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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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2-12-16 11:46|본문
조선인들의 몸을 마구 수색하는 일제경찰들
“8.1”길돈폭동
분노한 폭동대오 지방군경과 격돌하고
악에 받친 지방군벌 피비린 탄압 강행
폭동의 획책
“1930년 중국공산당중앙위원회는 제2차 ‘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배하에 ‘혁명세력의 회복기’를 ‘혁명의 고조기’로 오인하고 전국적인 대폭동을 발동하여 ‘한개 성 또는 몇 개 성에서 먼저 혁명승리를 쟁취함으로써 전국혁명승리를 달성, 나아가서는 세계혁명의 승리를 추진해야 한다’고 호소하였습니다. 물론 연변에서도 례외없이 그 영향을 받았습니다. 1930년 8월 1일, 돈화, 액목 지구의 조선인들이 일으킨 무장폭동이 그 실례입니다.”
연변대학 력사학교수 박창욱선생은 1930년의 “‘8.1’길돈폭동(‘8.1’吉敦暴動)”의 력사적배경과 규모를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중공중앙 “8.7”긴급회의의 “좌”경로선을 계속 집행하고있던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연변의 “붉은 5월 투쟁”을 거듭 긍정하면서 새로운 투쟁을 벌릴 것을 지시하였다. 7월중순 중공만주성위로 사업회보를 갔던 중공연변특별지부서기 왕경이 돌아왔다. 그는 “붉은 5월 투쟁”경험교훈을 총화하고 연변의 대중운동을 한걸음 더 추진하기 위하여 “8.1”봉기를 발동할 것을 결의하였다.
“‘8.1’길돈폭동은 얼마전에 있었던 ‘5.30’폭동과 달랐습니다. ‘5.30’폭동에서 주요한 예봉을 일제에게 돌렸다면 이번 폭동에서는 그 예봉을 주요하게 중국지방군경에게 돌린것입니다. 폭동의 목적은 중국지방군경의 무기를 탈취하여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적색유격대를 창건하며 지방쏘베트정권을 수립하기 위한것이였다.”
박창욱선생은 폭동의 목적을 설명했다.
1930년 7월중순, 중공만주성위에서는 김(金), 왕(王) 성씨를 가진 두 사람을 순시원으로 연변에 파견하였다. 순시원은 돈화에 간후 모아산(현재의 현유향 모아산)에서 간부련석회의를 열고 폭동에 해당된 문제들을 토의하고 폭동계획을 연구하였다. 회의에서는 이번 폭동의 총지휘를 중공길돈림시당부의 마천목(馬天穆)이 맡는다고 선포하였다. 조선인이며 황포군관학교 졸업생인 마천목은 북벌전쟁이 실패한후 연변에 돌아와 혁명활동을 벌리고있었다.
총지휘산하에 행동위원회를 설치하였는데 황세형(黃世亨)이 위원장을 맡고 조직부장을 강세일(姜世一), 선전부장을 한광우(韓光宇)가 맡았다. 총지휘부산하에 3개 폭동대대를 두었다.
제1대대는 액목대대로서 김명균(金明均)의 지휘하에 7개 파괴대와 2개 습격대로 편성, 총인원수는 200여명이였다. 파괴대는 신참-길림간의 2개 철교를 파괴하고 신참-교하, 교하-내자산, 교하-황송전, 교하-이갑자 구간의 전선을 끊고 습격대는 이갑자구와 관지의 주둔군 병영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제2대대는 돈화대대로서 강세일, 리학경이 지휘했다. 총인원수는 400여명이였다. 이들은 남황니허의 현공안국 제3분주소, 신개도보위단 제1정대 제1분대의 병영, 마호주둔 륙군 제7련대 유격중대의 병영을 습격하여 적들의 무기를 탈취하기로 하였다.
제3대대는 교하대대로서 지휘는 한일광이 맡았다. 이들은 교하북쪽에 있는 위구참의 보감소와 보위단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노한 파도마냥
1930년 7월 31일 밤, 각지의 폭동대원들은 예정한 지점에 집결하였다가 이튿날인 8월 1일 새벽 2시에 동시에 폭동을 일으킨다. 액목대대의 파괴대는 길림-교하-돈화-신참구간의 교통과 통신망을 단절시켜 폭동이 순조롭게 진척되도록 담보하였다.
