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 전통 ‘떡 문화’ 알린 ‘한류 전도사 안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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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19-09-01 10:44|본문
중국에 전통 ‘떡 문화’ 알린 ‘한류 전도사 안태호’
안태호 前 중국 상해한국상화-한국인회 회장
2019.09.01
토마토무역상사 창업 중국과 교역 1989년 상하이 이주
상해한국인(상)회 맡으며 교민학교 건립과 무료급식제공
전 민주평통 상하이협의회 회장 역임 “통일 밀알 역할”
안태호 前 중국 상해한국상화-한국인회 회장
15억 인구대국 중국에서 우리의 전통 ‘떡 한류’ 붐을 일으킨 최초의 한국인이 있다. 1989년 상해로 이주한 안태호(65, 우리떡집 유한공사) 대표다. 한국의 전통 떡으로 중국인을 매료시킨 그는 본래 무역업 출신이다. 부산대학교를 나와 (주) 진양에서 수출부 차장으로 8년 간 근무했다. 퇴사 후 토마토무역상사를 창업, 중국을 오가며 체험한 ‘21년 중국노하우’를 살려 상하이로 진출해 성공한 굴지의 한국인이다.
- 상하이로 간지 30년 세월이 흘렀다. 소회가 어떤가.
한중수교 이전 1989년 6월21일에 중국에 갔다. 그 당시 국제상사에 다닐 때였는데, 한국 최초로 설립된 중국 지사에 있었기 때문에 중국의 내부를 깊숙이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때는 수교가 안 돼 있어서 일본비자를 받아 중국에 우회해서 들어갔다. 나중에 수교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인 경제교류가 활발해졌다.
한때 토마토 무역회사 대표를 운영하며 중국을 오가기도 했다. 상하이에 있는 유명기업과 합작도 하면서, 보고 듣고 경험했던 중국정보를 주변의 친구들에게 알려 주었다. 당시는 인터넷도 없고 개인이 중국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가 없던 때다. 많은 한국기업들이 상하이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 주기도 했다.
- 국제도시 상하이는 어떤 도시인가. 소개해 달라.
중국은 국토가 광활하고 인구도 많다. 언어도 지역별로 방언과 사투리가 심하다. 북경인이 상하이에 오면 언어소통이 안 된다. 상하이 인구만 해도 2500만 명에 달한다. 서울 인구의 두 배가 넘는다. 인구도 그렇지만 상하이는 경제와 문화, 경제성장률을 놓고 볼 때, 웬만한 나라와 버금간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2,500만 상하이 시장에서 일단 성공하면, 서안이나 우르무치까지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 평생 무역업을 해왔다. 언제부터 했나.
1989년부터 토마토무역상사를 창업해 중국과 무역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30년이 지났는데 10년은 나 혼자 중국을 다녔고, 20년은 가족이 함께 했다. 1998년 온 가족이 상하이로 이주했다. 중국은 나에게 축복이었다. 상하이로 가족이 오면서 사업도 잘되고 돈도 보였다.
자녀들이 점차 성장해 가면서 어떤 사업이라도 해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2002년 봄 어느 날, 비도 오고 아이들이 떡을 먹고 싶다 해서 떡 배달을 시켰다. 배달 된 떡이 빗물에 젖어 먹을 수가 없어서 내다 버렸다. 이를 본 제 아내가 ‘내가 직접 떡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다.
그 후로 집에서 떡을 직접 만들어 우리가 사는 아파트 집마다 돌렸다. 모두 떡이 맛있다는 평을 해주었다. 2002년에 설립한 ‘우리떡집’은 그렇게 출발했다. 처음에 6명이 모여 출발해 한때 종업원이 46명이었다. 지금은 10명 정도로 줄였다.
- ‘한국 전통 떡’ 문화가 중국 전역에 방송됐는데.
중국에도 떡이 있지만 우리처럼 다양한 떡이 없다. 중국 네이멍구(內蒙古) 방송사의 오락 프로에 상하이 '우리떡집'이 전국에 처음 소개되면서 일대 반향을 일으켰다. 불린 찹쌀을 나무판에 올려 떡메로 찧고, 남은 콩고물을 바른 인절미 제조과정이 방영됐다. 태권도와 활쏘기, 윷놀이 문화도 전파를 탔다.
방송 후 한국 떡 붐이 일면서 중국인들의 입맛을 사로잡는 계기가 됐다. 중국인과 교민사회에서 일약 유명한 인사로 떠올랐고, 2002년 '우리떡집'을 본격적으로 개업했다. 현재 1983㎡(약 600평)의 떡 공장을 운영 중이다. 사업 초기에는 교민중심으로 매출을 올리다가, 점차적으로 중국의 고위관료 등 상류층 인사들의 매출이 주요 고객으로 자리를 잡았다.
