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중국한인청년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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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19-02-15 22:05|본문
재중국한인청년동맹
1928년 만주에서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
1920년 청산리전투 이후 일본의 적극적인 무력탄압정책과 독립운동단체의 분열 등으로 만주의 독립운동은 크게 약화되었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 1928년 5월 중순 길림성의 화전현(樺甸縣)과 반석현(盤石縣) 일대에서 정의부(正義府)의 일부 인사들에 의해 전민족유일당조직촉성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유일당조직론에 있어서 근본적인 이론상의 차이로 촉진회파와 협의회파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때 촉진회파가 중심이 되어 만들어졌으며, 황기찬(黃基贊)·이명도(李明道)의 북만청년총동맹(北滿靑年總同盟), 이철(李鐵)·김만전(金萬全)의 남만청년총동맹(南滿靑年總同盟), 이희태(李熙太)의 동만청년총동맹(東滿靑年總同盟), 송경호(宋景鎬)의 송강청년총동맹(淞江靑年總同盟), 이광민(李光民)의 여족공의회(麗族公議會), 윤정우(尹丁雨)·김문(金文)의 합장청년회(哈長靑年會), 박동초(朴東初)의 재만농민동맹 등 7개 단체로 구성되었다.
그 뒤 집행위원장 김만선(金萬善), 서무부 진공목(陳公木), 조직부 이병하(李炳夏), 선전부 최환(崔煥)의 집행위원이 선출되었다. 이들은 재중한인청년의 총결속, 조선독립의 완성, 중국 국민운동에의 참여, 세계혁명 완성, 제국주의 전쟁 위기와의 전투 등에 목적을 두었다.
행동강령으로 첫째, 중국혁명청년과 동맹하여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자. 둘째, 민족유일협동전선당을 완성하자. 셋째, 조직적 군사운동을 일으키자. 넷째, 대중적·합법적 투쟁을 적극적으로 전개하자 등을 채택하였다.
동맹은 유일당조직운동의 전위대 구실을 담당하였다. 그러나 빈주문제(賓州問題)로 고려혁명당 등이 신민부 군정파에 속하는 김좌진(金佐鎭)을 반혁명의 주구로 규정, 비판하였다. 군정파는 이에 대한 반발로 재중국한인청년동맹에 가담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신민부는 양분되었고, 따라서 정의부 주도의 삼부통합운동은 결렬되고 말았다. 기관지로 『청년전위(靑年前衛)』를 간행하였다.
재중국한인청년동맹 [在中國韓人靑年同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