8월 1일 새벽 돈화대대의 김익수가 지휘하는 40여명 폭동대는 양포, 칠성자권총, 자작폭탄 그리고 몽둥이 등을 지니고 신개도의 보위퇀 제1분대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폭동대 대원들은 병영의 동쪽 담벽을 뛰여넘어 들어가서 병영안에 수류탄을 뿌리고 양포를 쏘았다. 16명의 사병은 7월 28일에 모두 산에 들어가 약담배수색을 하게 되어 이날 병영에는 5명의 잡부들뿐이였는데 폭동대원들의 공격에 2명의 잡부가 경상을 입었다. 잡부들은 놀란나머지 사시나무떨듯 와들와들 떨뿐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폭동대원들은 무기고에 돌격해들어가 16자루의 보총과 탄알 1000여발을 로획한후 병영에다 불을 지르고 철퇴하였다.
마호에 주둔하고있는 륙군 제7련대 유격중대의 병력을 습격할 임무를 맡은 100여명의 폭동대원들은 지휘 한광우의 지령에 따라 먼저 3명의 대원을 파견하여 어둠을 타서 병영동쪽의 흙담벽에 커다란 구멍을 뚫어 통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마호는 돈화에서 따푸차이허, 화전 등으로 통하는 중요한 교통요지이며 목단강상류지대를 통제하는 중요한 지대이다.
8월 1일 새벽 2시가 되자 폭동대원들은 이미 개척한 통로를 담벽안으로 쳐들어갔으나 보초병에게 발견되여 반격을 받게 되었다. 약 2시간동안의 접전을 거쳐 적병 7명이 부상을 입고 폭동대원 조규선, 박팔암 등 3명이 희생되고 20여명이 체포되였다. 폭동대는 부득불 남산방향으로 철퇴하였다.
8월 1일 새벽 2시, 홍일산(洪一山), 윤순찬(尹順燦), 리병호(李炳浩)가 거느린 20여명 퐁동대원은 남황니허에 있는 현공안국 제3분주소를 습격하였다. 폭동대원들은 분주소의 서쪽 담벽을 뛰여넘어 돌아가 보초병을 까눕히고 병영을 향해 보총을 쏘고 작탄을 던지면서 맹공격을 들이대여 2명의 경찰을 부상입혔다. 그러나 경찰들이 미친 듯이 반격하는 바람에 폭동대원들은 할수 없이 철퇴하고말았다.
정철호(鄭哲浩), 리범룡(李範龍)이 이끄는 100여명의 액목습격대의 폭동대원들은 8월 1일 새벽 관지에 주둔하고있는 륙군 제7련대 8중대의 병영을 습격하였다. 습격대는 병영 서남쪽 널바자를 뚫고들어가 작탄으로 보초병을 까눕히고 보총 한자루와 탄알 50발을 로획한후 병영을 향해 맹사격을 퍼부었다. 폭탄소리에 놀라 깨여난 관병들은 즉시 총을 들고 반격하여 많은 폭동대원들이 체포되였고 3명의 폭동대원이 희생되였다. (그후 8월 15일 저녁 29명의 폭동대원이 재차 8중대병영을 습격하였으나 역시 실패했다.)
이날 새벽 액목대대의 일부 습격대원들은 액목현세무분국에 쳐들어가 세무문서, 계약문서 등을 소각해버리고 피복류와 현금 등을 로획, 2명의 세무일군을 부상입혔다. 폭동대원들은 또한 지방정부의 량식창고를 헤치고 식량을 무상으로 중국인농민들과 조선인농민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제3대대인 교하대대도 한일광(원 서상파 공청회남만지구책임자)의 지휘하에 이리하, 의기구, 의기장자, 단산자와 교하남쪽 10킬로메터 지점에 있는 남대툰 등지 민중들을 동원하여 세갈래로 진격하여 교하에서 북쪽으로 약 40킬로메터 상거한 위구참의 보갑소와 보위단을 습격하기로 하였다.
