 시간씩 노래를 불렀다. 실력부족으로 유일한 밥줄이 끊길 가봐 반년 동안 학비를 내며 노래학원을 다니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한국 행을 포기하지 않고 매년 수 차례씩 선양을 오가며 한국대사관에 비자를 신청했지만 번번이 좌절됐다. 이 같이 심신적으로 어려운 상황이 이어졌지만 그는 열심히 노래를 불렀고 중학교를 졸업한 아들을 컴퓨터학원에까지 입학시켰다.
조각났던 한국 행 꿈이 2008년도 조카의 초청으로 의외적으로 이루어졌다. 그처럼 간절히 바라던 한국 행이었지만 비행기에 앉은 그는 결코 편하지 않았다.
“새로운 고생의 시작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며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렸어요.”
차별된 대우 자존심 자극
윤씨는 충청남도의 한 시골식당을 잠깐 거쳐 서울의 한 복어 집에서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처음 해보는 일이라 많이 힘들기도 했지만 열심히 하겠다는 각오가 남달랐던 그는 일을 빨리 배웠고 점차 주방장의 유력한 조수가 되었다.
1년쯤 되었을 때 조선족주방장이 갑자기 귀국하게 되자 윤씨가 복어 잡기에서 회 치기, 육수 만들기에 이르기까지 모든 주방장의 일을 전담하게 되었다. 일 양이나 노동 강도가 훨씬 늘어났지만 그의 노임은 수차 요구에도 불구하고 오르지 않았다. 그런대로 주방장 대타로 7개월간 일했을 무렵 가게주인이 한국인 김씨를 소개해주며 일을 가르치라 했다. 그녀는 열심히 일을 하는 한편 정성을 다해 김씨에게 기술을 전수했다. 그런 제자나 다름없던 김씨가 첫 시작부터 자기보다 훨씬 높은 노임을 받았다는 사실을 윤씨는 나중에 알게 되었다. 가게주인은 사정이 어려워 노임을 올려줄 수 없다고 말했고 김씨는 자기가 한식조리사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정말 큰 상처가 되었어요. 조선족이란 이유로 여자라는 이유로 수준미달이란 이유로 차별대우를 받는 것이 분하기도 하고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어요.”
그녀는 소위의 수준차이를 극복하고 한국사람 못지 않게 당당히 일하려는 결심을 굳히고 요리학원을 신청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 피나는 노력
윤씨는 복어 집의 일과 학원 기술교육을 조율하기 위해 학원 관계자를 찾아 평일의 수업을 주말에 집중시켜 강의 받도록 했다.
필기과목의 식품위생 및 법규, 공중 보건, 식품학, 조리이론과 원가계산 등 엄청난 양의 수업내용을 하루 동안 강사로부터 배우고 평일에는 스스로 습득해야 했다. 매일 12시간의 노동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는 피로를 이겨내고 공부를 시작했는데 혈기 왕성한 젊은이가 감당하기에도 벅찬 일과였다. 공부하다가 졸고 졸다가 다시 공부를 하며 밤을 새우기를 밥 먹듯이 했고 낮에는 아무리 힘들어도 주방 일에 전력했다. 늦게 시작한 공부라 가장 큰 걸림돌은 나이였다. 기억력이 따르지 못하다 보니 금방 읽은 글도 돌아서면 잊곤 했다. 하여 그는 화장실을 가나 버스를 타나 늘 손에 필기노트를 들고 다녔다.
일과 공부를 병행하다 보니 심신만 피곤해지고 공부효과가 별로 나지 않았다. 몇 차례의 필기시험에 도전하여 탈락의 고배를 마신 그는 아예 복어 집의 일을 그만두고 일당을 조금씩 뛰며 공부에 전념했다.
이 같이 피나는 노력을 통해 그는 다섯 번의 도전 끝에 필기시험에 통과했고 49가지 한정식 요리법을 장악해야 하는 실기시험도 다섯 번 만에 정복했는데 학원공부를 시작해 9개월만이었다.
지난 5월 27일 한국산업인력공단의 도장이 찍힌 한식조리기능사 자격증을 손에 들고 웃음과 울음을 함께 쏟아내는 그를 향해 식당의 손님과 동료들은 모두 “정말 대단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빨리 공부를 마쳐 빨리 취직해야 되는데 하는 조급함과 상실감, 실망이 한꺼번에 북받치는 정말 힘든 과정도 있었지만 꼭 해내려는 욕망이 결국 모든 것을 이겨내게 했어요” 윤씨는 지난 힘겨웠던 시간을 이렇게 떠올렸다.
동포들 반드시 기술수준 제고해야
상처받은 자존심 때문에 시작한 기술공부이긴 했지만 윤씨는 공부를 하면서 유서 깊은 한국의 음식문화에 흠뻑 빠져들어 갔고 자신의 선택에 자부심을 느끼기 시작했다.
“조선족들이 한국 문화에 대한 요해가 깊지 못하고 기술수준이 따르지 못하다 보니 직장에서 무시당하고 차별당하기 쉬워요. 때문에 조선족들도 열심히 기술수준을 높여 떳떳하게 일을 해야죠.”
그는 현재 C3비자로 한국에 입국해 체류자격에만 신경을 쓰고 기술습득을 소홀히 하는 동포들을 두고 “너무 돈, 돈 해서는 안돼요. 멀리 내다보고 장차 더 큰 돈을 벌 수 있도록 자신의 수준을 제고해야죠.”라며 조선족들의 인식변화를 강조했다.
현재 서울의 모 한식집에서 일하고 있는 윤씨는 “피로가 풀리면 복어요리자격증에도 도전할 것”이라며 “자기 이름으로 된 복어 집을 갖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