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음신이 된 독립운동가들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2-04-09 05:14|본문
중음신이 된 독립운동가들
년세가 지긋한 분들을 인터뷰하다보면 <>하고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 오매에도 그리던 광복을 점 더 늦게 왔더면 하는 그들의 바램이 결코 야속한 것이 아니다.
광복은 8월 15일, 그들은 바야흐로 누렇게 익어가는 농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고향에 땅뙈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피붙이가 있어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 가을을 해서 로자라도 건지면 떠나려고 했었는데 발목이 잡혔다. 광복 전 동북과 관내에 거주한 조선인은 220만, 광복과 더불어 한반도로 떠나간 사람이 무려 100만이라고 하니 그 나머지는 대체로 소작농사에 명줄을 건 최하층민들이였다. 일제의 민족리간책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이나 다름없이 중국인들의 눈에 든 가시처럼 비쳐온 조선인들은 십자거리에 나온 쥐 모양으로 타살을 당하기도 했다. 무정부 무법천지에 내몰린 적수공권의 조선인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한 때 일부 유지인사들은 귀국을 미루고 동포들의 생명안전을 보호하는 사업에 헌신했다.
<>
민족주의계렬의 독립운동가 박재호(朴在浩 1920-2006년)가 중국에 남게 된 자기의 경위를 적은 일기의 한 대목이다.
오라지 않아 동북으로 국민당 군이 들어왔고 국민당을 업고 주한대표단이 왔다. 조선인이 거주하는 곳에는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한 민족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만들어졌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일어나고 국민당은 겨우 3년을 버티고 관내로 쫓겨났다. 민족단체들도 공산당에 의해 일망타진되였고 미처 국민당을 따라가지 못한 민족주의자들도 타도되였다. 한국전쟁을 경과하고 중국이 한국하고 적대국가로 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지옥과도 같은 긴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사는 김좌진의 외손녀 위련홍은 말한다.
<<우리 어머니(김강석 1928-2002년)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기 전까지 감히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못했어요. 김좌진장군의 딸이라는 것이 탄로가 났다면 어머니는 벌써 오래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겠지요.>>
길림성 교하시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박상래(朴尙來: -1929년)손녀 영희(英姬 1953년 생)은 말한다.
<<1930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여 해방후 아버지는 투쟁을 맞았고 우리 형제들도 갖은 기시와 멸시를 받았답니다.>>
앞의 주인공 박재호는 우파분자로 3년을 가혹한 로동개조를 당했었고 문화대혁명 때는 반혁명이라는 루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촌의 공산당 간부는 이미 어른이 된 두 아들이 혹시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로파심으로 억지 감투를 씌워서 아들을 아버지한테 딸려서 투옥시키는 해프닝도 벌렸다.말하자면 요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껴파는 것과 같다고 하리라.
이제는 모두가 지난 일이였다.중국 정부는 그들한테 무죄를 선고했다.공산당이 령도하는 국가에서 국민당과 관련된 한국림시정부나 한국독립당 소속으로 활동한 사람한테 훈장을 발급할리는 없다.
민족주의 립장에서 보면 그들의 활동을 무죄로 보는 것은 두 번 다시 죽이는 일이 아닐수 없다.그러나 그들을 챙겨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곳은 오직 한국이다.중한수교 이후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훈장을 타고 그 후손들이 한국에 가서 영주하기도 했다.그러나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력사속에 묻혀버렸는지 모른다.
위련홍은 말한다.
<<어머니는 생전에 한국 보훈처로부터 김좌진의 딸로 인정을 받아 한국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할아버지(김좌진)의 후광을 입은거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사망하고 제가 영주권을 신청하자 보훈처에서는 어머니가 김좌진의 딸이라는것을 립증하라는 거얘요.>>
영희는 말한다.
<<할아버지(박상래)는 1925년에 독립군총재 리탁으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았고 <교하현지>에도 할아버지가 3.1학교를 꾸리고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분명히 있어요.그런데 보훈처에서는 증빙성이 없다는 겁니다.>>
박재호는 생전에 한국 보훈처에 자기의 사항을 적어보냈다.그런데 증거 불충분으로 서류가 되돌아왔다.그와 함께 활동했던 친구는 1970년대에 한국에서 독립유공자로 되였고 그 친구가 생전에 쓴 책에도 분명히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었다.
광복후 중국에 남았던 독립운동가들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결코 죽음으로 종지부가 찍힐 사항이 아니다.
그들의 령혼은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중음신이 되여 저승문전에서 방황하고 있을 줄로 안다.밤이면 밤마다 중음신이 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혼백이 꿈속에 찾아와 후손들은 가끔 놀라서 깬다.
/류연산 (연변대학 교수)
년세가 지긋한 분들을 인터뷰하다보면 <>하고 고향에 대한 향수에 젖는다. 오매에도 그리던 광복을 점 더 늦게 왔더면 하는 그들의 바램이 결코 야속한 것이 아니다.
