료하삼각주에 활짝 핀 진달래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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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5-10-05 08:43|본문
료하삼각주에 활짝 핀 진달래꽃
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영구편]
료하삼각주에 활짝 핀 진달래꽃
지난 20세기 9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족인구대이동은 돌풍마냥 전반 조선족사회에 급격한 변화의 바람을 몰아왔으며 농경문화권에서 도시문화권에로의 변화를 촉구했다. 동북3성에 집거했던 조선족이 중국 개혁개방의 물꼬를 타고 연해도시와 대도시, 해외로 진출하면서 인구분포구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추세하에서 심양을 포함한 료녕성의 허다한 도시들의 조선족인구는 절감되였지면 대련, 영구, 단동 몇개 도시의 조선족인구는 오히려 증가세를 나타냈다. 건국후부터 계속 증가세를 보인 영구시는 2010년 전국제6차인구조사시에는 5차조사때보다 1,469명이 더 증가된 9,737명으로 집계되여 17.77%가 증가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구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촉진회(아래 촉진회라 략칭) 김영일회장은 박가구(개주시 진툰진에 속하는 민족잡거촌)와 개주시 쌍천안촌 등 부분 지역의 조선족인구수가 빠져 영구조선족 실지인구수는 만명을 웃돌것이라고 했다.
영구시에서는 매년 6월이면 료하강변에서 풍성한 아리랑문화축제 광경이 벌어지는데 조선족 학교와 로인협회에서 총동원되여 다채로운 문예공연과 민속한마당을 펼친다. 그전의 봄놀이행사가 아리랑문화축제로 바뀐것이다. 영구시조선족문화예술관(영구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이라 부름)에서는 이외 9회의 소수민족문예콩클, 13회의 중한가무제 등 다양한 행사도 조직하여 여러 소수민족간의 단합과 한국과의 국제교류도 활발하게 해오고있다.
영구조선족은 원래 80%가 농촌에 집거했고 벼농사가 위주였는데 20세기 90년대부터 해외로무자가 늘면서 농촌에는 대부분 로인들과 아이들만 남아있다. 2006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쌍안촌, 신광, 신건, 쌍하 등 4개 조선족촌의 1284가구중 영구도심에 집을 마련한 사람이 25%, 발어권, 개주, 대석교 등지에 집을 마련한 사람이 약 10%를 차지했으며 약 10%가 외성시로 이주해갔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1988년-2014년 사이 영구조선족은 해외로무에서 3억딸라를 벌어들여왔는데 이는 조선족주민의 경제소득을 높였을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외화를 창출한셈이다. 아직도 전체 영구조선족의 30%가 해외에 나가 돈벌이하고있다.
현재 영구지역에는 촉진회(2006년 설립)와 그 산하에 조선족로인협회(2006년 설립, 9개 분회), 조선족기업가협회(2014년)가 있다. 촉진회는 영구조선족사회의 굵직한 현안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영구조선족사회의 구심점으로 되고있다.
수전개발에 지대한 기여
료하삼각주지대는 원래 갈대수풀림속에 일만무제한 벌판과 서쪽으로 흘러가는 세찬 료하의 물결뿐이였다. 그러나 조선인이 정착하면서 료하 하유량안에 서서히 황금파도가 넘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1895년 가을, 조선 평안북도의 김의범, 김경호 두사람이 11가구의 조선인을 데리고 료하남안의 서당(현재의 대석교시 수원진 수원촌)에 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을 풀었다. 그들의 신근한 노력으로 알카리성땅에서 전례없이 벼재배에 성공하였는데 이는 영구지역에서 벼농사의 첫시작이였다. 이 소식이 조선과 동북지역의 조선인들에게 퍼지면서 이곳으로 와 벼농사를 짓는 조선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8년과 1940년 사이 영구지역의 리가, 동대방신, 포가, 위가당촌 등지에 살던 조선인들이 서로만촌(西老湾村, 대와현 동풍농장에 속하였고 현재의 대석교시 수원진 신건촌의 전신)에 모여들면서 당시 조선인이 120가구에 700여명이 되였다. 서로만촌은 료남에서 가장 일찍 형성되고 규모가 큰 조선인자연부락이였다. 그러다 1953년에 큰물이 나면서 마을과 논밭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후에 다시 마을이 생겨나면서 신건촌(1955년 1월)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영구지역에는 영구안전농장(1937년 이 농장에 조선인이 3,329가구에 12,159명)외에도 광복전 20개 자연부락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보유한 수전은 3만무에 달하였고 건국후에도 많은 수전을 보유하고있었는데 1995년 통계를 보면 4개의 조선족촌이 도합 11,172무를 보유하고있었다.
건국후 농업합작화의 길에 앞장선 영구조선족은 영구지역에서 가장먼저 초급사-개평현최영진초급사를 꾸렸고 료동성에서 첫 집단농장-동방홍집단농장을 꾸렸다. 이 농장에서 개발한 "랭상육모법"은 동북벼농사재배기술에서 하나의 돌파였는데 처음으로 알카리성땅에서 육모이앙기술을 도입하였다.