- 떡 사업을 하게 된 것은 언제인가.
상하이에서 무역업을 하던 때였다. 그때는 수입도 변변치 않아 생활이 어려웠다. 앞에서 말했듯이 어느 날 조선족 동포가 운영하는 떡집에서 떡을 시켜 먹었는데, 맛도 없고 서비스도 형편이 없었다. ‘떡을 이렇게 밖에 못 만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사건이 운로를 바꾼 단초가 됐다. ‘내가 직접 떡 사업을 해야겠다.’고 결심을 했다. 하지만 기술이 없었다. 집 사람에게 얘기를 했더니, 한국의 종로구 인사동의 한 유명한 떡집에서 몇 달 동안 기술을 전수받으면서 사업이 본격화됐다.
- 성공비결을 무엇이라 보나.
엄선된 재료다. 떡 원료인 쌀은 만주에서 들여온다. 고소한 맛을 내주는 참깨는 산둥(山東)에서 조달해 온다. 또한 몸에 해로운 방부제를 전혀 쓰지 않는다. 한국 만두와 호박죽, 대추차, 김밥 등을 판매하고 있는데 반응이 좋다. 방송을 타면서 요즘에는 한국에서도 주문이 온다.
매일 새벽에 일어나 주문을 받은 떡을 만들어 오전 6시까지 상하이시내에 배달을 해준다. 배달체계도 베이징을 비롯해 중국 전역에 12시간 이내에 배달이 가능하다.
- 최초로 성공한 기업가가 됐는데. 어려운 일을 회상한다면.
어떻게 보면 운이 좋았다. 중국에 온지 9년이 지난 1997년에 상하이 서쪽 부근에 집을 장만했다. 김미혜 여사와 아들, 딸도 상해에 정착했다. 당시는 한국인 국제학교도 없는 상태라 상하이 태생의 아이들과 함께 초등학교와 고등학교를 로컬학교에 다니게 됐다.
- 2013년 상해한국인(상)회 회장으로서 교민사회 발전에 힘 써 왔다.
어느 나라 교민사회도 마찬가지지만 처음부터 성공한 사람은 없다. 상하이에도 교민이 8만 명이 넘는다. 상하이 진출기업도 2천개가 넘는다. 이분들을 대표하는 한국인회와 한국상회 회장을 맡으면서 6년을 봉사했다.
상해한국인(상)회 회장은 한국학교 이사장을 당연직으로 겸임한다. 상해한국학교에는 1200명의 학생이 있다. 한국에서 파견된 교사만 120명이다. 그래서 임기동안 한국인회 사무실로 출퇴근했다. 집 사람 고생도 많이 했다.
- 상하이노인회에 무료점심을 제공했다는데.
상해한국인(상)회 사무실에 나오면 상해노인회에 30인분 뷔페 점심을 매일 보내 드렸다. 이분들은 자녀를 따라 상해로 온 분인데, 경제적 능력이 없다. 2012년에 제가 ‘가미가’라는 한식뷔페 음식점을 개업했었는데, 한인회장이 되면서 회장 임기동안 노인회에 무료로 점심을 제공하겠다고 선언했다.
한 끼에 4천원인데 30인분이면 하루 12만원이다. 운반비를 합하면 월 400만원을 넘는 액수다. 힘들었지만, 독실한 기독교인인 아내의 희생과 봉사에 힘입어 지금까지 오게 됐다.
그러나 세상 일이 그렇듯 호사다마(好事多魔)가 있는 법. 몇 년 동안 매주 수요일에 가미가 식당에서 점심도시락을 정성스레 제공했지만, 안타깝게도 문을 닫게 되었다. 하지만 점심을 후원할 기업을 물색해 지속할 수 있도록 했다.
- 설날이면 무료 떡국잔치를 제공했다.
설날이 오면 이곳 교민들이 사정상 고국을 찾아 고향에 못 가신 분들을 위해 떡국잔치를 해 드렸다. 상하이 한국상회와 한인식당 '임비곰비'에서 노인과 유학생 등 수백 명을 초청해 명절 떡국을 제공했다.
제가 떡국용 떡과 음식을 제공하고, ‘임비곰비’ 식당에서 장소와 음식조리를 맡았다. 교민들이 모여 고향에 못 간 마음의 회포를 풀 노래자랑과 윷놀이 행사를 열기도 한다.
- 21대 상해한국인회 회장 당시 ‘소통’을 강조한 교민사회를 만드는데 주력했는데.
