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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력사 바로 알고 삽시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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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철호| 작성일 :13-03-05 0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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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에 진출하는 조선의용군 제5지대(1945년 12월 연길)
 
 

조선의용군 제5지대
 
 

조선의용군 여러 갈래 지대 편성 남만 북만 동만서
국민당무장 섬멸 전국해방전투서 혁혁한 전공 세워
 
 

조선의용군
 
“7.7”사변전후헤 많은 조선인공산주의자들이 연안에 가서 중공중앙당교 아니면 연안항일군정대학에 가서 교편을 잡거나 공부하였다. “7.7”사변이 일어나자 무정장군과 중앙당교의 진광화 등 많은 조선인혁명자들은 항일 최전선에 나아가 피어린 싸움을 하였으며 그중 적지 않은 동지들은 중공중앙의 지시에 따라 조선의용군에 배치되여 공작하였다.

일찍부터 중국 관내 각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각 반일민족주의정당, 단체들은 각지에 간부학교, 군사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7.7”사변후 중국에서 국공합작이 실현되고 전 중국인민들이 일제와의 성전에 떨쳐나서자 이에 고무된 조선인 각 정당, 단체들은 분산된 력량을 단합시키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1938년 5월 김규식, 김약산이 령도하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발기에 의하여 조선민족해방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 등이 련합하여 조선민족해방전선련맹을 결성하였고 1940년 5월에 조선혁명당, 한국국민당, 한국동립당이 련합하여 김구를 위수로 한 한국독립당을 건립하였다. 
 
이 두 조직은 서로 손잡고 중국항일력량과 련합하여 항일의 길에 떨쳐나섰다.
관내에서 맨처음 항전에 나선것은 조선청년전위동맹의 김학무 등 청년들이였다. 그들은 1938년 7월에 조선청년전지복무단을 조직하여 중화민족해방선봉대와 함께 무한보위전투에 참가하였다. 그후 그들은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동맹 등과 련합하여 “조선민족전선련맹”을 결성하고 국민정부군사위원회의 정치부의 지도하에 1938년 10월 10일 무한에서 김약산을 대장으로 하는 조선의용대를 조직하였다. 
 
군사학교출신이 대다수를 점한 이 의용대는 무한보위전의 포성속에서 태여났고 후에 3개 지대로 나뉘여 항일 제1선으로 달려나가 일본침략군과 싸우는 한편 적병사들에 대한 선전, 고동 공작에서 뛰어난 전과를 올림으로써 중국정부와 인민들의 찬양을 받았다.

다른 한편 김구를 주석으로 하는 한국림시정부에서도 건군공작을 다그쳐 1940년 9월 17일에 전시림수수도 중경에서 광복군총사령부를 세우고 간부양성에 힘을 기울렸다. 그들은 3개지대의 군사인원들을 중경, 서안 등지에 파견하여 중국군의 적군공작을 돕는 한편 앞으로의 대부대건설계획을 세우고 군사간부를 양성하였다.

중일전쟁이 대치단계에 이르자 국민당정부는 소극적으로 항전하고 적극적으로 공산당을 반대하였다. 이런 형편에서 2년남짓이 국민당군대와 련합하여 간고한 투쟁을 벌려오던 조선의용대는 당시 화북지대의 20여만이나 되는 조선인들을 항일에로 불러일으키며 중국공산당의 령도하는 팔로군과 손잡고 항일투쟁을 더욱 활발히 전개하기 위하여 중경, 호북, 광서 일대로부터 북상하여 끝내 팔로군총부의 소재지인 태항산항일근거지에 이르렀다.

그후 김구, 김규식을 비롯한 여러 애국지사들은 중국관내의 조선인항일력량을 통일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그들은 중국정부의 지지와 협조를 받고 1942년 5월에 조선의용대를 광복군에 편입시켰다. 총사령에 리청천, 부사령에 김약산을 추대한 광복군은 원 의용대를 제1지대로 편성하고 김약산이 지대장을 겸하였으며 원 광복군 제2지대로 편성하고 림범석을 지대장으로 임명했다.