대석교시 수원진 신광촌(1957년에 건립)은 70년대부터 벼종자기지로 성에서도 이름있다. 신광촌과학연구팀은 20세기 60년대부터 일본과 조선에서 북방기후에 적합하고 내알카리성의 우량 벼종자를 도입하여 반복적인 연구와 실험끝에 "풍금(丰锦)", "추광(秋光)" 등 안전적이고 다수확고를 보장할수 있는 우량벼종자를 개발하여 시험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우량벼종자들은 영구지역 조선족촌의 벼무당수확고를 "천근"에 도달케 하였으며 황하이북의 부분 성, 시, 현에 전파되여 이러한 지역의 벼생산량이 평균 15~20% 제고되는 놀라운 성적을 따내게 했다. 1979년~1990년 12년사이 신광촌은 우량벼종자만 1180만킬로그람 판매로 335만원을 수입하여 인구당소득이 3,400원이나 늘어났다.
신광촌 리동걸서기는 현재 촌에 수전면적이 3,500무이지만 조선족이 다루는 수전면적은 1,400무이고 그중 새우, 게 등 양식을 하는 논이 350무라며 촌호적인구(979명)의 1/3이 해외에 돈벌이하러 가고 촌에 남은 사람은 200명도 안된다고 소개했다.
발어권구의 조선족과 조선족학교
영구시 발어권구는 경치가 수려한 발해만에 위치해있는 항만도시로 국내외 관객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짧은 십여년사이 수천명의 조선족이 운집해 조선족사회를 형성하고 이와 더불어 최근 20여년래 국내에서 신설된 첫 공립조선족학교인 영구시발어권구조선족학교가 우뚝 서있다는것이 더욱 자랑스런 일이다.
1992년 10월 국무원에서 영구시 발어권구에 영구시경제기술개발구 설립을 허가하자 한국기업들이 속속 입주하면서 동북3성에서 조선족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1990년 전국 제3차인구조사때만해도 발어권구내 조선족은 100명 미만이였지만 한국기업수가 늘면서 2000년에 이르러 1,300명에 달했고 현재는 3,000명에 육박하고있다. 일례로 2006년 12월, 흑룡강성 밀산현 련주산진의 475공장의 조선족직원가정 73가구가 집단으로 발어권구에 이주해와 정착했다.
90년대후반 개발구에는 화장용구, 태산의류, 일심상포, 신국상포, 대명찬구, 강진봉제, 현진봉제, 신아조화, 보원보석, 남산림산, 라성피혁 등 한국기업이 26개에 달했으며 재영구한국상회는 료녕성내 한국상회가운데서도 막강한 파워를 갖고있었다. 따라서 한국기업의 임가공과 외화창출능력은 영구시뿐만 아니라 료녕성에서도 상위수준을 차지하였다.
한국기업에 취직한 조선족들은 중견자로 활약하였는데 어떤 한국사장은 기여가 큰 조선족직원에게 포상으로 통크게 집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조선족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조선족학령아동이 307명에(1999년) 달했다. 조선족자녀들의 취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구한국상회는 3년간의 노력끝에 발어권구실험소학교에 1997년부터 조선족반을 개설하였고 2001년에는 개발구에서 제공한 부지에 자금 100여만원을 투자하여 500평방메터의 조선족소학교를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기업의 경기불황 등 원인으로 공사를 추진하지 못했고 경비, 체제 등 허다한 원인으로 부설조선족반도 2003년 7월에는 정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녀들의 취학난이 열점문제로 대두되자 안정애, 김영일은 "기초교육은 정부에서 꾸려야 한다"고 촉진회를 대표하여 개발구령도들과 학교문제를 십여차 교섭하였고 개발구령도들은 학교문제를 끝내 일사일정에 올려놓고 연구하였다.
당시 개발구내 조선족학생수가 257명(그중 한국적학생이 55명)이였는데 민족학교가 없어지자 52명이 외지에 가 공부하였고 또 100여명의 한국기업내 조선족종업원자녀가 부득불 발어권을 떠났다. 개발구에서는 이런 상황에 비춰 발어권구조선족학교를 꾸릴데 대해 동의하고 교육교학시설, 교사편제, 경비 등 방면에서 우대정책을 제공하였다. 이리하여 2007년 9월 1일, 발어권구조선족학교는 해성소학교의 부분 교사를 빌어 개학하였고 부분 교원을 초빙하여 교사대오를 강화하였다. 개발구정부에서는 민족교육환경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자금 4,000만원을 투자하여 1.3만평방메터의 신축교사를 짓고 민강로소학교와 공동사용하게 하였는데 발어권구조선족학교청사만 사용면적이 3,960평방메터(18개 반급형)이다. 2012년부터 밝고 넓은 신축청사에 입주한 영구시발어권구조선족학교는 현재 소학생이 105명, 그중 유치원생이 35명, 한족학생이 25명,한국적학생이 6명이다.
김룡만교장(현 영구시정협위원)은 만약 시민위 안정애부주임(퇴직)과 시인대 민교외위 김영일주임을 비롯한 촉진회의 적극적인 지지와 그리고 발어권구조선족사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발어권구조선족학교는 생겨날수 없었다"고 말한다.
료남지역 최대 조선족마을과 조선족양로원
개주시 서해판사처(서해농장)에 속하는 쌍천안촌(双泉眼村)은 조선족인구가 1,592명으로 료남지역 최대 조선족마을이라 불리운다. 이 마을의 조선족로인협회는 1982년에 설립되여 료녕성내 조선족로인협회중 력사가 가장 오랜 로인협회의 하나다.