2012년 회장선거에서 무엇보다 교민들과의 소통을 강조했다. 그에 앞서 6년 동안 상해한국인회 부회장을 맡으면서 경험했던 경험에서 그 같은 공약을 했던 것 같다. 그동안에 상해한국인회 회장선거는 추대나 단독후보 형식으로 이뤄졌었다.
경선은 내가 처음이었다. ‘비빔밥처럼 함께 소통하는 교민사회 이끌 것’과 ‘서로 화합하는 단체’가 되도록 노력을 했다. 또한 상하이 주재 대기업과 상사주재원의 한국상회 참여도 높여갔다. 이외에도 한국상회 문턱 낮추기, 상하이시 유관기관과 원활한 소통, 재중동포와 교민 화합, 한인회관 건립, 교육과 의료 복지확충, 소 상공 자영업발전 등 공약사업에 힘을 써 왔다.
- 18기 민주평통 상하이협의회 회장에 추대됐다.
우리 민족의 염원인 남북통일은 멈출 수 없는 과제다. 우리 국민이면 통일을 항상 염두에 두고 가야하는 운명적인 단어다. 통일은 혼자 할 수 없다. 우리 모두 함께 힘을 합하고 단결해야 가능하다. 통일의 길이 하루 속히 열리도록 상하이 민주평통도 역할을 해 왔다.
최근 들어 한국과 중국이 사드문제로 인한 갈등이 깊어지면서 중국 내 한국대기업이 이탈하는 등 대중관계가 매끄럽지 못하다. 자차 남북통일에 있어서 미국이나 일본의 영향도 크지만, 결정적으로 중국의 역할도 무시하기 어렵다. 상하이 민주평통도 모든 위원들과 함께 역할을 해 나갈 것이고, 교민사회도 단결해 나갈 것이다.
- 상하이의 학교 현황은 어떤가.
현재 상하이는 한국학교가 부족한 상황이다. 중-고등 정원도 포화상태다. 제비뽑기로 전학생을 받을 정도다. 한국에서는 초-중등학교 교육이 무료지만, 상하이는 한국학교가 한 곳만 있어서 입학할 곳이 없다.
제가 상하이한국학교 재단이사장을 할 당시, 상하이 한국학교가 개교한 이래 학생 수가 가장 많았다. 그래서 장기적으로 모든 학생들을 받아들일 학교가 필요했다. 기숙사를 활용하는 방안까지 제안하기도 했다.
- 한때 소주한국학교 건립에 어려움이 있었는데.
상하이에서 80km 떨어진 도시인 소주는 아시아의 베니스로 불릴 만큼 유명한 관광지이자 살기 좋은 곳이다. 소주공업단지가 형성돼 있고, 삼성 등 한국기업과 주재원 자녀들이 많다. 소주한국학교는 2014년 중국 징판중학교를 일부 임차해서 개교했다.
하지만 교육여건은 열악했고, 학년수도 많아서 교실을 반으로 나눠야 했다. 25명이었던 학생수가 215명으로 늘어나면서 신축교실이 절박한 상황에서 다행히 2016년 9월, 새로 지은 학교로 이전할 수 있게 됐다. 소주한국학교는 교민과 기업의 도움과 사랑으로 벽돌을 쌓아 건립한 학교다.
총 150억 원이 소요됐는데, 정부지원 75억 원은 마련됐지만, 교민성금 75억 원에서 20억 원이 부족했다. 사랑의 벽돌쌓기 1000만 모금운동 등 1구좌 운동과 여러 기업들의 열성어린 후원으로 건립할 수 있었다.
- 마지막으로 중국진출을 준비하는 사람에게 남길 말이 있다면.
중국에서 사업을 하려면 무엇보다 중국인의 마음을 움직여야 한다. 마음의 언어가 가장 중요하다. 언어는 그 다음이다.
중국어를 못하면 세계 공용어인 영어를 써도 된다. 영어마저 안 되면 글로 쓰고 바디 랭기지를 해도 된다. 마음으로 그들을 움직이는 게 중요하다. 그들의 마음을 열려면 정성어린 선물을 준비하라. 상대의 마음을 활짝 열어 줄 언어를 구사한다면 얼마든지 사업에 성공할 가능성이 많다.
부산대학교 졸업
1989년 토마토무역상사 설립
1998년 토마토무역상사 상해 이전
2003년 우리식품유한공사 설립
상해한국상회 요식업분과위원장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하이 협의회 전임회장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화동협의회 상임의장
월드 옥타 상하이 협의회 고문
상해 화동한식협회 명예회장
동포사회 발전기여 공로 인정 외교통상부 장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