태항산항일근거지로 들어온 조선의용대는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하에 팔로군내의 조선동지들과 화북일대에서 활동하던 조선청년조직과 련합하여 조선의용대를 화북조선의용군으로 재편성하였다. 2만5천리장정에 참가했던 무정장군을 사령원으로 박일우를 정치위원으로, 박효삼을 참모장으로 한 조선의용군은 전투력이 강한 항일무장대오였다. 항일근거지의 가렬처절한 반“소탕”전투에서 의용군은 헌신적으로 싸웠다. 진광화, 석정 등 의용군지휘자들은 성스러운 항일구국공작에 마지막 피 한방울까지 다 바치였다. 그들의 영웅적업적은 전 중국인민들로부터 찬양을 받았고 항일근거지학교의 교과서에 오르기까지 하였다.

그후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1942년 7월에 화북조선독립동맹으로 재조직되였고 연안에 들어가서는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최창익과 한빈을 부위원장으로 추대하고 조선독립동맹을 결성하고 많은 일을 하였다.

화북조선독립동맹과 화북조선의용군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를 성립한후 무정을 교장으로 임명하고 중국공산당의 지도와 협조를 받으면서 많은 혁명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들은 또 화북의 20만 조선인을 대상으로 태항, 태악, 기로예, 진찰기 등지에 독립동맹분맹을 내오고 북평, 천진, 신향, 개봉, 석가장, 승덕 등지의 조선인 농민, 지식인, 중소상인들 속에서 여러 가지 형식의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동북과 조선에 공작원을 파견하였으며 할빈일대에는 독립동맹 제12지부를 내왔으며 평양과 서울에서도 동지들을 쟁취하는 공작을 하였다.

1945년 8월, 일제가 패망하자 화북에서 싸우던 조선독립동맹과 의용군은 팔로군과 어깨겯고 동북에 진출하여 일제의 잔여세력을 숙청하는 새 전투에 뛰여들었다. 그들중의 일부는 조선북반부로 나가고 중경에 있던 한국림시정부 요인들과 중경, 서안 일대에서 활동하던 광복군은 “개인의 신분”으로 조선남반부로 돌아갔다.

조선의용군 각 지대

1945년 8월 8일, 쏘련정부가 일본에 선전포고를 한뒤인 8월 11일 주덕총사령은 제6호 명령에서 우리 나라 관내에서 항일투쟁을 진행하던 조선의용군은 팔로군과 함께 동북으로 진군하여 적군을 소멸하고 동북의 조선인을 조직하여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에 참가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투항한후 조선의용군은 무정사령원의 인솔하에 관내에서 나와 도보로 동북으로 진군, 11월 4일 심양에 도착하였다.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지도기관은 심양에서 회의를 열고 변화된 형세에 대처할 대책을 강구하였다. 그때 조선북반부에 진주한 쏘련군은 중국에서 나가는 조선의용군의 입경을 허락하지 않았다. 때문에 조선의용군은 조선으로 나갈수 없었다. 이런 형편에서 조선의용군은 림기응변하여 부대를 1, 3, 5 지대로 편성한후 조선인이 모여사는 남만, 북만, 동만으로 나가서 중공중앙동북국의 통일적인 지도하에 먼저 동북근거지를 건설하는 투쟁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제1지대의 지도성원들로는 지대장에 김웅, 정치위원에 방호산, 참모장에 안빈, 정치부주임에 주연이였다. 한청, 주연이 조직한 조선의용군 선경종대를 기초로 한 1600여명의 병력과 연안ㅡ조선혁명군정학교 졸업생, 각 항일근거지에서 북상한 청년군관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제1지대는 보병 9개, 기관총중대, 경위중대 등 11개 중대를 두었다. 제1지대는 그후 리홍광지대로 발전하였으며 1946년 12월에는 동북민주련군 독립 제4사로, 1948년 11월 심양이 해방된후 독립 제4사는 중국인민해방군 제166사로 개편되였으며 이미 1만2천여명 병력을 가진 정규군 사단으로 발전성장되였다.