심대고속도로 영구남출구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굽인돌이를 돌아 1.5킬로메터 달리면 황금빛으로 새겨진 "쌍천안마을" 간판이 한눈에 안겨온다. 쌍천안촌은 쌍천안산을 앞뒤로 살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고 로인협회 활동실도 자리하고있었다. 삼면이 산에 둘러쌓이고 서쪽으로 바다를 향하고있는 마을이였는데 마을 동쪽의 산곡에 두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여 "쌍천안"이라 불렀다 한다. 촌장이 외출중이여서 촌부녀주임 김춘삼씨가 반갑게 취재팀일행을 맞아주며 촌상황에 대해 소개해주었다. 촌에 수전면적이 약 2,000무이지만 많은 촌민들이 해외에 돈벌이하러 떠나 대외에 도급주고있고 과거에는 벼농사가 위주였지만 현재는 해외돈벌이가 이 마을의 주요 경제래원으로 되고있다.
이 마을력사는 1947년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해 국민당구역의 반산현 가장사(현재 대와현 평안향경내)에 살던 하인도 등 11가구의 조선인농민들이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던중 먼저 해방을 맞은 개평현을 경유하다 당시 개평현정부 현장의 적극적인 만류로 이곳에 머물게 되였고 현정부의 도움으로 수전을 풀게 되였다. 그뒤 반산현에서 조선인 73가구와 길림성 돈화현에서 23가구가 선후 이곳에 집단이주해 1950년초에 개평현에서 첫 호조조-"최영진호조조"(후에 최영진농업생산합작사)를 건립했고 후에 조선족세대수가 늘어나면서 당시 료동성 직속의 "동방호집단농장"을 꾸렸다. 이 농장은 다시 태양승농장에 귀속되였다 1958년 "대약진"시기 개평현 서해국영농장과 통합하였다.
마을이 번창하던 시기 마을에는 벽돌공장, 랭동고, 농산물가공공장, 스텐네스찬구생산공장, 전기판넬공장 등 한국독자 및 합자회사들이 많아 촌경제발전에 큰 보탬이 되였다.
쌍천안마을이 심대고속도로외 영구공항, 그리고 고속철역(영구남)과 가까운것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기후가 좋아 쌍안천조선족양로원도 바로 이곳에 자리잡고있었는데 이 양로원은 40대 후반의 박종철씨와 그의 안해가 경영하고있었다. 자금 500여만원을 투자한 양로원은 2010년 9월에 개원, 170명을 수용할수 있는 3,000여평방메터의 4층 건물이였는데 현재 조선족로인 110명이 입주하고있었다.
박종철씨는 "해외나 외지에 가있는 자녀들이 미처 돌아오지 못한 림종한 로인들의 후사처리가 가장 힘들지만 양로원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있다"면서 "현재상황으로 투자금을 회수하기 힘들지만 부모같은 로인들이 만년에 행복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힘이 난다"고 고백했다.
학교가 무너지면 조선족사회가 무너진다
"학교가 무너지면 조선족사회가 무너진다." 이번 "력사전화기속 성내 조선족사회지역 탐방" 기획취재길에서 자주 듣는 말이고 심각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허리띠 졸라매더라도 자식공부는 시킨다"며 조선족마을이 있는 곳이면 조선족학교가 생겨났고 조선족학교가 있는 곳이면 해마다 운동회가 펼쳐져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꽃펴 살맞나는 정경들이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중국땅에 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한세기가 흐른 지금 조선족학교들은 페교되고 통합되면서 조선족사회가 전례없는 진통기를 겪고있다.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는 영구시 서시구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1킬로메터 반경에 1,500가구의 조선족이 살고있다 하니 산재지역에서 조선족학교가 지역조선족사회의 중심이 되고있음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영구지역에도 20세기 30년대부터 영구보통학교(1933년, 후에 영구시화원국민고등소학교로 개칭), 서당동명보통학교(1935년), 상군대정명보통학교(1938년), 서로만광명보통학교(1937년), 개가동광보통학교(1938년), 대방신**보통학교(1934년), 개평진조선족초급학교(1948년) 등 조선인들이 꾸리는 조선학교들이 나타났다. 건국초기 영구지역 조선족은 8개 촌에 집거하였는데 소학교가 3개뿐이여서 조선족의 학구열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후에 조선족사회의 강한 요구와 당의 민족정책에 의해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가 세워지면서 1985년의 통계에 따르면 영구시조선족소학교외 대석교시수원진신광조선족소학교, 대석교시수원진신건조선족소학교, 개주시서해농장조선족소학교, 로변구변성진쌍성조선족소학교 등 조선족소학교가 도합 5개로 학생이 550명, 교직원이 54명이였다.
2000년 1월부터 영구시조선족소학교분포조정이 시작되면서 영구지역 조선족소학교들은 영구시조선족기숙제학교로 통합되여 영구조선족고급중학교(원 영구시공업학교 교학청사)내 별도의 건물을 갖추고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 소학부로 귀속되였다. 현재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는 학생수가 450명(그중 유아생이 60여명)으로 유치원에서 소학부, 중학부의 영구시조선족기숙제학교로 전반 교육이 일체화시스템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기타 한족학교와 비교해 학교의 우세라고 박영림교장은 소개했다.
