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뚱보 김씨아저씨의 서울때밀이 (6)
페이지 정보
작성자 :운영자| 작성일 :09-09-28 09:33|본문
○ 김성호
며칠후 숭례문 방화사건이 한국을 뒤집었다.숭례문은 남대문이라고도 한다. 나는 반달전에 남대문시장에 구경갔다가 숭례문을 본적이 있다. 별로 웅장한 건물이 아니여서 자세히 보지 않고 그냥 지나쳐버렸는데 그번이 마지막일줄은 몰랐다.
인천의 채종기로인의 고의 방화로 5시간만에 조선시대 건축의 대표가 되는 국보 제1호가 전소(全燒)하다싶이 되였다. 경찰들이 채씨의 집에 들이닥쳤을 때 그는 태연하게 고스톱(화토)을 치고있더란다. 채씨는 10년 징역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내가 한국에 있는 동안 불행한 일이 꼬리를 물고 터져나왔다.
나는 말미 3일을 얻고 한국산업공단의 교육을 받아야 했다. 교육을 받지 않으면 취업이 불법이다. 고시원에 살 때 교육받는 날자를 예약한적이 한번 있는데 간밤에 설치해놓은 휴대폰알람이 아침에 울리지 않아 창문이 없는 캄캄한 방에서 기상하여 엄벙덤벙 달려갔으나 이미 한시간이나 지각이였다. 그래서 한국인력공단의 선생님들에게 수없이 빌었지만 안된다며 딱 잡아떼기에 하는수없이 다시 등록하여 교육기일이 그만 한달뒤로 미루어졌다. 교육받기 전에 신체검사가 있는데 나는 고혈압진단을 받았다.
집에서 돌아온 《전형》이 달라졌다. 때밀이는 딴전에 치고 컴퓨터에 매달려 주식을 연구하며 일확천금만을 꿈꾸고있었다. 손님이 몰려 내가 미처 못 밀어내자 손님들이 류실되기 시작했다. 설상가상으로 드림한증막 부근에 더 큰 사우나가 생겨 장사가 영향을 받게 되였다.
하루는 보다 못해 호의로 한마디 권고했는데 그게 도화선이 되여 조선족이 버릇없이 사장보고 이래라 저래라 시킨다며 나에게 별의별 욕설을 다 퍼붓는것이였다. 내가 한마디 대들자 그는 나의 멱살을 잡더니 주먹을 휘둘렀다. 안경이 날아갔고 코피가 터졌다. 나는 휴대폰을 꺼내 경찰에 신고하려고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전씨는 황급히 제지하고 나서며 돈으로 해결하자는것이였다. 나는 배상은 필요없으니 깨진 안경을 바꿔주고 월급을 당장 지불해 달라고 했다. 그는 나의 요구를 순순히 들어주었다. 그날로 나는 미련없이 드림한증막을 나왔다.
우선 잠자리를 마련하는것이 급선무였다. 조선족교회를 찾아가면 하루 2천원에 먹고 자는것을 해결할수 있어서 가봤는데 초만원을 이루어 되돌아섰다. 지하철 어구에서 다시 무가지를 집어들었다. 광고란에 남구로 3번 출구의 중국동포타운센터 신문사 빌딩 4층에 하루 5천원하는 동포쉼터가 있다는 대목을 읽고 나는 신대륙이나 발견한것처럼 흥분되여 무작정 그리로 달려갔다. 쉼터는 통간집이였는데 휑하게 커서 살것만 같았다. 칸막이가 없는 장판구들우에 침대 한층이 더 설치되여 있어서 마치 80년대 내가 다녔던 조선족중학교의 기숙사를 방불케 하였다. 방세를 한달치씩 지불하면 하루 3천원으로 할인된단다. 그제야 나는 여기가 조선족들에게 유명한 가리봉동이라는것을 알게 되였다.
거리에는 화교들이 꾸리는 상점과 분식점들이 수두룩했다. 할일 없는 로인화교들이 상점앞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중국장기를 두고있었다. 중국찐빵(包子), 콩물, 꽈배기(麻花) 등을 손쉽게 사먹을수 있었다. 중문시스템을 깐 pc방도 있었다.
pc방에서 QQ메신저로 중국친구와 대화를 나누고있는 한 한족녀자를 만난적 있는데 심양에서 한국의 화교에게 시집온 그녀는 부모를 다 한국에 초청하여 가리봉동에서 분식점을 차리고있었다. 말 그대로 가리봉동은 한국의 당인가(唐人街)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