1945년 11월 25일, 북만으로 진군한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할빈보안총대 조선독립대대를 조선의용군 제3지대로 재편성한다고 선포하였다. 지대장에 김택명, 정치위원에 주덕해, 부지대장에 리덕산, 정치처주이에 리근산, 참모장에 김연이였다.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아군 359려와 송강군구의 다른 부대들과 함께 목란, 통하, 방정, 연수, 상지 등 현성을 해방하는 전투와 토비숙청에 참가하면서 2000여명으로 병력을 늘였다. 3지대가 할빈으로 들어왔을 때는 병력이 3000명으로 늘어났다. 할빈시의 위수임무를 맡은 3지대는 부대를 파견하여 동북국을 비롯한 성, 시의 주요한 당정기관을 보위하였으며 송화강대철교, 발전소 등 큰 곳을 수비하였다. 
 
그리로 일부 병력을 시교농촌에 파견하여 토지개혁의 순조로운 진전을 보장하게 하였다. 1948년 1월, 동북민주련군이 동북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였다. 그해 3월 조선의용군 제3지대는 명령를 받고 할빈을 떠나 길림성 연통산일대에 가서 길동경비사령부의 조선인부대와 목단강에서 온 조선인전사들로 무어진 목단강군구 제14퇀과 함께 동북인민해방군 독립 11사로 편성되였다. 그해 10월, 3지대는 장춘포위전에 참가했다. 장춘이 해방된후 3지대는 장춘시 위수임무를 맡았다. 1949년 3월, 동북인민해방군이 제4야전군으로 개칭된후 3지대는 제4야전군 독립 164사 491퇀에 편입되여 료심전역에 참가했다.

1945년 11월 21일, 길림시에 도착한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소부분인원을 남겨 길림시에서 조선의용군 제7지대를 편성하게 하였다. 11월 29일, 화전현소재지에 주둔한 길림성보안총대 제7대대는 상부의 명령과 조선의용군 심양회의정신에 따라 12월말에 조선의용군 제7지대로 개편되였다. 이 부대는 화북에서 온 의용군을 골간으로 하고 7대대를 주력으로 화전현, 서란현, 교하현 등지의 조선청년들을 받아들여 조직한 무장대오로서 지대의 지대의 지휘부는 괴뢰만주국 화전현공서 울안에 설치되여있었다. 박훈일(朴勳一)이 지대장 겸 정치위원을 맡고 최명이 부지대장 겸 부정치위원, 김극이 참모장을 맡았다. 지대부아래에는 6개 중대가 소속되있었다. 1946년 3월, 7지대는 화전현 보안퇀으로 개편되였다. 양상곤이 퇀장으로 임명되고 현위서기 왕소천이 정치위원을 겸임했으며 송무선이 부퇀장으로 임명되였다. 조선의용군 제7지대는 창건된 뒤 길림지구에서 반혁명적무장을 짓부시는 투쟁에서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돈화역에서의 풍파

1945년 11월 9일,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동만을 향해 진군하였다.

5지대는 태항산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간부와 학생들을 골간으로 하여 조직된 대오였다. 조선의용군 부사령이며 정치위원인 박일우가 제5지대의 정치위원을 겸했고 리익성이 지대장을, 전우와 리권무가 참모장을, 주혁이 정치부주임을 맡았다. 지대는 9개 중대로 구성되였는데 정찰, 경위, 무전, 통신, 악대 등 지대직속까지 합하여 대원이 900여명 되었다. 지대에는 참모부, 정치부, 공급부가 설치되여 있었다.

정치위원 박일우는 연안 조선혁명군정학교 부교장(교장 김두봉)이였다. 박일우는 화룡현사람으로서 일찍 30년대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한 사람이였다. 1945년 박일우는 중국공산당 제7차 대표대회 대표로 당선되였고 대회에서 재중조선인들의 과거와 현재의 상활에 관한 보고를 하여 대표들의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고 한다. 지대장 리익성도 일찍 항일투쟁에 참가한 투사였다.