성내 허다한 조선족학교들에서 학생수가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이 학교의 학생수는 최근년에 늘어나고있는데 학부모들이 교사들의 사덕(师德)에 대해 인정하고 교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교수질을 백방으로 제고시킨데 있다고 한다. 올해에도 대학입시에서 고중졸업생 28명이 모두 대학입학점수선에 도달하여 영구시적으로 제2위를 차지하였으며 최근 4년간 1명이 청화대학에, 2명이 북경대학에 진학하는 등 기꺼운 성과를 이룩하였다.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는 무에서 유로 유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1953년만 해도 영구지역에는 조선족중학교가 없어 소학교 졸업생들은 려대시대련조선족학교로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1955년 5월부터 이 학교가 영구현 대석교진에서 운영되다 1957년 4월에 다시 안산으로 갔는데 영구지역 조선족소학교 졸업생들은 1978년까지 이 안산시조선족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러다 1978년 11월 25일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가 료녕성5.7학교(현재의 반금시 흥륭대구)에서 개학을 맞았고 이때로부터 영구지역에는 소학교에서부터 고중단계에 이르는 완정한 조선족교육시스템이 형성되였다.
리더의 역할
취재팀은 이번 영구지역 조선족사회 취재길에서 "만약 영구시민위 안정애부주임과 영구시인대 민교외위 김영일주임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하는 말을 자주 들을수 있었다.
영구지역에서는 안정애씨와 김영일씨를 두고 "안-김조합"이라 부르는데 안정애는 시민위에서, 김영일씨는 시인대에서 각자의 자원우세를 리용하여 민족간부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이들은 과장시절때부터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 관련 등 굵직한 현안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조화로운 영구시조선족사회를 영위해나가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왔다.
2000년 영구지역 교육분포망조정이 있을 때 당시 안정애는 김영일을 찾아 의견을 교류하고 "조정은 불가피적이다. 이는 조선족교육 환경과 수준을 높일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주동을 쟁취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함께 한사코 조선족소학교의 통합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을 설득해냈다. 김영일은 인대대표들을 동원하여 조선족학교통합 관련 제안을 정부에 제출하여 채택함과 아울러 널직한 자리로 학교청사 자리를 쟁취하였다.
영구시조선족유치원도 원래는 민영으로 운영되여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했는데 김영일이 인대대표들을 동원하여 시인대회의에서 공립유치원으로 변경시켜줄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시정부에서는 공립유치원으로 변경시켜주고 9명의 교사편제를 주었다.
쌍합조선족촌의 유기농업발전, 신건촌과 쌍천안촌의 특색촌 건설에서 안정애의 역할이 컸다. 그는 또 영구시조선족소학교와 문화관이 성민위의 "성광공정" 프로젝트에 들어가 지원금을 쟁취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영일씨는 우리는 "8년 분투"로 두가지 큰 일을 이뤄냈다고 자랑했다. 하나는 2005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에 문화관 관사를 유럽식건축에 대형극장까지 달린 일류시설로 탈바꿈시켰고 또 하나는 2006년부터 시작하여 2014년에 발어권구조선족학교의 법인대표 자격을 쟁취한것이다.
원래 심양태생인 김영일씨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전공하고 영구시민위에 배치되였다 시인대로 전근되였는데 얼마나 영구조선족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는지 이 지역의 리더로 인정받고있을뿐만 아니라 영구지역 조선족력사 연구전문가라 해도 손색이 없다. 1986년부터 그는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수십만자에 달하는 "영구조선족지"를 탈고했다.
영구지역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할수 있는 민족간부와 인대대표, 정협위원이 날로 줄어들어가고있다. 조선족인대대표와 정협위원이 가장 많았을 때는 지난 1983년에 시인대대표와 정협위원이 19명이였지만 이번기에는 7명뿐이다. 다행히 이번에 원 영구시 서시구당위서기였던 윤성복씨가 부시장으로 발탁되면서 조선족사회는 자못 반기는 기색이다. 이로써 우리 성내 조선족부시장이 금주시 안금향부시장과 합쳐 두사람이 나타난것이다.
조선족인구의 증가, 조선족부시장의 출현 등으로 영구조선족사회는 전례없는 전성기를 맞고있다. 따라서 영구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 1인자 인사문제로 야기되는 조선족사회의 불만과 산재한 문제들을 보다 원만하게 풀어나가고 전성기에 걸맞는 영구조선족사회의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기대해본다.
력사전환기속 성내 조선족지역사회 탐방 [영구편]
료하삼각주에 활짝 핀 진달래꽃
지난 20세기 90년대부터 시작된 조선족인구대이동은 돌풍마냥 전반 조선족사회에 급격한 변화의 바람을 몰아왔으며 농경문화권에서 도시문화권에로의 변화를 촉구했다. 동북3성에 집거했던 조선족이 중국 개혁개방의 물꼬를 타고 연해도시와 대도시, 해외로 진출하면서 인구분포구도에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러한 추세하에서 심양을 포함한 료녕성의 허다한 도시들의 조선족인구는 절감되였지면 대련, 영구, 단동 몇개 도시의 조선족인구는 오히려 증가세를 나타냈다. 건국후부터 계속 증가세를 보인 영구시는 2010년 전국제6차인구조사시에는 5차조사때보다 1,469명이 더 증가된 9,737명으로 집계되여 17.77%가 증가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영구시조선족경제문화교류촉진회(아래 촉진회라 략칭) 김영일회장은 박가구(개주시 진툰진에 속하는 민족잡거촌)와 개주시 쌍천안촌 등 부분 지역의 조선족인구수가 빠져 영구조선족 실지인구수는 만명을 웃돌것이라고 했다.
