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 역사의 중심 종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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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20-01-01 23:41|본문
한민족의 첫 번째 중심세력
원동중이 지은 ‘삼성기전 하편’에 환웅의 배달의나라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환국 말기에 안파견이 밑으로 삼위와 태백을 내려다보시며 ‘모두 가히 홍익인간 할 곳이로다.’ 하시며 누구를 시킬 것인가 물으시니 모두 대답하기를 ‘서자 환웅이 있어 용맹함과 어진 지혜를 함께 갖추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의 이념으로써 세상을 바꿀 뜻이 있었사오니 그를 태백산에 보내시어 다스리게 함이 좋겠습니다.’ 하니 마침내 천부인 3가지를 내려주시고, ‘그대는 무리 3천을 이끌고 가 하늘의 뜻을 열고 가르침을 세워 잘 다스려서 만세의 자손들에게 큰 모범이 될지어다.’ 라고 하셨다.”
“환웅이 3천의 무리를 이끌고 태백산 꼭대기의 신단수에 내려오시니 이곳을 ‘신시’라 하고 이분을 환웅천왕이라 한다. 풍백, 우사, 운사를 데리고 곡식, 생명, 형벌, 병, 선악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 일을 모두 주관하여 세상을 교화하였으니 널리 인간 세상에 유익함이 있었다.”
환웅이 태백산에 내려와 신시에서 ‘배달의나라’를 개천하신 것은 한민족이 처음으로 제도를 갖춘 나라를 세운 것이다. 환웅이 이끌고 온 3천의 무리는 ‘신계지맹(神戒之氓)’으로 천손 사상을 가진 외래 기마민족이다. 오가(五加)의 통치제도와 교화를 통해 토착 농경민족들에게 홍익인간의 정치를 베풀었다.
신시에 배달의나라를 개천한 이후 18세를 이어 1565년간 통치한 환웅들의 ‘천손 기마민족’이 한민족의 첫 번째 중심세력이다.
한민족의 두 번째 중심세력
고려 공민왕 때 이암이 편찬한 ‘단군세기’에는 단군의 출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이르러 신인 왕검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의 터에 자리 잡았다. 무리들과 더불어 삼신님께 제사를 올렸는데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함께 갖추었더라. 마침내 능히 하늘의 뜻을 받들어 그 다스림이 높고 크고 맹렬하였으니, 구환의 백성들이 모두 마음으로 따르며 천제의 화신이라 하고 그를 임금으로 삼아 단군왕검이라 하였다. 신시의 옛 규칙을 도로 찾고 도읍을 아사달로 정하여 나라를 세워 ‘조선’이라 이름했다.”
단군은 배달의나라 18세 ‘단웅 환웅’과 농경민족의 공주인 웅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단군은 어머니 웅녀의 명으로 외조부가 다스리는 농경민족의 소왕국으로 가서 14세부터 ‘비왕’으로 일하다가 외조부의 사망으로 32세에 왕위를 계승했다. 37세 되던 해에 부친 단웅의 사망으로 형들과의 계승전쟁에서 승리한 단군은 배달의나라 19대 환웅으로 추대되었다.
그러나 단군은 천손환웅족이 통치하고 많은 농경민족들이 지배받는 배달의나라 환웅이 되기를 거부하고, 천손기마민족과 모든 농경민족이 대등하게 통합되는 새 나라 건국의 뜻을 밝혔다. 그의 건국이념에 공감하는 800명의 족장들이 단군을 따라 백두산에 올라 하늘님께 제사한 후 ‘조선’을 개국하고 단군왕검을 임금으로 세웠다.
단군왕검은 국가제도에 관하여 1565년 전, 환웅 큰임금이 세우신 ‘신시의 옛 규칙’과 ‘홍익인간’ 이념을 그대로 계승했다. 단군의 3계명은 경천(敬天), 효(孝), 보본(報本)이다. 단군은 자신과 천손환웅족 뿐만 아니라 모든 농경민족도 모두 하늘님 자손이라고 선언했다. 한민족의 ‘민본사상’의 뿌리가 여기에서 발원했다. ‘보본’은 배달의나라를 개천하신 환웅 큰임금의 은공을 잊지 말고 보답해야 한다는 계명이다. 조선의 뿌리와 정체성의 연원을 명쾌하게 밝힌 것이다.
단군왕검은 비왕과 왕으로 24년, 단군으로 즉위해 제위(帝位)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 130세까지 사셨다. 치세 말년을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경자 93년, 천하의 땅을 갈라서 삼한(三韓)으로 나누어 다스렸으니, 삼한은 모두 오가(五加) 64민족을 포함했다.”