심양을 떠난 부대는 연도에서 조선부락 동포들의 환영을 수없이 받으면서 행군했다. 새하얀 조선옷을 떨쳐입은 부락민들은 동구밖에까지 나와 부대를 맞아주었고 마을에 들어가서는 맛나는 음식을 대접하군 했다. 의용군전사들은 마을 사람들에게 눈물겨운 전투담을 들려주었고 조선의용군행진곡 등 항일혁명가요를 배워주었다.

행군도중 리익성지대장은 행군속도를 다그쳐 동만에 진출하라 조선의용군사령부의 명령을 무전으로 받았다. 도보로 행군해서는 그 명령에 지정된 시간내에 동만에 도착할수 없다고 생각한 리익성지대장은 한 참모일군에게 청원역에 가서 기차를 구해보라고 지시했다. 역에 갔다온 참모일군은 기관차와 차량 10바곤은 구했으나 기관사가 없다고 했다. 기관사가 없어 골치를 앓고있는데 때마침 한 중대에 참군하기전에 기관사조수로 일한적있는 한 전사가 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기차를 타면 길림까지 헐히 갈수 있다는 생각에 전사들을 기뻐날뛰였다.

의용군전사들을 꽉 박아실은 기차는 악대가 연주하는 “조선의용군행진곡”의 장엄한 군악소리속에서 서서히 반석역에 들어섰다. 플래트홈은 마중나온 수백명 조선인군중들의의 환호성, 만세소리로 떠나갈듯 했다.

워낙 반석역에 잠간 멈춰 점심을 먹으려고 기차를 세웠으나 환영나온 군중들의 성의와 열성에 감동된 의용군전사들은 차에서 뛰여내려 환영군중들과 한덩어리로 엉켜 부등켜안고 돌았다. 남녀로소할것 없이 의용군전사들을 부등켜안고 “우리 군대, 우리 군대”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박일우정치위원이 플래트홈에서 군중들을 향해 격정에 넘치는 연설을 했다. 박일우는 제5지대를 대표하여 반석지구 조선인군중들에게 인사를 드리고나서 국제국내형세, 중국공산당의 방침과 정책, 동북조선인들의 당면한 과업에 대하여 말했다.

박일우의 연설은 무시로 일어나는 열렬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조선인군중들은 “조선독립만세!”, “조선의용군만세!”를 웨치면서 호응했다. 박일우는 반석지구 조선인들의 투쟁을 지원하기 위해 박정덕, 장천립, 채동성,차진 등10여명을 남긴다고 선포했다. 반석에 남은 이들은 그후 반석지구에 조직된 조선족자위무장대오를 기초로 하여 2개 중대의 조선인무장력량을 조직함으로써 반석지구의 인민민주정권을 보위하고 사회질서를 확보하는데서 큰 기여를 하였다.

길림에 이른 조선의용군 제5지대는 전원이 기차를 타고 갈수 없는 형편에서 먼저 2개 중대로 선발대를 무어 전우의 인솔하에 화물차를 타고 연변으로 가기로 결정했다.
선발대를 태운 화물차가 돈화역에 멈춰섰을 때였다. 사면팔방에서 총성이 요란히 울리고 “네놈들은 포위됐다!”, “손들고 차에서 내리면 살려준다!”는 중국말로 웨치는 고함소리가 어지러히 들려왔다. 그 웨침소리속에는 로어로 뭐라고 꽥꽥거리는 고함소리도 섞어있었다. 사태의 위급성을 파악한 전우는 당황해하는 전사들을 눅작혔다.