영구시에서는 매년 6월이면 료하강변에서 풍성한 아리랑문화축제 광경이 벌어지는데 조선족 학교와 로인협회에서 총동원되여 다채로운 문예공연과 민속한마당을 펼친다. 그전의 봄놀이행사가 아리랑문화축제로 바뀐것이다. 영구시조선족문화예술관(영구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이라 부름)에서는 이외 9회의 소수민족문예콩클, 13회의 중한가무제 등 다양한 행사도 조직하여 여러 소수민족간의 단합과 한국과의 국제교류도 활발하게 해오고있다.
영구조선족은 원래 80%가 농촌에 집거했고 벼농사가 위주였는데 20세기 90년대부터 해외로무자가 늘면서 농촌에는 대부분 로인들과 아이들만 남아있다. 2006년의 한 통계에 의하면 쌍안촌, 신광, 신건, 쌍하 등 4개 조선족촌의 1284가구중 영구도심에 집을 마련한 사람이 25%, 발어권, 개주, 대석교 등지에 집을 마련한 사람이 약 10%를 차지했으며 약 10%가 외성시로 이주해갔다.
불완전통계에 의하면 1988년-2014년 사이 영구조선족은 해외로무에서 3억딸라를 벌어들여왔는데 이는 조선족주민의 경제소득을 높였을뿐만 아니라 국가를 위해 외화를 창출한셈이다. 아직도 전체 영구조선족의 30%가 해외에 나가 돈벌이하고있다.
현재 영구지역에는 촉진회(2006년 설립)와 그 산하에 조선족로인협회(2006년 설립, 9개 분회), 조선족기업가협회(2014년)가 있다. 촉진회는 영구조선족사회의 굵직한 현안들을 하나하나 해결하면서 영구조선족사회의 구심점으로 되고있다.
수전개발에 지대한 기여
료하삼각주지대는 원래 갈대수풀림속에 일만무제한 벌판과 서쪽으로 흘러가는 세찬 료하의 물결뿐이였다. 그러나 조선인이 정착하면서 료하 하유량안에 서서히 황금파도가 넘치는 진풍경이 펼쳐졌다.
1895년 가을, 조선 평안북도의 김의범, 김경호 두사람이 11가구의 조선인을 데리고 료하남안의 서당(현재의 대석교시 수원진 수원촌)에 와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을 풀었다. 그들의 신근한 노력으로 알카리성땅에서 전례없이 벼재배에 성공하였는데 이는 영구지역에서 벼농사의 첫시작이였다. 이 소식이 조선과 동북지역의 조선인들에게 퍼지면서 이곳으로 와 벼농사를 짓는 조선인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1938년과 1940년 사이 영구지역의 리가, 동대방신, 포가, 위가당촌 등지에 살던 조선인들이 서로만촌(西老湾村, 대와현 동풍농장에 속하였고 현재의 대석교시 수원진 신건촌의 전신)에 모여들면서 당시 조선인이 120가구에 700여명이 되였다. 서로만촌은 료남에서 가장 일찍 형성되고 규모가 큰 조선인자연부락이였다. 그러다 1953년에 큰물이 나면서 마을과 논밭이 모두 물에 잠겼는데 후에 다시 마을이 생겨나면서 신건촌(1955년 1월)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영구지역에는 영구안전농장(1937년 이 농장에 조선인이 3,329가구에 12,159명)외에도 광복전 20개 자연부락에 거주하는 조선인들이 보유한 수전은 3만무에 달하였고 건국후에도 많은 수전을 보유하고있었는데 1995년 통계를 보면 4개의 조선족촌이 도합 11,172무를 보유하고있었다.
건국후 농업합작화의 길에 앞장선 영구조선족은 영구지역에서 가장먼저 초급사-개평현최영진초급사를 꾸렸고 료동성에서 첫 집단농장-동방홍집단농장을 꾸렸다. 이 농장에서 개발한 "랭상육모법"은 동북벼농사재배기술에서 하나의 돌파였는데 처음으로 알카리성땅에서 육모이앙기술을 도입하였다.
대석교시 수원진 신광촌(1957년에 건립)은 70년대부터 벼종자기지로 성에서도 이름있다. 신광촌과학연구팀은 20세기 60년대부터 일본과 조선에서 북방기후에 적합하고 내알카리성의 우량 벼종자를 도입하여 반복적인 연구와 실험끝에 "풍금(丰锦)", "추광(秋光)" 등 안전적이고 다수확고를 보장할수 있는 우량벼종자를 개발하여 시험재배에 성공하였다. 이러한 우량벼종자들은 영구지역 조선족촌의 벼무당수확고를 "천근"에 도달케 하였으며 황하이북의 부분 성, 시, 현에 전파되여 이러한 지역의 벼생산량이 평균 15~20% 제고되는 놀라운 성적을 따내게 했다. 1979년~1990년 12년사이 신광촌은 우량벼종자만 1180만킬로그람 판매로 335만원을 수입하여 인구당소득이 3,400원이나 늘어났다.
