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서경덕과 황진이 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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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백두넷 | 작성일 :19-07-21 20:11|본문
조선시대 서경덕과 황진이 야화
개성의 유명한 기생(娼妓) 황진이는 조선 500년 역사상 가장 시를 잘 쓴 시인 중의 한 사람이며, 어지러운 세상에 나가지 않고 독자적인 학문의 길을 걸은 조선의 대표적인 처사(處士) 서경덕(徐敬德)에 관하여 전해오는 야화가 있다.
황진이는 서경덕을 마지막 연인으로 목표를 삼았지만 서경덕은 명성답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명한 기생(娼妓) 황진이는 기생이 아니라 ‘천리를 터득한 도인’이 되어 서경덕과 훗날 사제지간(師弟之間)으로 지냈다고 한다.
그러나 황진이의 애달픈 연정(戀情)에 대한 서경덕의 속일 수 없는 감정(感情)으로 응대하는 듯한 시조를 통하여 둘 만의 참을 수 없는 애틋한 연서(戀書)를 통한 교감을 알 수 있다.
산은 옛산이로되 물은 옛물 아니로다
주야(晝夜)에 흐르니 옛물이 있을쏘냐
인걸(人傑)도 물과 같아여 가고 아니 오도다.-황진이-
조선 중종 때 서경덕이 황진이를 대상으로 지은 시로 《해동가요》에 실려 있다.
마음이 어린 後(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萬重雲山(만중운산)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서경덕-
그래서 훗날 서경덕과 황진이를 송도(松都.개성) 3절(三絶, 박연폭포ㆍ서경덕ㆍ황진이)의 하나로 부르는 것이다.
두 사람간의 소통과 연분(點一二口 牛頭不出)의 의미에 대한 야화다.
예전의 기생이 명기가 되려면 미색뿐 아니라, 글과 가무에 아주 능하여야 되는데 기생의 소문은 널리 퍼져 팔도의 많은 한량이 모두 당대 천하절색 (天下絕色) 기생 황진이를 찾아가서 연정을 고백했으나
그때마다 이 기생은 한량의 청을 들어주는 대신 문제(點一二口 牛頭不出: 점일이구 우두불출)를 내고 그 의미를 푸는 조건을 내 세웠다.
그러나 희대의 문장가라는 사람도 황진이가 낸 글을 풀이하지 못하고 허탈하게 돌아 갔다.
조선 성종 때 하루는 비록 남루했지만 범상치 않은 기품으로 보여 졌던 당대 철학자인 서경덕에게 황진이가 새 집필묵을 갈아 ‘點一二口 牛頭不出’ 써 보였다.
황진이가 낸 문제에 대하여 서경덕이 푼 황진이의 글 뜻은
點一二口는 글자대로,
點一二口 이고 글자를 모두 합치면
말씀 (言) 자가 되고
牛頭不出 이란 ‘소머리에 뿔이 없다’는 뜻으로
牛 에서 머리(뿔)를 떼어 버리면 (午) 자가 되는 것이다.
이 두글자를 합치면 허락할 (許)자다.결국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자신을 바친다는 뜻을
이렇게 사행시로 전달한 것이다.
서경덕은 기생 황진이 글귀를 보고 빙긋이 웃으면서 황진이의 명주 속치마를 펼치게 한 후 단필(한자)로 "許" 라고 썼다.
순간 기생 황진이는 서경덕 에게 일어나 큰 절을 삼배 올렸다.
절 삼배는 산자에겐 한번, 죽은 자에겐 두번, 세번은 첫 정절을 바치는 남자에게 하는 여인의 법도(法道)라는 의미에서다.
그야말로 “여자는 자기를 기쁘게 해주는(자기와 通하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을 한다”(女爲悅己者容)는 기분에서 그날 밤 서경덕과 기생 황진이는 만리장성을 쌓았다.
그리고 보름이 지난 후 서경덕은 황진이에게 문창호지에 시한수를 적어놓고 홀연히 길을 떠나 버렸다.
“물은 고이면 강이 되지 못하고 바람이 불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아니한다. 내가 가는 곳이 집이요 하늘은 이불이며 목마르면 이슬 마시고 배 고프면 초목근피(草根木皮)가 있는데 이 보다 더 좋은 세상이 어디 있느냐?
이후 황진이는 서경덕을 잊지 못하고 뼈에 사무치도록 그리워하였다.
수년을 찾아 해맨 끝에 재회한 선비 서경덕이 홀연히 떠나버린 것을 알고 이내 선비의 고고한 심증을 읽고서 ‘선비의 사랑은 소유해도 선비의 몸은 소유 할 수 없다’는 것을 깨우쳤다 .
‘아름다운 여인은 운명이 기박하다’는 가인박명(佳人薄命) 황진이는 선비의 깊고 높은 큰 사랑을 받았다는 것으로 스스로 위로하며 평생을 서경덕을 그리워하되 흠모하며 사제지간(師弟之間)으로 살았다.