“나의 명령이 떨어지기 전에는 누구도 절대 총을 쏘아서는 안됩니다. 진상을 모르는 중국인들은 그렇다쳐도 쏘련붉은군대까지 가담했길래 충돌이 생기면 후과는 상상하기 어렵게 될것입니다. 쏘련붉은군대는 군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다 지고무상의 권력을 갖고있으므로 절대 맹동해서는 안됩니다.”

“그럼 어째야 한단말입니까”

“먼저 쏘련군대를 설복해야지요. 진상이 밝혀지면 문제가 해결될수 있습니다. 자, 모두들 무기를 놓고 나를 따라 차에서 내립시다.!”

결국 선발대는 무장해제를 당하고 돈화시내로 압송되고말았다. 참모장 전우는 우선 붉은군대사령원을 만날것을 요구했다. 쏘련공산주의대학의 졸업생인 전우는 류창하게 로어를 구사할수 있었다. 그는 자신은 쏘련에 있을 때 또꼬브라는 이름을 썼으며 지금은 조선의용군 제5지대 참모장이라고 소개한후 연변으로 나가는 목적을 설명했다. 그러나 붉은군대사령원은 반신반의하는 태도를 보였다.

선발대가 돈화에서 국민당계통의 지방무장에 의해 억류되였다는것을 알게 된 제5지대 대부에서는 상황을 즉시 조선의용군사령부에 무전으로 알렸다. 이에 조선의용군사령부에서는 이미 연길쏘련군사령부에 정황을 알렸다는 답전이 왔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만일의 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교하현 소재지에서 남쪽으로 10여킬로메터 상거한 조선인부락에서 출발하여 돈화를 향해 강행군을 했다. 이와 때를 같이 하여 연길쏘련군사령부의 강신태대위는 돈화사건에 대한 조선의용군사령부의 급전을 받고 즉시 돈화에 가서 쏘련군사령부와 교섭하였다. 전우와 강신태의 인내성있는 해석과 설복 끝에 자기들이 돈화보안사령부 류화일의 꾀임에 들었다는것을 알게 된 돈화쏘련군사령부에서는 5지대 선발대전원과 몰수했던 무기를 내놓았다. 

위만군의 상위로 일한적 있는 국민당원 류화일은 돈화지구의 혼란한 틈을 리용하여 치안유지회를 조직했고 돈화현 현장자리에까지 기여 올랐다. 현장이 된후 이자는 돈화보안사령부를 조직했다. 류화일은 국민당특무들과 공공연히 결탁하여 돈화에 건립된 인민민주정권을 뒤엎고 돈화국민당당부까지 세웠다. 조선의용군 제5지대 선발대가 돈화를 지나간다는 정보를 입수한 류화일은 일본군패잔병부대가 비밀리에 돈화를 거쳐 연변쪽으로 도망간다고 쏘련군사령부에 거짓보고를 했다. 류화일의 말을 믿은 쏘련군은 군대까지 파견하여 류화일을 도와주었던 것이다. 

제5지대 지대부가 후속부대를 거느리고 돈화남쪽의 림강툰에 이르렀을 때 돈화사건이 금방 해결되였다. 5지대 지대부에서는 돈화지구에 인민민주정권을 세워주고 앞으로 동만지구의 혁명형세의 발전에 유리한 조건을 마련하려는 계획의 첫단계로 돈화의 반동무장을 소멸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때 돈화에는 8개 보안대대가 있었는데 7개 대대가 변절하여 류화일을 괴수로 하는 국민당측에 넘어가 있고 유독 1개 조선인대대만이 마호에 철퇴하여 투쟁을 견지하고있었다. 제5지대는 조선인대대와 손잡은후 주밀히 정찰하고 세밀하게 전투를 포치하여 12월 중순의 어느날 반시간도 안되는 사이에 류화일의 반동무장을 일거에 섬멸해치웠다. 

제5지대의 재편성 

1945년 12월 8일 밤에 문정일이 조선의용군선견대를 거느리고 먼저 연길에 도착하였다. 연변행정독찰전원공서 전원 관선정과 연변교육계의 박재하가 마중나갔다. 연길에는 조선의용군판사처가 설립되였고 문정일이 주임을 맡았다.