신광촌 리동걸서기는 현재 촌에 수전면적이 3,500무이지만 조선족이 다루는 수전면적은 1,400무이고 그중 새우, 게 등 양식을 하는 논이 350무라며 촌호적인구(979명)의 1/3이 해외에 돈벌이하러 가고 촌에 남은 사람은 200명도 안된다고 소개했다.
발어권구의 조선족과 조선족학교
영구시 발어권구는 경치가 수려한 발해만에 위치해있는 항만도시로 국내외 관객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짧은 십여년사이 수천명의 조선족이 운집해 조선족사회를 형성하고 이와 더불어 최근 20여년래 국내에서 신설된 첫 공립조선족학교인 영구시발어권구조선족학교가 우뚝 서있다는것이 더욱 자랑스런 일이다.
1992년 10월 국무원에서 영구시 발어권구에 영구시경제기술개발구 설립을 허가하자 한국기업들이 속속 입주하면서 동북3성에서 조선족들이 이곳에 모여들기 시작했다. 1990년 전국 제3차인구조사때만해도 발어권구내 조선족은 100명 미만이였지만 한국기업수가 늘면서 2000년에 이르러 1,300명에 달했고 현재는 3,000명에 육박하고있다. 일례로 2006년 12월, 흑룡강성 밀산현 련주산진의 475공장의 조선족직원가정 73가구가 집단으로 발어권구에 이주해와 정착했다.
90년대후반 개발구에는 화장용구, 태산의류, 일심상포, 신국상포, 대명찬구, 강진봉제, 현진봉제, 신아조화, 보원보석, 남산림산, 라성피혁 등 한국기업이 26개에 달했으며 재영구한국상회는 료녕성내 한국상회가운데서도 막강한 파워를 갖고있었다. 따라서 한국기업의 임가공과 외화창출능력은 영구시뿐만 아니라 료녕성에서도 상위수준을 차지하였다.
한국기업에 취직한 조선족들은 중견자로 활약하였는데 어떤 한국사장은 기여가 큰 조선족직원에게 포상으로 통크게 집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이 시기 조선족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조선족학령아동이 307명에(1999년) 달했다. 조선족자녀들의 취학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구한국상회는 3년간의 노력끝에 발어권구실험소학교에 1997년부터 조선족반을 개설하였고 2001년에는 개발구에서 제공한 부지에 자금 100여만원을 투자하여 500평방메터의 조선족소학교를 지으려고 했다. 그러나 한국기업의 경기불황 등 원인으로 공사를 추진하지 못했고 경비, 체제 등 허다한 원인으로 부설조선족반도 2003년 7월에는 정지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자녀들의 취학난이 열점문제로 대두되자 안정애, 김영일은 "기초교육은 정부에서 꾸려야 한다"고 촉진회를 대표하여 개발구령도들과 학교문제를 십여차 교섭하였고 개발구령도들은 학교문제를 끝내 일사일정에 올려놓고 연구하였다.
당시 개발구내 조선족학생수가 257명(그중 한국적학생이 55명)이였는데 민족학교가 없어지자 52명이 외지에 가 공부하였고 또 100여명의 한국기업내 조선족종업원자녀가 부득불 발어권을 떠났다. 개발구에서는 이런 상황에 비춰 발어권구조선족학교를 꾸릴데 대해 동의하고 교육교학시설, 교사편제, 경비 등 방면에서 우대정책을 제공하였다. 이리하여 2007년 9월 1일, 발어권구조선족학교는 해성소학교의 부분 교사를 빌어 개학하였고 부분 교원을 초빙하여 교사대오를 강화하였다. 개발구정부에서는 민족교육환경을 한층 강화하기 위해 자금 4,000만원을 투자하여 1.3만평방메터의 신축교사를 짓고 민강로소학교와 공동사용하게 하였는데 발어권구조선족학교청사만 사용면적이 3,960평방메터(18개 반급형)이다. 2012년부터 밝고 넓은 신축청사에 입주한 영구시발어권구조선족학교는 현재 소학생이 105명, 그중 유치원생이 35명, 한족학생이 25명,한국적학생이 6명이다.
김룡만교장(현 영구시정협위원)은 만약 시민위 안정애부주임(퇴직)과 시인대 민교외위 김영일주임을 비롯한 촉진회의 적극적인 지지와 그리고 발어권구조선족사회의 노력이 없었다면 발어권구조선족학교는 생겨날수 없었다"고 말한다.
료남지역 최대 조선족마을과 조선족양로원
개주시 서해판사처(서해농장)에 속하는 쌍천안촌(双泉眼村)은 조선족인구가 1,592명으로 료남지역 최대 조선족마을이라 불리운다. 이 마을의 조선족로인협회는 1982년에 설립되여 료녕성내 조선족로인협회중 력사가 가장 오랜 로인협회의 하나다.