단군왕검과 함께 조선으로 대통합을 이룬 64민족이 한민족의 두 번째 중심세력이다.
한민족의 세 번째 중심세력
‘동사강목’이나 ‘응제시주’에서는 ‘단군께서 1048년 혹은 1908년을 사셨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단군왕검의 일생이 아니라, 조선의 치세를 기록한 것이다. 1048년은 1대부터 21대 소태단군까지의 전기조선 1048년간을 말한 것이다. 1908년은 1대부터 43대 물리단군까지의 전기와 후기조선 1908년간을 말한 것이다.
44대 구물단군에 이르러 조선의 국호는 ‘대부여’로 바뀐다. 47대 고열가단군으로 대부여가 끝나면 해모수단군이 ‘북부여’를 창건해 계승한다. 1908년간 지속된 조선의 시대가 가고, ‘부여’가 한민족의 역사 전면에 등장한 것이다.
단군세기나 북부여기에 '부여족의 출현'에 관한 특별한 설명이 없다. 역사학자 정형진은 2003년 펴낸 저서 ‘고깔모자를 쓴 단군’에서 부여족이 한민족의 역사 속으로 들어오는 경로를 자세히 추적 설명하고 있다.
“부여는 춘추시대에 서아시아 터키 중서부 지역에서 중국 발해, 현재의 난하 지역으로 이주해온 프리기아(Phrygia)족을 2글자로 음사 표기한 것이고 1글자로 줄이면 예(濊)족이 된다. 부여(夫餘)라는 명칭이 최초로 보이는 곳은 <사기> 화식열전이다. ‘연나라는 북쪽으로 오환, 부여와 인접해 있다.’ <논어주소>에는 ‘동북 구이 중에 다섯은 부유이다.’라고 했고, <자회보>에는 ‘부유는 동방의 나라 이름이며 곧 부여를 말한다.’고 했다. 즉 부유는 부여족을 말한다.”
프리기아인을 추적하는 특징은 ‘고깔모자’이다. 프리기아를 침공한 스키타이인이나 킴메르인 모두 고깔모자를 사용하는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대부여와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 백제와 신라, 가야 모두 고깔모자를 사용했고 고분 벽화와 유물을 남기고 있다.
기원전 7세기 초중엽에 지금의 흑해 북부에서 스키타이인들이 영역을 확대하면서 발생한 민족이동 과정에서 밀려난 킴메르인들은 카프카스 산맥을 넘어 남쪽으로 이동하여 터키 중부의 프리기아인들을 급습한다. 이때 그곳에서 경제적으로 부강하고 종교적으로도 상당히 발달한 제도를 가지고 있던 프리기아인들이 킴메르인의 침입으로 몰락하게 된다.
살아남은 프리기아인들은 동쪽으로 이동하여 알타이와 천산산맥의 사이 길을 넘어 천산 동남쪽에 머물다가 ‘난하’ 발해지역까지 이동해 정착하게 됐다. 정착한 부여족<예족>은 발해 동북지역의 선주민<맥족>들과 결합해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주도하는 세력으로 부상했다.
구물단군이 국호를 조선에서 대부여로 바꾼 것이 BC425년이므로, 프리기아인들이 기원전 6세기에 발해에 도착해서 대부여가 출현할 때까지를 조선의 백성으로 동화되는 시기로 설명할 수 있다.
그 이후 중국대륙이 진, 한나라로 통일제국을 형성하고 동북쪽으로 침공하는 것을 북부여와 고구려가 9백년간 봉쇄하고 좌절시켰다. 이로써 한민족 역사에 부여족이 등장하는 의미와 시대적 역할은 뚜렷하다.
그리하여 세 번째 한민족의 중심세력은 부여족이다.
6천년 동안 형성된 한민족의 문화와 정체성
한민족은 단일민족이라고 한다. 혈통이 단일한 것은 아니고 문화와 전통이 단일하다. 6천년 역사에서 여러 종족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중심세력을 계승하며 한민족의 문화와 정체성을 형성해 온 것이다.
단군왕검께서는 처음에 배달의나라를 개천하신 ‘환웅큰임금’의 공적을 기억하고 은공에 보답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치신다. 처음을 알게 되었으니 우리들은 6천년 역사의 어느 부분도 버리지 않고 간직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고 한민족이다.
출처 : 재외동포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