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학자 -- 황유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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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4-29 16:30|본문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학자 -- 황유복
2019.04.29
1.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면서
1943년 음력 2월2일, 룡이 겨울잠에서 깨여나 고개를 든다는 ‘룡대두(龙抬头)’날 황유복 교수는 길림성 영길현 쌍하진 부근의 신농장에서 유복자로 태여났다.
항일단체 지원을 책임졌던 아버지가 일제한테 살해되여 아버지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유복자로 태여난 황유복 교수는 두살때 어머니까지 여의고 강인한 할머니의 슬하에서 자라났다.
황유복 교수는 자신의 수필집 《사랑의 사회학》에서 ‘나는 지금까지 이름도 없이 이 세상을 살아왔다’며 이름 지어줄 사람마저 없는 시골 유복자로 태여나 어려서부터 ‘유복’이라고 불리웠지만 소학교 입학시 은사님의 덕에 있을 ‘有’자에 복 ‘福’자를 붙여 황유복(黄有福)이라는 “축복 받은 이름”을 가지게 되였다고 썻다.
그후 동창이나 은사들로부터 ‘有福’이라는 이름이 촌스러우니 고치라는 말도 들었고 또 문화대혁명시기 홍위병들로부터 ‘有福’이란 이름이 “봉건주의 악취”가 풍긴다며 24시간내에 이름을 고치라는 강요도 받았지만 “맑스 엥겔스, 레닌, 스딸린 어록”이라는 책에서 “가난한 사람은 유복하다(穷人是有福的)”라는 어구를 찾아내 아슬아슬했던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2. 우리(조선족)는 누구인가?
1957년, 길림시 조선족중학교 초중3학년에서 공부하던 당시 그는 중국대지를 휩쓸었던 ‘반우파투쟁’을 경험하게 되였다. 그가 존경하던 몇몇 조선족 선생님들은 ‘민족우파’로 몰려 강단에서 사라졌다.
그는 다른 한족 중학교의 선생님들은 우파인데 왜 조선족 학교의 선생님들은 ‘민족우파’라고 하는지 그 당시 리해할 수가 없었다.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뒤졌지만 ‘민족우파가 무엇이고? 민족이란 무엇이며? 그리고 조선족이란 무엇인가’라는 답을 찾을 수 없었다.
우리(조선족)는 누구인가?’라는 의혹을 가진 그는 당시 유일하게 민족력사를 배울 수 있는 중앙민족대학(원 중앙민족학원) 력사학부에 진학하려는 꿈을 가지게 되였다.
중앙민족대학 력사학부에 입학하려면 탄탄한 한어 실력이 필요하고 또 중국 고대 한어나 문학에 대한 깊은 료해가 필요했기에 선생님들은 헛된 노력을 하지 말라고 극구 말렸지만 끈질긴 노력으로 1961년 9월에 그는 중앙민족학원 력사학원에 입학했다.
대학 첫 학기에는 반급에서 꼴찌였다. 한어가 약해 교수님들의 강의를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어 무척 고생했지만 피타는 노력으로 다른 학생들과의 차이를 줄였다.
1966년 7월, 23세 젊은 나이에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한 그는 은사인 부락환(傅乐焕) 교수의 추천으로 중앙민족대학 조교로 남게 되였다.
하지만 졸업과 동시에 발발한 ‘문화대혁명’으로 그는 졸업후 대학에 발도 들여놓지 못한채로 중국인민해방군 북경군구 공병부대(천진 당고지역)에 2년간 ‘단련’ 받으러 내려가야 했다.
젊은이들의 열정과 꿈을 마멸시키는 역경속에서도 그는 학문에 대한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로동단련’을 받으며 그는 짬짬이 틈을 타 영어를 자습했다. 이는 향후 그가 세계에로 향해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직접적으로 마련해주었다.
1979년 1월, 사령부 정치부주임이 영급 참모로 정치부에 남으라는 면담을 받았고 또 같은해 6월 전국인민대표대회 민족위원회 처장으로 내정되여 령도 직무에 오를 수 있는 기회도 있었지만 그는 모두 거절하고 대학으로 돌아와 민족학자의 길을 선택했다.
3. 조선족이라고 불러주세요!
문화대혁명이 끝난후 황유복 교수는 학문연구에 더욱 몰입하게 되였다. 국가 부주석이였던 송경령 녀사가 창간한 《중국건설》외국어잡지에 “목장의 집(Home on the Range)”, “중국조선족의 고향(Koreans in China)” 등 론문들을 발표하며 황유복이라는 이름은 국제 학자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한국 서울대학, 미국 코네티컷대학에서도 그한테 방문요청을 보내왔다.
1984년 코네티컷대학의 초청으로 그가 처음 미국에 갔을 때, 뉴욕에서 개최된 “제1차 해외한민족회의”에 참석해 라는 론문을 발표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조선족’이라는 명칭에 생소했던 현지 신문들은 ‘조선족’을 모두 ‘재중 한인’ 혹은 ‘한민족’으로 보도했다.
그는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학계에 알리기 위해 《세계신보》사에서 그의 ‘조선족’ 관련론문을 부탁해왔을 때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고치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1985년 1월1일자로 라는 론문을 발표했다.
이 론문은 미국 등 서방세계에서 처음으로 ‘조선족’이라는 이름으로 중국조선족을 소개한 론문이라고 한다.
1987년 9월부터 황유복 교수는 미국 하버드대학 교환교수로 있으며 ‘조선족’에 대한 연구와 ‘홍보’ 활동을 더욱 활발하게 진행했다.