심대고속도로 영구남출구에서 내려 오른쪽으로 굽인돌이를 돌아 1.5킬로메터 달리면 황금빛으로 새겨진 "쌍천안마을" 간판이 한눈에 안겨온다. 쌍천안촌은 쌍천안산을 앞뒤로 살림집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있었고 로인협회 활동실도 자리하고있었다. 삼면이 산에 둘러쌓이고 서쪽으로 바다를 향하고있는 마을이였는데 마을 동쪽의 산곡에 두개의 우물이 있다고 하여 "쌍천안"이라 불렀다 한다. 촌장이 외출중이여서 촌부녀주임 김춘삼씨가 반갑게 취재팀일행을 맞아주며 촌상황에 대해 소개해주었다. 촌에 수전면적이 약 2,000무이지만 많은 촌민들이 해외에 돈벌이하러 떠나 대외에 도급주고있고 과거에는 벼농사가 위주였지만 현재는 해외돈벌이가 이 마을의 주요 경제래원으로 되고있다.
이 마을력사는 1947년으로 소급해 올라간다. 이해 국민당구역의 반산현 가장사(현재 대와현 평안향경내)에 살던 하인도 등 11가구의 조선인농민들이 가족을 데리고 조선으로 가던중 먼저 해방을 맞은 개평현을 경유하다 당시 개평현정부 현장의 적극적인 만류로 이곳에 머물게 되였고 현정부의 도움으로 수전을 풀게 되였다. 그뒤 반산현에서 조선인 73가구와 길림성 돈화현에서 23가구가 선후 이곳에 집단이주해 1950년초에 개평현에서 첫 호조조-"최영진호조조"(후에 최영진농업생산합작사)를 건립했고 후에 조선족세대수가 늘어나면서 당시 료동성 직속의 "동방호집단농장"을 꾸렸다. 이 농장은 다시 태양승농장에 귀속되였다 1958년 "대약진"시기 개평현 서해국영농장과 통합하였다.
마을이 번창하던 시기 마을에는 벽돌공장, 랭동고, 농산물가공공장, 스텐네스찬구생산공장, 전기판넬공장 등 한국독자 및 합자회사들이 많아 촌경제발전에 큰 보탬이 되였다.
쌍천안마을이 심대고속도로외 영구공항, 그리고 고속철역(영구남)과 가까운것으로 교통이 편리하고 기후가 좋아 쌍안천조선족양로원도 바로 이곳에 자리잡고있었는데 이 양로원은 40대 후반의 박종철씨와 그의 안해가 경영하고있었다. 자금 500여만원을 투자한 양로원은 2010년 9월에 개원, 170명을 수용할수 있는 3,000여평방메터의 4층 건물이였는데 현재 조선족로인 110명이 입주하고있었다.
박종철씨는 "해외나 외지에 가있는 자녀들이 미처 돌아오지 못한 림종한 로인들의 후사처리가 가장 힘들지만 양로원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고있다"면서 "현재상황으로 투자금을 회수하기 힘들지만 부모같은 로인들이 만년에 행복하고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고 힘이 난다"고 고백했다.
학교가 무너지면 조선족사회가 무너진다
"학교가 무너지면 조선족사회가 무너진다." 이번 "력사전화기속 성내 조선족사회지역 탐방" 기획취재길에서 자주 듣는 말이고 심각하게 느껴지는 말이다. "허리띠 졸라매더라도 자식공부는 시킨다"며 조선족마을이 있는 곳이면 조선족학교가 생겨났고 조선족학교가 있는 곳이면 해마다 운동회가 펼쳐져 우리 민족의 전통과 문화가 꽃펴 살맞나는 정경들이였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이 중국땅에 와 삶의 터전을 마련하고 한세기가 흐른 지금 조선족학교들은 페교되고 통합되면서 조선족사회가 전례없는 진통기를 겪고있다.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는 영구시 서시구에 위치하고있었는데 이를 중심으로 1킬로메터 반경에 1,500가구의 조선족이 살고있다 하니 산재지역에서 조선족학교가 지역조선족사회의 중심이 되고있음을 잘 말해주는 대목이다.
영구지역에도 20세기 30년대부터 영구보통학교(1933년, 후에 영구시화원국민고등소학교로 개칭), 서당동명보통학교(1935년), 상군대정명보통학교(1938년), 서로만광명보통학교(1937년), 개가동광보통학교(1938년), 대방신**보통학교(1934년), 개평진조선족초급학교(1948년) 등 조선인들이 꾸리는 조선학교들이 나타났다. 건국초기 영구지역 조선족은 8개 촌에 집거하였는데 소학교가 3개뿐이여서 조선족의 학구열을 만족시킬수 없었다. 후에 조선족사회의 강한 요구와 당의 민족정책에 의해 조선족이 사는 곳에 학교가 세워지면서 1985년의 통계에 따르면 영구시조선족소학교외 대석교시수원진신광조선족소학교, 대석교시수원진신건조선족소학교, 개주시서해농장조선족소학교, 로변구변성진쌍성조선족소학교 등 조선족소학교가 도합 5개로 학생이 550명, 교직원이 54명이였다.
2000년 1월부터 영구시조선족소학교분포조정이 시작되면서 영구지역 조선족소학교들은 영구시조선족기숙제학교로 통합되여 영구조선족고급중학교(원 영구시공업학교 교학청사)내 별도의 건물을 갖추고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 소학부로 귀속되였다. 현재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는 학생수가 450명(그중 유아생이 60여명)으로 유치원에서 소학부, 중학부의 영구시조선족기숙제학교로 전반 교육이 일체화시스템을 이루었는데 이것이 기타 한족학교와 비교해 학교의 우세라고 박영림교장은 소개했다.
