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숨과 맞바꾼 한글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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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21-10-08 16:06|본문
1935년 조선어학회 표준어사정위원들이 현충사를 방문하고 찍은 기념 사진. 표준어사정위원회에는 서울 출신 26명, 경기 11명, 각 도 대표 36명 등 73명의 위원이 참여해 표준어의 어휘를 사정(司正)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한글학회 제공
‘우리말은 곧 우리 겨레가 가진 정신적·물질적 재산의 총목록이라 할 수 있으니, 우리는 이 말을 떠나서는 하루 한때라도 살 수 없는 것이다.’ - ‘조선말 큰사전’ 머리말 中
1957년 ‘조선말 큰사전’ 여섯 권이 완성됐다. 1947년 첫 권을 출판한 지 10년 만의 일이다. 이 대업의 중심엔 조선어학회가 있었다. 오늘날 우리말과 글을 자유롭게 쓸 수 있는 건 일제의 핍박에서부터 한글을 수호하고자 분투한 이들의 희생 덕분이다. 우리말을 지키는 것이 민족 정체성을 지키고, 독립을 기약하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 믿었던 조선어학회 정신을 575돌 한글날을 앞두고 반추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금으로부터 79년 전인 1942년 조선어학회가 추진해오던 조선말 큰사전 편찬 작업이 중단됐다. 우여곡절 끝에 인쇄 직전 단계까지 왔으나 그해 함흥에서 정태진이 일제에 검거된 것을 시작으로 이듬해까지 ‘민족주의 단체로서 독립운동을 하고 있다’는 연유로 충청 출신의 서승효(충남 청양), 정열모(충북 보은), 이강래(충북 충주) 등 조선어학회 인사 33명이 대거 체포돼 고초를 겪게 되면서다. 해방 이후 한글 연구와 보급의 기반을 준비하던 조선어학회는 강제 해산되는 처지가 됐고 그 증거이기도 한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일제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일제에 의해 자취를 감춘 우리말과 글의 기초는 해방 후인 1945년 9월 서울역 조선통운 창고에서 우연히, 기적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창고에서 갈 곳 없는 화물을 정리하던 인부들이 일제가 빼앗았던 조선말 큰사전의 기반인 2만 6500여 장 분량의 원고 뭉치를 발견하면서다. 우리말과 글로 교육하고, 우리말과 글만으로 살아내는 세상을 갈망했던 조선어학회의 꿈이 되살아나는 순간이다. 그 결실이 1957년 모두 16만 5000여 단어를 담은 최초의 한글 사전인 조선말 큰사전 탄생이다.
조선말 큰사전이 완성되면서 한글은 대중 속으로 더욱 깊숙이 자리매김했다. 2021년 한국은 세계에서 문자해독률이 가장 높은 나라로 자리매김했고, 한글은 대한민국을 가장 잘 대표하는 자산이 됐다. 이뿐만이 아니다. 이제 한글은 한류와 맞물려 세계의 관심사로 주목받고 있다. 민족의 얼과 내일을 잃어선 안 된다는 절박한 마음으로 우리의 사전을 만들고자 했던 선조들의 노력이 일궈낸 성과다.
그러나 한편에선 희망과 함께 불안한 분위기도 읽힌다. 언어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한다지만 갈수록 정체불명의 단어와 이상한 약어, 비속어와 은어, 국적불명의 신조어 등이 우리말과 글의 본질을 흩트리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습관이고 문화이며 민족의 운명도 뒤바꿀 수 있다. 올바른 언어에 올바른 정신이 깃드는 법이다.
이준섭 기자 ljs@ggilb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