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여, 침을 뱉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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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19-05-05 18:16|본문
작품해설
1968년 4월 부산에서 펜클럽 주체로 개최된 문학세미나에서 발표한 김수영의 평론.
김수영이 자신의 참여시에 대한 견해를 밝힌 글로, 산문집 『시여, 침을 뱉어라』(민음사, 1975), 『김수영 전집 2-산문』(민음사, 1981)에 수록되었다. 시의 내용과 형식, 참여시 등에 대한 견해를 밝히고 있다. 먼저 시를 쓰는 것은 ‘머리’와 ‘심장’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으로 그것이 곧 시의 형식이고, 시를 논한다는 것은 시의 내용을 가리키는 것으로 산문의 의미, 모험의 의미를 포함한다.
그에 의하면 시적 모험이란 “세계의 개진(開陳), 하이데거가 말한 대지(大地)의 은폐(隱蔽)의 반대되는 말”로서 시의 본질은 이러한 개진과 은폐의, 세계와 대지의 양극의 긴장 위에 서 있으며, 언제나 모험의 의미를 띠며 산문의 정신과 통한다. 참여시는 정치적 자유와 개인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 대한 시적 대응방법이다. 그는 내용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는 형식의 자유도 인정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서 시 쓰기는 모험의 의미를 띤 “자유의 이행(履行)”이 된다. “모험은 자유의 서술도, 자유의 주장도 아닌 자유의 이행이다. 자유의 이행에는 전후좌우의 설명이 필요없다(……) 자유는 고독한 것이다. 그처럼, 시는 고독하고 장엄한 것이다.” 정치적 금기(禁忌)에 묶여 이 자유의 이행에 용기가 없는 시인의 얼굴에 “침을 뱉”어야 한다.
자유에는 얼마간 ‘혼란’이 따르지만 그것은 허용되어야 하며, 시의 임무는 “문화의 본질적 근원을 발효시키는 누룩의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결론 부분은 다음과 같은 유명한 귀절로 끝난다. “시는 온몸으로, 바로 온몸을 밀고나가는 것이다(……) 시의 형식은 내용에 의지하지 않고 그 내용은 형식에 의지하지 않는다(……) 시는 문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고, 인류를 염두에 두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것은 문화와 민족과 인류에 공헌하고 평화에 공헌한다.” 김수영의 시론과 시 세계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시여 침을 뱉어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2004. 2. 25., 권영민)
김수영 주요 작품
폭포
폭포는 곧은 절벽(絶壁)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規定)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向)하여 떨어진다는 의미(意味)도 없이
계절(季節)과 주야(晝夜)를 가리지 않고
고매(高邁)한 정신(精神)처럼 쉴사이없이 떨어진다.
금잔화(金盞花)도 인가(人家)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瀑布)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醉)할 순간(瞬間)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安定)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幅)도 없이
떨어진다.
푸른 하늘을
자유를 위해서
비상하여 본 일이 있는
사람이면 알지
노고지리가
무엇을 보고
노래하는가를
어째서 자유에는
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
혁명은
왜 고독한 것인가를
혁명은
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중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2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풀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눈
눈은 살아 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 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 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구름의 파수병」[7]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
그러면 나는 내가 詩(시)와는 反逆(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먼 山頂(산정)에 서있는 마음으로
나의 자식과 나의 아내와
그 주위에 놓인 잡스러운 물건들을 본다
그리고
나는 이미 정하여진 물체만을 보기로 결심하고 있는데
만약에 또 어느 나의 친구가 와서 나의 꿈을 깨워주고
나의 그릇됨을 꾸짖어주어도 좋다
함부로 흘리는 피가 싫어서
이다지 낡아빠진 생활을 하는 것은 아니리라
먼지 낀 잡초 우에
잠자는 구름이여
고생도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세상에서는
철늦은 거미같이 존재없이 살기도 어려운 일
방 두간과 마루 한간과 말쑥한 부엌과 애처로운 妻(처)를 거느리고
외양만이라도 남과 같이 살아간다는 것이 이다지도 쑥스러울 수가 있을까
詩(시)를 배반하고 사는 마음이여
자기의 裸體(나체)를 더듬어보고 살펴볼 수 없는 詩人(시인)처럼 비참한 사람이 또 어디 있을까
거리에 나와서 집을 보고
집에 앉아서 거리를 그리던 어리석음도 이제는 모두 사라졌나보다
날아간 제비와 같이
날아간 제비와 같이 자죽도 꿈도 없이
어디로인지 알 수 없으나
어디로이든 가야 할 反逆(반역)의 정신
나는 지금 산정에 있다 ――
시를 반역한 죄로
이 메마른 산정에서 오랫동안
꿈도 없이 바라보아야 할 구름
그리고 그 구름의 파수병인 나
김수영 시의 특징
시어의 특징
김수영은 스스로 자신의 시어가 평범하다고 했지만, 시와 산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말(언어)에 대한 그의 생각은 매우 진보적이다. 김수영은 일체의 정립된 언어와 고정된 언어를 부정직한 것으로 여겼다. 그의 언어는 관습의 언어가 아니라 “자기의 언어”이며, 대물림한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담고 있는 언어다.