성내 허다한 조선족학교들에서 학생수가 급감하는 상황에서도 이 학교의 학생수는 최근년에 늘어나고있는데 학부모들이 교사들의 사덕(师德)에 대해 인정하고 교원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교수질을 백방으로 제고시킨데 있다고 한다. 올해에도 대학입시에서 고중졸업생 28명이 모두 대학입학점수선에 도달하여 영구시적으로 제2위를 차지하였으며 최근 4년간 1명이 청화대학에, 2명이 북경대학에 진학하는 등 기꺼운 성과를 이룩하였다.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는 무에서 유로 유에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시련을 겪어왔다. 1953년만 해도 영구지역에는 조선족중학교가 없어 소학교 졸업생들은 려대시대련조선족학교로 원정길에 올라야 했다. 1955년 5월부터 이 학교가 영구현 대석교진에서 운영되다 1957년 4월에 다시 안산으로 갔는데 영구지역 조선족소학교 졸업생들은 1978년까지 이 안산시조선족중학교에 다녀야 했다.
그러다 1978년 11월 25일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가 료녕성5.7학교(현재의 반금시 흥륭대구)에서 개학을 맞았고 이때로부터 영구지역에는 소학교에서부터 고중단계에 이르는 완정한 조선족교육시스템이 형성되였다.
리더의 역할
취재팀은 이번 영구지역 조선족사회 취재길에서 "만약 영구시민위 안정애부주임과 영구시인대 민교외위 김영일주임의 헌신적인 노력이 없었더라면..." 하는 말을 자주 들을수 있었다.
영구지역에서는 안정애씨와 김영일씨를 두고 "안-김조합"이라 부르는데 안정애는 시민위에서, 김영일씨는 시인대에서 각자의 자원우세를 리용하여 민족간부의 역할을 충분히 발휘하였다. 이들은 과장시절때부터 영구시조선족고급중학교 관련 등 굵직한 현안들을 하나하나 풀어가면서 조화로운 영구시조선족사회를 영위해나가기 위해 많은 심혈을 기울여왔다.
2000년 영구지역 교육분포망조정이 있을 때 당시 안정애는 김영일을 찾아 의견을 교류하고 "조정은 불가피적이다. 이는 조선족교육 환경과 수준을 높일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에 주동을 쟁취해야 한다"고 판단하고 함께 한사코 조선족소학교의 통합을 반대하는 학부모들을 설득해냈다. 김영일은 인대대표들을 동원하여 조선족학교통합 관련 제안을 정부에 제출하여 채택함과 아울러 널직한 자리로 학교청사 자리를 쟁취하였다.
영구시조선족유치원도 원래는 민영으로 운영되여 국가의 재정지원을 받지 못했는데 김영일이 인대대표들을 동원하여 시인대회의에서 공립유치원으로 변경시켜줄것을 강력히 요구하여 시정부에서는 공립유치원으로 변경시켜주고 9명의 교사편제를 주었다.
쌍합조선족촌의 유기농업발전, 신건촌과 쌍천안촌의 특색촌 건설에서 안정애의 역할이 컸다. 그는 또 영구시조선족소학교와 문화관이 성민위의 "성광공정" 프로젝트에 들어가 지원금을 쟁취하는데도 큰 역할을 했다.
김영일씨는 우리는 "8년 분투"로 두가지 큰 일을 이뤄냈다고 자랑했다. 하나는 2005년부터 시작하여 2013년에 문화관 관사를 유럽식건축에 대형극장까지 달린 일류시설로 탈바꿈시켰고 또 하나는 2006년부터 시작하여 2014년에 발어권구조선족학교의 법인대표 자격을 쟁취한것이다.
원래 심양태생인 김영일씨는 연변대학 조문학부를 전공하고 영구시민위에 배치되였다 시인대로 전근되였는데 얼마나 영구조선족사회를 위해 열심히 일하였는지 이 지역의 리더로 인정받고있을뿐만 아니라 영구지역 조선족력사 연구전문가라 해도 손색이 없다. 1986년부터 그는 수년간 심혈을 기울여 수십만자에 달하는 "영구조선족지"를 탈고했다.
영구지역에서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목소리를 정부에 전달할수 있는 민족간부와 인대대표, 정협위원이 날로 줄어들어가고있다. 조선족인대대표와 정협위원이 가장 많았을 때는 지난 1983년에 시인대대표와 정협위원이 19명이였지만 이번기에는 7명뿐이다. 다행히 이번에 원 영구시 서시구당위서기였던 윤성복씨가 부시장으로 발탁되면서 조선족사회는 자못 반기는 기색이다. 이로써 우리 성내 조선족부시장이 금주시 안금향부시장과 합쳐 두사람이 나타난것이다.
조선족인구의 증가, 조선족부시장의 출현 등으로 영구조선족사회는 전례없는 전성기를 맞고있다. 따라서 영구시소수민족문화예술관 1인자 인사문제로 야기되는 조선족사회의 불만과 산재한 문제들을 보다 원만하게 풀어나가고 전성기에 걸맞는 영구조선족사회의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