12월 31일, 박일우, 리익성이 조선의용군 제5지대 400여명 장병을 거느리고 연길에 도착하였다. 1946년 1월초순, 5지대는 연변경비 1퇀, 2퇀과 합병하여 조선의용군 15, 16퇀을 편성하고 조양천에 교도대를 세웠으며 훈춘에 1개 중대를 파견하여 건군사업을 벌렸고 포병부대의 건립에 착수했다. 

15퇀은 5지대의 절반 력량과 경비 2퇀이 합병한 부대였다. 1946년 3월, 15퇀은 길동경비 2려의 1개 퇀으로 되었고 그후에는 길림군구 독립 3퇀으로 개칭되였다. 1948년 1월에는 동북군구 독립 6사에 편입되여 16퇀으로 되었다가 1948년 11월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 156사 466퇀으로 개칭되였다. 부대가 자주 재편성되는 과정에 한족(漢族) 1개 영이 편입되기는 했지만 기본상에서 조선인퇀의 본색을 확보하고있었는바 2영과 3영, 퇀직속의 대부분은 조선인들로 구성되였다. 

이 퇀은 라자구일대에서의 토비숙청, 하발령방어축성물로동, 동만철도경비, 길림외곽지구에서의 운동전, 장춘포위전 등에서 견강한 집단으로 장성했다. 관내로 진군한후 이 퇀의 2영7련 즉 “김성범련”은 이름을 떨친 영웅련대, 모범련대였고 3영9련은 장강도하작전의 서막인 단풍전투에서 전투련으로 되어 대담하고 용감하고 신속하고 령활하게 전투를 하여 2분만에 1호부루를 폭파하고 6분만에 부두를 점령함으로써 전반 전투의 승리를 담보하였다. 1949년 11월에 열린 156사 제1차 영웅모범대회에서 리순임, 정형련이 1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고 19명이 각기 2, 3, 4급 전투영웅으로 당선되였으며 김성범, 주광문, 박문수 등 13명의 렬사가 인민영웅으로 추인되였다. 

16퇀은 1946년 3월에 동북민주련군 길동 경비 1려 1퇀으로 되었고 그후 동북군구 독립 1사 1퇀으로 개칭되였으며 1947년 8월에 동북인민해방군 10종대 30사 89퇀으로 개칭되였다. 이 퇀은 1946년 1월중순부터 삼도만, 대흥구, 묘령, 천교령 일대를 주름잡으면서 토비를 숙청했고 1946년 4월에 장춘 제1차 해방전투에서 “조선퇀”의 영예를 떨쳤다. 그후 화전, 로야령에서 운동전을 벌렸고 덕혜전투, 진단목전투, 법고추격전, 개원전투에서 다시 한번 “조선퇀”의 이름을 날렸다. 

1948년 4월 25일, 10종대 30사는 개원에서 공로자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89퇀의 박국제(특등공), 조영희(대공 2차)를 비롯한 103명이 대공수훈자로 표창받았다. 
료심전역의 마지막단계인 흑산-대호산 저격전에서 89퇀 1영은 101고지를 쟁탈하는 관건적인 전투에서 아군 28사의 전우들과 함께 끝끝내 고지를 쟁탈하고 지켜냄으로써 흑산저격전에서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 흑산저격전이 끝난후 89퇀은 제4야전군 47군 141사 422퇀으로 개칭되였고 관내로 진출하여 평진전역에 참가하고 장강을 뛰여넘어 곧추 중경까지 쳐들어갔고 그후 호남서부의 산악지대를 주름잡으며 “동북범”의 본때를 보여주면서 토비를 족쳤다. 

훈춘에 파견된 조선의용군 제5지대의 1개 중대는 1개 퇀으로 편제를 확대발전시켰다. 그리고 5지대의 성원들은 골간으로 조직된 포병대대도 그후 포병퇀으로 확대되여 제4야전군 포병부대의 건설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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