김수영의 시에는 한자어와 영어와 일본어가 동시에 등장하고, 문어와 구어가 구별 없이 사용되며, 관념어와 구체어가 섞여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가 즐겨 사용한 한자어, 일본어, 영어, 속어, 구어, 관념어 등은 어느 하나의 지배적 언어로 귀속되려는 언어에 대한 경계가 된다.
시의 세계
초기에는 모더니즘의 경향을 보였으나 점차 그 한계에서 벗어나려 하였고, 4.19 혁명을 고비로 강렬한 현실 의식을 추구하는 쪽으로 전환했다. 주로 자기 고백의 직설적인 어조로 소시민의 자기 각성, 지식인의 정직한 고뇌, 자유가 억압된 현실에 대한 항의를 다루며 ‘온몸’의 시학을 주창했다.
김수영은 자신의 시세계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극복한 곳에 자리하고 싶었던 시인이다.
때문에 그의 시를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을 넘어 열린 시각으로 읽어야 그의 시세계를 온전히 파악할 수 있다.
1921년11월 27일(음력 10월 28일) 서울 종로2가 관철동 158번지에서 출생.
아버지 김태욱(金泰旭)과 어머니 안형순(安亨順) 사이의 8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나다. 증조부 김정흡(金貞洽)은 종4품 무관으로 용양위(龍塗衛) 부사과(副司果)를 지냈으며, 할아버지 김희종(金喜鍾)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중추의관(中樞議官)을 지냈다. 당시만 해도 집안은 부유했던 편으로, 경기도의 파주, 문산, 김포와 강원도의 홍천 등지에 상당한 토지를 소유하고 있어서 연 500석 이상의 추수를 했다. 그러나 김수영(金洙暎)이 태어났을 때는, 일제가 조선 지배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조선 토지조사 사업의 여파로 인해 가세가 급격히 기울어지기 시작하여, 종로6가 116번지로 이사한다. 김수영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지전상(紙廛商)을 경영한다.
1943년 (23세) 만주 길림성(지린성)으로 이주.
태평양전쟁으로 서울 시민의 생활이 극도로 어려워지자 집안이 만주 길림성(지린성, 吉林省)으로 이주한다. 김수영도 조선학병(朝鮮學兵) 징집을 피해 겨울에 귀국하여 종로6가 고모집에서 머문다. 쓰키지 소극장 출신이며 미즈시나에게 사사받은 안영일(安英一)을 찾아간다. 안영일은 당시 서울 연극계를 주도하고 있었고,김수영은 한동안 그의 밑에서 조연출을 맡았던 듯하다.
1944년 (24세) 봄,가족들이 있는 만주 길림성(지린성)으로 떠남.
그곳에서 길림극예술연구회 회원으로 있던 임헌태, 오해석 등과 만난다. 그들은 그때 조선, 일본, 중국의 세 민족이 참가하는 길림성예능협회 주최의 춘계 예능대회에 올릴 작품(연극) 준비를 하고 있었다.
1968년 (48세) 6월 15일 사망.<사상계> 1월호에 발표했던 평론 ‘지식인의 사회참여’를 발단으로, <조선일보> 지상을 통하여 이어령과 뜨거운 논쟁을 3회에 걸쳐 주고받는다. 이 논쟁은 문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4월, 부산에서 열린 펜클럽 주최 문학세미나에서 ‘시여 침을 뱉어라’라는 제목으로 주제 발표.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경주에 들러 청마 유치환의 시비를 찾는다.
6월 15일, 밤 11시 10분경 귀가하던 길에 구수동 집 근처에서 버스에 부딪힌다. 서대문에 있는 적십자병원에 이송되어 응급치료를 받았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다음날(16일) 아침 8시 50분에 숨을 거둔다. 6월 18일, 예총회관 광장에서 문인장(文人葬)으로 장례를 치르고, 서울 도봉동에 있는 선영(先塋)에 안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