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으로 산다는 것은 (4)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페이지 정보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2-09-03 21:45|본문
조선족으로 산다는 것은 (4)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
여호길의 조선족시대
범영훼리가 멀리 인천대교를 바라고 서서히 인천항을 떠났다. 매번 항구를 떠날 때마다 나는 심수봉의 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는 민족의 비운으로 가슴을 쓰려 올려야 했다. 한국의 배가 닿는 중국의 항구마다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한국남정네들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족여자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냥 ‘스쳐도 책임져야 한다.’는 순진한 조선족여성들의 타락의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한중수교 이후 나는 중국의 웨이하이와 옌타이, 칭다오, 다롄, 톈진 등 한국의 배가 닿는 항구도시를 자주 다니게 되었다. 그때마다 당지 한족들을 만나면 제일 큰 화젯거리가 한국배가 오가는 항구였다. 한마디로 조선족여자들은 모두 갈보고 한국남자들은 모두 잡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대하는 눈길도 예전 같지를 않았다. 사회풍기를 물란시키는 '족속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부두를 가리키면서 “너 절로 가 봐라, 너들 민족이 하는 짓거리를...” 하면서 화를 버럭버럭 낸다. 솔직히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시 자기 염낭만 챙기는 한족이 아니고 바꿔서 정체성을 강조하는 한국인들 같았으면 조선족이고 한국인이고 마구 몰아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한족들 속을 다니며 민족적 볼기를 얻어맞아야 했다. 억울했지만 당연한 작가수업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아마 환장해 버렸을 것이다.
그날도 칭다오의 한 구락부에서 일을 보고 나오니 벌써 어슬녘이 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구락부 측에서 저녁을 사서 칭다오 맥주 혹은 칭다오 특유의 홍주를 마시고 있었겠지만 모두들 오간다는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나만 썰렁한 거리로 나왔다. 심란한 마음에 저녁 먹을 생각은 없고 해서 항구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으로 항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직 한국배가 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벌써 한 무리 조선족여자들이 일렬로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의 눈에는 프랭클린이 오락가락했겠지만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낙화암에서 "시작!"만 기다리고 백마강에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3000명 궁녀들의 모습처럼 처량하게 느껴졌다.
가까이에 가보니 어찌나 주어 발랐는지 여자들이 하나같이 인형 같다.
“너들 동북에는 왜 기생들 뿐이냐.”
문뜩 옛날 광둥성 친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광둥성에는 여자들이 화장하지 않는 대신에 기생들은 진하게 화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북에 와 보니 화장하지 않은 여자가 없어서 영문을 모르는 광둥성 친구가 내뱉은 말이다.
그런데 오늘 항구에 와보니 모두가 화장을 진하게 한 것이 광둥성의 창녀들은 저리가라다. 짙은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찌르고 향도 요상한 것이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다. 보나마자 한국아저씨들이 중국여자들을 구슬리려고 한국에서 주어다 준 것이다.
조물주는 왜 인간의 성기를 서로 엇비슷하게 만들어서 말썽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그냥 넉넉히 십여 가지로 구분해 놓았더라면 서로 사이즈 때문에 선뜻 붙어버리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사회풍기도 덜 문란시켰을 것이고 유부남, 유부녀들 마음도 편했으련만.
모르는 척 하고 한창 미주알고주알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여자의 등 뒤에 가서 그녀들의 지껄이는 말을 엿들어보았다.
“너는 먼저 배에서 몇 장 했니?”
“두 장밖에 못했다. 너는?”
.......
그리고는 키득거리며 한국남자들의 흉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한 장이 프랭클린 한 장 즉 100달러를 말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이 속칭 여관 안내양이고 가이드이고 돈만 주면 몸도 주는 지방 한족들이 말하는 '갈보들'이다. 말투를 들어보니 연변말투를 빼고는 다 있다. 연변여자들은 그때까지 아직 봉건속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여 노다지전선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슬쩍 하루 밤 여관방을 얼마 받느냐며 물어보니 조선말을 듣고 반짝 반기던 여자들이 금시 싸늘하게 식어진다. 그러면서 담담히 하는 말이 자기들은 한국인만 상대한단다. 년들이 한국 맛을 들여 가지고. 한국여자들이 알았으면 돌아버릴 일이다.
“그만큼 돈을 주면 안 되오?”
내가 다 잡아 명치끝을 건드리자 그 여자는 잠간 망설이는 눈치다. 이 때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더니 두 여자는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고 묻는 말에도 대꾸하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여자들이 조선족들 중에서 제일 먼저 부자가 된 여자들이다. 백마강에 제대로 곤두박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한국남자들은 팬티바람으로 백마강을 휘젓고 다니면서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곤두박인 조선족여자를 찾아 다닌 것이 장장 20년 세월이 흘렀다.
범영훼리가 멀리 인천대교를 바라고 서서히 인천항을 떠났다. 매번 항구를 떠날 때마다 나는 심수봉의 노래 ‘남자는 배 여자는 항구’를 떠올리곤 한다. 그리고는 민족의 비운으로 가슴을 쓰려 올려야 했다. 한국의 배가 닿는 중국의 항구마다에서 하염없이 바다를 바라보며 한국남정네들을 기다리고 있는 조선족여자들의 모습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냥 ‘스쳐도 책임져야 한다.’는 순진한 조선족여성들의 타락의 첫걸음이었기 때문이다.