7월 31일 정로인을 보내여 적정을 탐지한 후 이리하일대의 100여명 폭동대원은 검성중학교 출신인 림학선(林學善), 최무갑(崔武甲) 등의 인솔하에 도끼, 괭이, 몽둥이 등을 지니고 이리하 강물을 건너 캄캄한 밤길을 더듬으면서 위구참을 향해 떠났다. 마을의 부녀들도 폭동대원들이 먹을 밥과 삶은 옥수수 등을 이고 폭동대원들 따라나섰다. 남강자에서도 권태산(權泰山) 등이 령솔하는 40여명 폭동대원이 소부태하를 건너 의기구에 도착하여 그곳의 폭동대와 합세하였다. 남강자와 의기구의 두 폭동대는 문성국(文成國)의 통일적인 지휘하에 위구참을 향해 계속 진군하였다. 남대툰의 20여명 폭동대원도 한일광이 지휘하에 50킬로메터 상거한 위구참을 향해 31일 대낮에 떠나 오림구쪽으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곡괭이, 삽, 도끼 등을 들고 일하러 가는 농군처럼 가장하고 삼삼오오 떼를 지어 오림구를 거쳐 위구참으로 떠났다.
세갈래 폭동대오는 위구참부근에서 합세하여 8월 1일 새벽 2시가 되자 예정된 계획대로 보갑소와 륙군보위단 병영을 포위하였다. 폭동대는 보초병을 까눕히고 보총을 로획한후 병영을 향해 돌진해 들어갔다. 보초병의 고함소리에 놀란 관병들이 총을 휘두르면서 미친 듯이 반격했다. 곡괭이, 삽, 도끼 등 원시적인 무기밖에 없는 폭동대원들은 마구 퍼붓는 총탄앞에서 더는 진공할수 없었다. 하여 뿔뿔이 헤쳐져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참혹한 탄압
민중들의 공격을 받은 지방군벌들은 악에 받쳐 폭동군중들을 참혹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1930년 9월 길림에 “방공사무처”를 설립, 12월에는 “길림성비적사령부”를 신설하였으며 “길림성관민이 공산비적을 방지, 토벌할데 관한 장려 및 징벌규정”, “길림경찰, 보위단의 공산운동방지법” 등 수십가지 법령을 공포하였다. 그리고 륙군보병 제7려단 제19련대와 제13려단 제7련대를 동원시켜 연변과 길돈철도연선에서 “대토벌”을 감행하였다.
“8.1”길돈폭동을 탄압하기 위하여 파견된 13려단 제7련대 련대장 왕수당은 300여명 전예부대를 거느리고 돈화에 와 본부를 설치하고 지방에 주둔하고있는 공안경찰과 보위단을 모조리 출동시켜 도처에서 폭동군중을 체포하였다. 지방군경들이 초보적통계에 의하면 돈화에 있는 제7련대 본부 창고에 70여명, 교하공안국에 78명 도합 277명이 체포구금되였다. 봉기에서 실패한 폭동대의 대부분은 이미 적들의 탄압을 피하여 부근 산중에 들어가 은페하여있었기에 구금된 대부분은 무고한 민중들이였다. 8월26일부터 27일까지 지방군경들이 체포한 사람들을 심문한 끝에 대부분 군중을 석방하고 협의가 있는 21명을 계속 감금하였다. 그중 리상수 등 15명은 돈화현성밖에서 군경들에게 참혹하게 살해되였다. 향수하자에서는 12월중순 2명이 살해되였으며 길돈림시당부의 책임자였던 마천목도 1930년 교하감옥에서 살해되였다. 이번 폭동의 지휘자들인 리형준, 한일광 등은 길림감옥에 압송되였으나 “9.18”사변후 전부 석방되여 연변에 나와 항일투쟁을 견지하였다.
이번 폭동의 실패원인과 의의에 대해 박창욱교수는 이렇게 피력했다.
“중국공산당의 제1차 ‘좌’경기회주의로선의 지도하에 진행되였기에 모험적이고 맹목적이였다. 중공만주성위와 연변당조직이 나이가 어리고 투쟁경험이 결핍했다. 투쟁의 예봉을 일제침략자들한테 돌린 것이 아니라 지방군벌에게 돌렸다. 한족(중국인)을 비롯한 여러 민족 인민들을 동원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번 투쟁에서 지방군벌세력에게 일정한 타격을 주었으며 조선인들의 반제반봉건투쟁정신을 충분히 과시하였다. 폭동을 통하여 조선인들은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민족평등정책을 더욱 잘 알게 되었으며 투쟁방향을 명확히 할수 있었다. 이번 폭동을 통해 중국공산당의 영향은 길돈지구 조선인들속에 더욱 깊이 침투되였고 조선인들속에서 당조직과 혁명단체가 신속히 확대되여나갔다.”(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