그는 라는 연구과제에서 사상 처음으로 중국조선족의 민족정체성과 국가정체성 그리고 조선족 문화의 신분과 속성에 대해 확고한 정의를 내렸고 또 에서 ‘조선족’이라는 용어에 대한 민족학적인 정의를 규명했다.
황유복 교수의 제자 정희숙이 쓴 글에서 보면, 그의 끈질긴 노력으로 국제학계에서는 80년대부터 ‘재중한인’이라는 용어 대신 ‘조선족’이라는 용어를 쓰게 되였고 특히 미국, 일본, 한국 등 나라들에서도 ‘조선족’이라는 명칭을 공식 사용되게 되였으며 많은 학자들은 그한테 ‘조선족 연구분야의 세계적인 권위자’라는 타이틀을 달아주었다.
하지만 황유복 교수는 자신을 절대 이러한 타이틀을 인정할 수 없다며 모든 학자는 자신만의 독특한 연구방법과 성과를 가지고 있듯이 자신은 그냥 조선족을 연구하는 한 학자일뿐이라고 기자한테 말했다.
4. 하버드대학도 만류하지 못한 그의 민족애
하버드대학교에서 교환 교수로 있는 동안 하버드대학 관련 책임자가 하버드대학에 남아주기를 황유복 교수에게 여러번 제의했다.
높은 급여, 우월한 학술분위기, 안락한 생활조건, 하버드대학교에서의 교수직은 모든 학자들의 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특히 지난세기 8, 90년대 중국을 휩쓸었던 ‘미국열’로 미국에서의 생활은 수많은 중국인들의 꿈이였다.
하지만 하버드대학교의 만류에 황유복 교수는 단호히 거절했다.
“제가 평생 관심가지는 과제는 조선족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제가 만약 조선족을 떠나 미국에 남는다면 조선족을 어떻게 연구하겠습니까?”
그는 40여년간 이러한 자세로 조선족사회에 대한 학문연구를 해왔고 또한 조선족사회의 발전을 위한 사회실천으로 학문연구의 의미와 삶을 넓혀왔다.
5. 민족교육발전을 위해 바친 넋
중앙민족대학 오상순 교수는 황유복 교수의 삶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의 삶은 학문을 위한 끊임없는 탐구의 일생이였고 일편단심 조선족 사회를 위해 헌신해온 일생이였고 없는 자, 불행한 자, 약한 자를 사랑하고 도와주며 살아온 일생이였다.”
1972년 황유복 교수는 중앙민족대학 조선어학과 창립에 큰 힘을 이바지했고 또 3년간 “조선문학” 강의를 감당하기도 했다.
특히 1989년 귀국후 그는 몇년간 외국 교환 교수로 있으며 모은 자금과 정력을 민족 발전에 아낌없이 쏟아부었다.
1989년 북경교육부의 허락을 받고 ‘북경조선어학교(중한수교후 북경한국어배훈학교로 개칭)’를 설립하여 민족언어를 상실한 대도시 조선족 청소년들에게 무료로 우리말과 글을 가르쳤다. 뿐만아니라 지방도시의 요청을 받아들여 심양, 장춘, 할빈, 길림, 목단강, 단동, 석가장, 위해, 훅호트, 해남도 해구 등 10여개 도시에 분교를 설립하여 무료로 민족언어교육을 실행해왔다.
자신은 고물 자전거를 타고 다니면서도 국외에서 강의, 연설, 저서출판 등을 통해 얻은 200여만원(인민페)을 아낌없이 우리말교육과 어려운 학생들을 돕는데 썻다. 2000년부터 동북민족장학회 집행회장 직을 력임하며 천여명에 달하는 조선족 중소학교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조달했고 또 남호장학회를 설립해 대학입학시험에서 성급 수석을 차지한 조선족 학생들에게 영재장학금도 듬뿍 안겨주었다.
또 조선족 사회 여러가지 문제 해결을 위한 조선족발전학술대회도 1994년부터 해마다 진행했고 2007년에는 국가민정부의 비준을 거쳐 국가 1급 학술단체인 ‘중국조선민족사학회’도 설립했다.
2000년 1월 16일, ‘제6회 조선족발전을 위한 학술 심포지엄’에 참가한 당시 전국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이였던 조남기는 6명의 조선족 장군들에게 ‘황유복 교수야말로 조선족의 진정한 영웅”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6. 나의 버킷 리스트(遗愿清单)
2018년 2월호에 실린 황유복 교수의 “나의 버킷 리스트”라는 글은 퇴직후의 심경을 잘 말해주고 있다.
[버킷 리스트 1] 사회활동을 줄이면서라도 가족과 함께 풍요롭게 보내는 시간을 늘여갈 것이다.
[버킷 리스트 2] 죽을 때까지 조선족발전을 위한 사회실천을 계속 해나가는 것이다.
[버킷 리스트 3] 문헌학, 고고학, 언어학, 신화학, 농학, 유전학 등에 대한 통합적인 연구방법으로 민족기원을 밝혀내는 것이다.
황유복 교수는 학술뿐만아니라 다양한 방면에서 활약을 보인 학자이다.
로령임에도 집필활동에 게을리하지 않고 또 학술에 대한 구지욕을 필생의 업으로 삼아 조선족 연구 분야에서 괄목할 만한 성과를 이룩했다.
황유복 교수는 “나의 ‘버킷 리스트’는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라며 인생의 아름다운 노을속에서 삶의 가치를 찾기 위해 오늘도 노력하고 있다.
[출처] ‘조선족’이라는 이름을 세계에 널리 알린 학자 -- 황유복 - 모이자 뉴스
[링크] http://news.moyiza.kr/6844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