한중수교 이후 나는 중국의 웨이하이와 옌타이, 칭다오, 다롄, 톈진 등 한국의 배가 닿는 항구도시를 자주 다니게 되었다. 그때마다 당지 한족들을 만나면 제일 큰 화젯거리가 한국배가 오가는 항구였다. 한마디로 조선족여자들은 모두 갈보고 한국남자들은 모두 잡것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나를 대하는 눈길도 예전 같지를 않았다. 사회풍기를 물란시키는 '족속들'이라는 것이다.
어떤 이들은 아예 부두를 가리키면서 “너 절로 가 봐라, 너들 민족이 하는 짓거리를...” 하면서 화를 버럭버럭 낸다. 솔직히 지금 와서 생각하면 당시 자기 염낭만 챙기는 한족이 아니고 바꿔서 정체성을 강조하는 한국인들 같았으면 조선족이고 한국인이고 마구 몰아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한족들 속을 다니며 민족적 볼기를 얻어맞아야 했다. 억울했지만 당연한 작가수업을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면 아마 환장해 버렸을 것이다.
그날도 칭다오의 한 구락부에서 일을 보고 나오니 벌써 어슬녘이 되었다. 다른 때 같으면 구락부 측에서 저녁을 사서 칭다오 맥주 혹은 칭다오 특유의 홍주를 마시고 있었겠지만 모두들 오간다는 말도 없이 종적을 감추는 바람에 나만 썰렁한 거리로 나왔다. 심란한 마음에 저녁 먹을 생각은 없고 해서 항구 방향으로 발길을 옮겼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 속으로 항구가 점점 가까워졌다. 아직 한국배가 오기에는 이른 시간이었지만 벌써 한 무리 조선족여자들이 일렬로 서서 바다를 바라보는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들의 눈에는 프랭클린이 오락가락했겠지만 내 눈에는 그 모습이 마치 낙화암에서 "시작!"만 기다리고 백마강에 뛰어내릴 준비를 하고 있는 3000명 궁녀들의 모습처럼 처량하게 느껴졌다.
가까이에 가보니 어찌나 주어 발랐는지 여자들이 하나같이 인형 같다.
“너들 동북에는 왜 기생들 뿐이냐.”
문뜩 옛날 광둥성 친구가 하던 말이 생각났다. 광둥성에는 여자들이 화장하지 않는 대신에 기생들은 진하게 화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동북에 와 보니 화장하지 않은 여자가 없어서 영문을 모르는 광둥성 친구가 내뱉은 말이다.
그런데 오늘 항구에 와보니 모두가 화장을 진하게 한 것이 광둥성의 창녀들은 저리가라다. 짙은 화장품 냄새가 코를 찌르고 향도 요상한 것이 중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물건이다. 보나마자 한국아저씨들이 중국여자들을 구슬리려고 한국에서 주어다 준 것이다.
조물주는 왜 인간의 성기를 서로 엇비슷하게 만들어서 말썽을 일으키는지 모르겠다. 그냥 넉넉히 십여 가지로 구분해 놓았더라면 서로 사이즈 때문에 선뜻 붙어버리지 못했을 것이고 그러다 보면 사회풍기도 덜 문란시켰을 것이고 유부남, 유부녀들 마음도 편했으련만.
모르는 척 하고 한창 미주알고주알 신나게 이야기를 주고받는 두 여자의 등 뒤에 가서 그녀들의 지껄이는 말을 엿들어보았다.
“너는 먼저 배에서 몇 장 했니?”
“두 장밖에 못했다. 너는?”
.......
그리고는 키득거리며 한국남자들의 흉을 보고 있었다. 그들이 말하는 한 장이 프랭클린 한 장 즉 100달러를 말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들이 속칭 여관 안내양이고 가이드이고 돈만 주면 몸도 주는 지방 한족들이 말하는 '갈보들'이다. 말투를 들어보니 연변말투를 빼고는 다 있다. 연변여자들은 그때까지 아직 봉건속박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여 노다지전선을 모르고 사는 것 같았다.
내가 슬쩍 하루 밤 여관방을 얼마 받느냐며 물어보니 조선말을 듣고 반짝 반기던 여자들이 금시 싸늘하게 식어진다. 그러면서 담담히 하는 말이 자기들은 한국인만 상대한단다. 년들이 한국 맛을 들여 가지고. 한국여자들이 알았으면 돌아버릴 일이다.
“그만큼 돈을 주면 안 되오?”
내가 다 잡아 명치끝을 건드리자 그 여자는 잠간 망설이는 눈치다. 이 때 옆에 있던 여자가 그녀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 속삭이더니 두 여자는 다시는 돌아보지도 않고 묻는 말에도 대꾸하지 않는다.
지금 돌이켜 보면 그 여자들이 조선족들 중에서 제일 먼저 부자가 된 여자들이다. 백마강에 제대로 곤두박인 것이다. 그리고 그때로부터 한국남자들은 팬티바람으로 백마강을 휘젓고 다니면서 치마폭을 뒤집어쓰고 백마강에 곤두박인 조선족여자를 찾아 다닌 것이 장장 20년 세월이 흘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