광복은 8월 15일, 그들은 바야흐로 누렇게 익어가는 농사를 버리고 떠날 수가 없었다. 고향에 땅뙈기가 있는 것도 아니고 피붙이가 있어서 기다리는 것도 아니라 가을을 해서 로자라도 건지면 떠나려고 했었는데 발목이 잡혔다. 광복 전 동북과 관내에 거주한 조선인은 220만, 광복과 더불어 한반도로 떠나간 사람이 무려 100만이라고 하니 그 나머지는 대체로 소작농사에 명줄을 건 최하층민들이였다. 일제의 민족리간책으로 말미암아 일본인이나 다름없이 중국인들의 눈에 든 가시처럼 비쳐온 조선인들은 십자거리에 나온 쥐 모양으로 타살을 당하기도 했다. 무정부 무법천지에 내몰린 적수공권의 조선인들은 오도 가도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그러한 때 일부 유지인사들은 귀국을 미루고 동포들의 생명안전을 보호하는 사업에 헌신했다.
<>
민족주의계렬의 독립운동가 박재호(朴在浩 1920-2006년)가 중국에 남게 된 자기의 경위를 적은 일기의 한 대목이다.
오라지 않아 동북으로 국민당 군이 들어왔고 국민당을 업고 주한대표단이 왔다. 조선인이 거주하는 곳에는 한국독립당을 중심으로 한 민족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만들어졌다. 그러나 국공내전이 일어나고 국민당은 겨우 3년을 버티고 관내로 쫓겨났다. 민족단체들도 공산당에 의해 일망타진되였고 미처 국민당을 따라가지 못한 민족주의자들도 타도되였다. 한국전쟁을 경과하고 중국이 한국하고 적대국가로 되면서 민족주의자들과 그 후손들은 대를 이어 지옥과도 같은 긴긴 나날을 보내야 했다.
흑룡강성 목단강시에 사는 김좌진의 외손녀 위련홍은 말한다.
<<우리 어머니(김강석 1928-2002년)는 문화대혁명이 끝나기 전까지 감히 아버지의 이름을 밝히지 못했어요. 김좌진장군의 딸이라는 것이 탄로가 났다면 어머니는 벌써 오래전에 이 세상 사람이 아니였겠지요.>>
길림성 교하시에 거주하는 독립운동가 박상래(朴尙來: -1929년)손녀 영희(英姬 1953년 생)은 말한다.
<<1930년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계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죄가 되여 해방후 아버지는 투쟁을 맞았고 우리 형제들도 갖은 기시와 멸시를 받았답니다.>>
앞의 주인공 박재호는 우파분자로 3년을 가혹한 로동개조를 당했었고 문화대혁명 때는 반혁명이라는 루명을 쓰고 감옥에 갔다.촌의 공산당 간부는 이미 어른이 된 두 아들이 혹시 복수할지도 모른다는 로파심으로 억지 감투를 씌워서 아들을 아버지한테 딸려서 투옥시키는 해프닝도 벌렸다.말하자면 요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껴파는 것과 같다고 하리라.
이제는 모두가 지난 일이였다.중국 정부는 그들한테 무죄를 선고했다.공산당이 령도하는 국가에서 국민당과 관련된 한국림시정부나 한국독립당 소속으로 활동한 사람한테 훈장을 발급할리는 없다.
민족주의 립장에서 보면 그들의 활동을 무죄로 보는 것은 두 번 다시 죽이는 일이 아닐수 없다.그러나 그들을 챙겨서 공정한 평가를 내릴 수 있는 곳은 오직 한국이다.중한수교 이후 적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이 훈장을 타고 그 후손들이 한국에 가서 영주하기도 했다.그러나 아직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력사속에 묻혀버렸는지 모른다.
위련홍은 말한다.
<<어머니는 생전에 한국 보훈처로부터 김좌진의 딸로 인정을 받아 한국에 다녀오기도 했습니다.할아버지(김좌진)의 후광을 입은거지요. 그런데 어머니가 사망하고 제가 영주권을 신청하자 보훈처에서는 어머니가 김좌진의 딸이라는것을 립증하라는 거얘요.>>
영희는 말한다.
<<할아버지(박상래)는 1925년에 독립군총재 리탁으로부터 표창장까지 받았고 <교하현지>에도 할아버지가 3.1학교를 꾸리고 독립운동을 한 기록이 분명히 있어요.그런데 보훈처에서는 증빙성이 없다는 겁니다.>>
박재호는 생전에 한국 보훈처에 자기의 사항을 적어보냈다.그런데 증거 불충분으로 서류가 되돌아왔다.그와 함께 활동했던 친구는 1970년대에 한국에서 독립유공자로 되였고 그 친구가 생전에 쓴 책에도 분명히 그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었다.
광복후 중국에 남았던 독립운동가들은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그러나 그들의 고통은 결코 죽음으로 종지부가 찍힐 사항이 아니다.
그들의 령혼은 안식처를 찾지 못하고 중음신이 되여 저승문전에서 방황하고 있을 줄로 안다.밤이면 밤마다 중음신이 된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혼백이 꿈속에 찾아와 후손들은 가끔 놀라서 깬다.
/류연산 (연변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